초대일시_2009_0708_수요일_06:00pm
참여작가 박수진_박은성_김지영_이은미_이정화_진혜주_하성미
관람시간 / 10:00am~10:00pm
갤러리 테라이그니스 GALLERY TERRAIGNIS 서울 강남구 역삼동 634-4번지 Tel. +82.2.552.5425 www.terraignis.co.kr
갤러리 TERRAIGNIS 에서는 2009년 7월 젊은 여성작가들의 도조인형展을 선보이면서, 개관1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를 함께 마련합니다. 테라이그니스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안은 도자조형의 확장된 영역을 소개하고, 도시화의 영향으로 멀어져 가는 문화와 예술에서의 정성과 마음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름다운 꽃에서 가꾸어 온 사람의 노고를 찾아볼 수 있듯이, 이번 전시를 통해 지난 1년간의 과정 속에 우러난 고민과 노력의 흔적을 봐주시길 바랍니다. 가까운 지인들과 함께하시어 뜻 깊고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캐주얼한 바베큐 와인 파티입니다. ● 인형이란 단어에 자유 연상되는 첫 번째 단어는 '소녀에 대한 환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작품을 보고 의뢰한 7인의 작가 모두 여성이며 소녀기적 모습이 엿보인다는 점(감성이나 몸가짐, 어투 등)에서 적잖이 놀랬습니다. 하지만 환상은 금새 깨지기 위한 것인가 봅니다. 페티쉬fetish적인 성격이 진하게 드러나는 구체관절 인형의 일면이나 절대적 아름다움의 대상으로서 인형을 습관적으로 소녀적 취향이라 구분 짓는 나를 발견하면서 나 역시 기존의 틀 안에 이분법적으로 사고하고 있다는 것에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사람들은 인형을 어릴 적 장난감(로봇 류까지 포함해서)으로만 기억하거나 혹은 추억의 연장선으로 순수한 욕구인 키덜트 토이Kidult toy로만 향유하고 있지만 『존재확인의 낯선 여행-인형人形이 바라보는 소녀의 환상:사람의 인형화』展 은 사람과 인형의 근본적인 관계와 위치를 뒤돌아보면서 우리 자신 역시 뒤돌아보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창조적 위치에서 절대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동일 선상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인형을 종속적 관계로 놓지 않고 수평적으로 바라보고 인형의 시각에서 우리의 존재를 재확인하는 시도인 것입니다.인형은 인간적이며 동시에 비인간적인 이중적인 경계에 놓여져 있습니다. 양면성을 가지는 존재로서 감정 이입의 주체이자 감정을 폭발시키는 대상이고, 원본을 닮은 복제이지만 고유한 아우라Aura를 띄기도 합니다. 인형의 성격을 경계의 모호성에 두고 주체의 전이와 대상의 주체화 사이에서 끊임없이 헤매고 있는 정체성의 이동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할 포스터, "욕망, 죽음 그리고 아름다움", p.147-148 ) 이런 관점에서 인형의 성격을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자기동일시同一視로 시작되는 분신分身으로서의 분열적 성격입니다. ● 이것은 거의 완벽하게 자가복제複製적인 주체의 전이이며 자기존재 확인의 학습입니다. 인형은 동일시의 투사가 일어난 대상으로서 자아와 끊임없이 소통하며 서로가 스스로를 확인하고 규정합니다. 주체를 완벽히 이해하는 타자로서 깊은 유대감과 고통을 함께 하는 자기 위안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또한 감정이나 행동 습관을 길들이는 사육의 한 방법으로써 주체는 인형을 길들이고 다시 인형은 주체를 길들입니다. 서로가 길들여지는 과정에서 주체는 역할 바꾸기로 수많은 자아를 포장합니다. 어머니가 되고 때론 아버지가, 그리고 엄한 선생님이, 따뜻한 또래가 되기도 합니다. 사회적 타자他者의 시선을 가지는 동시에 내·외적 유사성을 함께 지니는 자기 미메시스Mimesis로서 자기 환상의 이데아Idea를 꿈꾸는 존재인 것입니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자신만의 이데아를 만드는 존재입니다. 두 번째는 주술적이며 우상偶像의 성격을 띤다는 것입니다. ● 인형은 서로의 말을 절대적으로 들어주는 친구이자 자기최면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는 존재로 혹은 적대적인 저주의 대상으로서 주술적 성격을 가집니다. 단순히 말 들어주는 대상으로 시작한 상호관계는 나아가서 신적인 임무를 부여 받기도 합니다. 조그마한 소원을 얘기하는 대상이자 인간의 힘을 뛰어넘는 기복을 구하는, 주체적 성격을 지닌 우상으로서 숭배되는 현상까지 말입니다. 저주의 대상인 동시에 기복의 대상이며 자기최면의 이입물에서 때론 절대적인 우상을 오가는 이중적이며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기최면을 완성시키는 우상인 것입니다. 숭배와 경멸적 존재. 세 번째는 유희성입니다. ● 소꿉놀이부터 판타지의 주인공, 그리고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까지 유희성의 산물입니다. 인형은 자기변형이 완벽히 이뤄지는 원더랜드wonderland의 주인공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분신을 통해 자기변형이 이뤄진 주체는 허물어지지 않는 완벽한 판타지Fantasy를 창조하기도 하며 그 주인공으로서 전혀 다른 인격을 투사하고, 복제되지만 분신으로서 아우라Aura를 가지는 완전 분열된 절대적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타유Georges Batailles는 재현의 동기를 유사한 것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욕구에서 찾지 않고 변형시키고자 하는 유희에서 찾았다... 바타유가 보기에 이러한 재현은 아름다운 형식을 만드는 승화보다는 본능을 배출하는 행위에 가까웠다." (위의 글, p.176) 에서 말하듯이 인형에서는 인간과 유사한 것의 재현이 아닌 인간 자신을 변형하고 싶은 유희적 측면이 강하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네 번째는 사도마조히즘sadomasochism적 성격입니다. ● 앞에서 말한 유희성은 분명히 사도마조히즘적 성격도 가지고 있습니다. 창조자나 소유자의 절대적 위치에서 극단적으로 욕구를 해소할 수 있다는 점(저주의 대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점까지)에서 사디즘sadism적이며 동일시로 자가복제된 주체는 사디즘의 해소대상이 됨으로써 메조키즘masochism적이기도 합니다. 주체와 인형은 일방적인 사랑을 하기도 또한 받기도 하고,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는 종속적인 관계이지만 원더랜드의 주인공으로서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 자신만의 소유물이지만 똑같은 힘으로 영향을 주고받는 이중적인 관계, 버림으로써 새 것에 대한 환상과 버려짐으로써 새 주체를 찾을 수 있는 환상을 서로가 꿈꾸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고착된 욕망이 아닌 욕망의 주체 자체가 이동하는 현상으로 자신에 대해 순환하는 미메시스이며 자신만의 질서로의 복귀이자 파괴, 자신을 승화시켜 재창조하는 피조물이 될 수도 혹은 주체에게 새로운 환상과 성격을 부여하는 창조자의 기능과 자기희생적이며 자기파괴적인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소녀이며 아빠이고 악당이자 히어로가 되는 것입니다. 인형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갈망이자 자기 안으로 파고들게 하는 보수적인 성격을 가지며 세속적 권위를 느낄 수 없는 다른 세상에 이입시키는 능동자能動者이지만 동시에 절대적 약자이며 수동적인 거울과 같은 존재입니다. 다섯 번째는 자가복제적이지만 원형이 변형되고 힘을 갖게 되는 시뮬라크르simulacre라는 것입니다. ● 인형을 시뮬라크르의 논리에 비하자면 자가복제를 통해 주체의 복사된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생산하며 동시에 자기최면에서 오는 강력한 힘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복사된 이미지는 어느새 감정의 교류 속에 원본을 상실하고 이중적인 경계 속에 전혀 다른 평균(나르시시즘의 이데아)을 구하게 됩니다. 도플갱어Doppelganger적 존재로 자신에게 기생하지만 역으로 인형에 기생하는 모순적인 상황을 투영投影하고 있습니다. 실재하지 않지만 또 다른 자신을 완성시킨다는 점에서 실제로 자기최면을 통해 강력한 실체를 구현하고 거부할 수 없는 구속력을 반사시키는 존재인 것입니다. 어쩌면 사람이 하느님을 닮았지만 원본을 지우는 자유의지가 인간의 본능처럼 여겨지는 지금에서 인형은 우리를 투영시키지만 우리를 닮지 않았습니다. 앞의 다섯 가지 성격은 확실히 구분되지 않고 모호한 경계에서 서로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 김지영의 작품은 자신을 투영한 '클라라Clara'(세례명)에서 따온 '라라Lara'라는 이름의 인격체를 복사한다는 점에서 인형이 갖는 평상적인 의미를 가지지만 뭉뚱그려진 형상으로 작품의 성격자체를 모호한 감정의 경계에 놓고 있습니다. 인형화된 자기 자신을 얘기하고 있으며 친구의 개념으로 자리잡고 있지만 완전히 분열된 존재로 타자적인 시선으로 작품을 대합니다. 분신적이지만 자신의 일면을 추출해낸 분열적 존재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박은성의 인형은 리비도libido의 생산물로 보여집니다. 마법의 정원(거세를 인식하지 못하는 단계, 즉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전의 단계, 위의 글, p.163)에서 벗어나 성숙하고 싶은 욕망의 표현으로써 성적충동을 솔직하게 풀어내며 동시에 내적인 기억의 순화 작업입니다. 이것은 페티쉬적인 성격에서 벗어나 승화를 희망합니다. 리비도가 집중되어 있는 기억을 승화시켜 주체를 해방시킵니다.
이은미의 미생물 작업은 완벽한 허구의 상징물이자 타자중심적인 시선을 보여줍니다. 이은미의 인형들은 작가에게 생명을 부여 받는 일종의 피조물이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를 상상하면서 우리의 세계와 분리됐지만 공존하고 있는 인형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세상은 완전히 독립된 주체로 우리가 사는 세상과 수평적으로 공존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미메시스Mimesis적 산물로서의 인형이 아닌 또 다른 이데아Idea를 꿈꾸는 인형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서로를 침범하지 않는 관계로 환상적인 상생相生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인간 자신에게서 벗어나 완전히 독립한 생명체를 보여주는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페어리 테일Fairy Tale에서 들려주는 요정의 세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진혜주의 작업은 여성의 상징물인 핸드백이나 하이힐이 담겨있는 공간인 하이힐 박스 안에여성의 누드를 표현하면서 그 공간에 자궁의 성격을 부여하여 여성성을 가지지만 동시에 성이 없는 창조적 공간을 상징하기도, 혹은 벗어날 수 없는 사회적 틀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여성의 강박적 아름다움에 대한 역설적인 쾌감과 강박증을 넘어서는, 그 고통을 함께하는 초월적 의식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여성이 갖는 역할과 지위를 순수하게 얘기하지만(여성의 표현은 어머니와 대지의 여신을 모티프로 했습니다.) 아이러닉하게도 남성적인 시각을 벗어날 수 없는 누드를 그려내면서 다시 그 틀에 갇히는 모순 속에 이중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사심 없이 순수한 여성 자체를 보여주고 싶은 작가는 그 아름다운 신체를 표현하며 남성의 시각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였으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한스 벨머Hans Bellemer가 인형을 통해 남성적 관점에서 여성을 해체 변형시킴으로 오히려 남성의 파시즘을 모욕하듯이(위의 글, pp.181-185) 진혜주는 투사된 여성의 신체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남성의 파시즘을 파해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성미의 작품은 자아와 타자가 공존(한 몸에 융합한)하는 인형입니다. 인간의 시각과 자연의 주체이자 타자일 수 있는 동물의 시각이 함께 있으며 주체와 타자의 평등한 혼융渾融. 진화적 생명체를 보여줍니다. 변형의 유희를 충분히 즐기고 있습니다.
이정화는 사디스트적인 사회에 학대받는 메조키스트적인 개인의 표상으로 인형을 선보입니다. 내부에 고여있는 존재로서 세계와 서로가 흡수되지 않는 관계이지만 외톨이라는 성격은 사회적으로만 정의된다는 점에서 또 다른 관계맺기를 보여줍니다. 외톨이지만 자신의 세계에서 주인공이 됩니다. 동화 속 장면을 연출한 듯한 상황설정 안의 인형은 사람과의 동일시에서 오는 분신적 성격으로 몰입과 호감을 주지만 빠른 시간 안에 생명성과 비생명성의 경계에서 언캐니Ucanny한 감정을 일으키며, 일종의 동력장치(스프링이나 모터 같은)를 갖춘 인형의 움직임은 이를 가속화시킵니다. 익숙하지만 낯선 광경으로 자아를 뒤돌아보게 합니다.
박수진의 작품은 인형의 느낌보다는 자소상적 이미지가 강한 작품으로 일반화할 수 있는 감정을 공유하면서도 푼크툼Punctum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과라는 상징으로 성서적 이야기를 이끌어내기도, 여성의 역할을 재해석하기도 하지만 작품의 표정과 몸짓은 논리적으로 일반화하기 힘든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그 원류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어떠한 슬픔의 뉘앙스를 풍기는데 작업의 질서정연한 논리보다는 카타르시스로 작업을 하고 있는 듯합니다. 카타르시스의 산물인 인형은 메조키스트적인 작가 자신의 감정의 이입물이며 극복하는 존재로서 절대적인 사디스트의 양태를 보입니다. ● 7인의 작가에게서 인형은 서로가 즉자卽自, an sich적 존재에서 대자對自적 존재로 들어서는 매개체로 작용합니다. 인형에게 투영된 이미지를 통해 다시금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복사된 이미지에 생명을 불어넣고, 다시금 자신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인형이 타자화돼 자신을 재조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삶의 제의식祭儀式입니다. 그들에게 인형이란 죽음의 본질을 내포하는 정지되어버린 삶의 일면이 아니라 이동하는 주체의 활동으로써 자유로우며, 자가복제의 분열을 통해 절대적이고 일방적인 대상에서 벗어나 타자의 시선에서 또 다른 자신을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수평적입니다. ● 소녀의 환상은 깨졌지만 투사投射된 소녀기, 소년기의 환영을 간직하고 있는 성숙한 세상에 대한 동정童貞이자 희망을 품고 있는 자기존재 확인의 작업, 잃어버린 대상에 대한 욕망이기보단 지속적인 진행형의 소녀적 순결한 환상인 인형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내포하고 있는 현재를 비추고 있습니다. ● 거울 속 존재는 자기자신을 그대로 비추지만 오른쪽과 왼쪽이 뒤바뀐 전혀 다른 존재입니다. 나로 인해 존재하지만 나와는 또 다른 세계에 있습니다. 인형이 바라보는 사람의 인형화는 거울을 사이에 둔,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인 인형을 통해 현 세상의 관계맺기에 대해 또 다른 타자적인 물음을 던지는 것입니다 (참고문헌 : 할 포스터, 「욕망, 죽음 그리고 아름다움」, 전영백과 현대미술연구팀 옮김, 아트북스, 2005) ■ 이정헌
Vol.20090707d | 존재확인의 낯선 여행-인형人形이 바라보는 소녀의 환상:사람의 인형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