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는 풍경

김명진展 / KIMMYOUNGJIN / 金明辰 / painting   2009_0703 ▶ 2009_0723 / 일요일 휴관

김명진_with nap_장지에 한지콜라주_130×162cm_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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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9_0703_금요일_06:00pm

TJH갤러리 초대展

관람시간 / 10:00am~07:00pm / 토요일_10:00am~04:00pm / 일요일 휴관

TJH갤러리_TJH GALLERY 서울 강남구 역삼동 707-38번지 테헤란오피스빌딩 3층 Tel. +82.2.558.8975

한지 꼴라주로 연출한 객관적 우연 ● 2000년부터 전시를 통해 발표하기 시작한 김명진의 한지 꼴라주 작업은 1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또 다른 차원으로 도약했다. 그의 방식은 나무의 단면을 탁본한 한지를 얇게 자르거나 찢어서 장지위에 붙여가며 형상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의 한지 꼴라주는 몇몇 작품에서 두터운 물성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바탕 면에 밀착되어 있어 붓으로 그린 것 같은 효과를 준다. 그러나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나이테의 탁본을 지면에 다시 구성함으로서 붓질과도 다른 효과를 준다. 탁본, 자르기, 찢기, 붙이기 등의 여러 단계를 거치는 동안 우연과 필연이 복합된다. 바탕 화면을 처리한 것 외에 붓질은 생략되지만, 붓으로 그린 것 못지않은 변화무쌍한 형상과 섬세한 표현이 가능하다. 동양화 재료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일필휘지 같은 류의 표현은 없다. 그러나 그것이 가지는 우연성과 자발성의 효과는 보유한다. 서양화처럼 위로 덧붙여가는 치밀한 스타일로 색상과 형태가 만들어지지만, 결과물이 결정화되지는 않는다. 김명진의 작품은 이처럼 모호한 경계지대에 서 있다.

김명진_organscape_장지에 한지콜라주_191×122cm_2009

그의 남양주 작업실에는 커다란 나무 둥치가 있는데, 여기에서 작품의 재료인 나이테가 탁본된다. 몇 겹의 한지로 탁본을 뜨면 여러 농담이 생기고 그것을 말려서 사용한다. 얇은 것은 작두로 썰고, 보통은 손으로 찢어서 재료를 마련해 놓는다. 이것이 그의 팔레트가 된다. 꼴라주가 집적되고 연결되면서 형상이 구축된다. 탁본된 한지는 워낙 얇아서, 가루 풀을 개어서 주름 없이 표면에 고착시키면 화면에 직접 그린 것 같은 효과가 나타난다. 작업은 사전 스케치도 없이 시작되며, 탁본되어 잘려진 재료들은 중구난방으로 뒤섞여 있다. 한가닥씩 재료를 꺼내어 붙이면서, 연쇄적인 꼴라주의 흔적을 따라간다. 여기에서 떠오르는 단상이나 이미지들을 붙잡아 놓는다. 그 와중에 잘려지거나 찢어진 형태, 탁본의 원형이 된 나무의 나이테 등은 서로 침투하고 혼연일체가 되어, 불확실한 형태로 변모한다. 1999년에 한지 꼴라주 작업을 시작한 이래, 2000년대 중반까지는 2mm 내지5mm 정도로 얇게 잘라 이어붙이는 일종의 모자이크 같은 스타일이었는데, 지금 작품은 폭이 상당히 넓어졌다. 이번 전시에서는 2mm에서10cm에 이르는 여러 폭이 탁본된 한지를 사용한다. ● 탁본된 한지의 너비를 비롯하여, 무채색의 계조에서 색상이 들어가는 식의 변화는 있었지만, 기본적인 방법론은 2000년 이래로 유지되고 있다. 남양주에 작업실을 꾸리면서 풍경적 요소가 강해졌지만, 이번 전시 『움직이는 풍경』전은 멀리서 바라보는 관조적 풍경이 아니라, 그 내부로 미끄러지며 침투한다. 그에게 자연은 재현의 대상이 아니라, 소우주적 차원에서 구성되거나 해체되는 요소이다. 이러한 면모는 인물이라는 구상적 형태가 분명했던 첫 개인전 『이식하기』(2000년)부터 나타나는 것인데, 이 전시에서 그는 나이테의 섬유질 표면을 인물의 피부처럼 사용하였다. 작가는 서울 근교인 남양주에 들어와서 풍경과 동화작용이 강해졌다고 말한다. 녹색 계조의 색은 작년부터 작품에 들어왔다. 그 이전에는 색과 굵기, 농담의 차이로만 이루어진 무채색 계열의 작품이 주를 이루었다. 이번전시에서는 풍경이라는 식물적 요소가 동물의 내장기관을 연상시키는 요소와 중첩 된다. 작가가 고안한 구성요소들이 덧붙여지면서 증식되는 과정은 이전과 연속적이다.

김명진_organscape_장지에 한지콜라주_96.5×130cm_2009
김명진_organscape_장지에 한지콜라주_60×128cm_2009

이전 작업이 인간의 원초적인 면모를 들추었다면, 이번 전시는 인간과는 다른 자연의 시간성을 다룬다. 작품 「organscape」 시리즈는 자연이 요소로 분쇄되고 재조합되면서 풍경을 이루는 것으로서, 이 전시의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녹색 계열의 색상이 주조를 이루고 보색이 약간씩 포인트를 준다. 형태적인 면에서는 무정형의 덩어리와 선의 대조가 특징적이다. 화면 전면에 수동적으로 웅크리고 있는 형태와 이에 연결되어 바깥으로 빠져 나가는,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선의 흐름이 결합되어 펼쳐진 세포내 기관 같은 형상을 이룬다. 덩어리에서 뻗어 나온 선들은 섬유다발이나 망을 형성한다. 무채색 계열이 이전 작품과 절충을 이룬 단계의 작품도 있다. 영겁회귀의 선들로 이루어진 동심원 구조의 검은 바탕 위에 펼쳐진 풍경이 그것이다. 깊은 심연으로부터 막 태어난 듯한(반대로 보면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생동하는 풍경이다. 바탕과 형상모두 차이의 계열을 이루며, 다차원적인 자연을 표현하고 있다. 김명진에게 자연은 외관이 아니라 요소이며, 고정된 구조가 아니라 동적인 생성이다. 검은 바탕 위에 무채 색조의 선과 조직이 뻗어 나오거나 떠있는 「growing」 시리즈는 요소들이 생성으로 전화하는 모습을 포착한다. ● 증식과 분열의 이미지는 숲으로 대변되는 자연 뿐 아니라, 집이나 인간 형상에도 적용된다. 자연 속에서 본격적으로 작품을 준비한 이번 전시에서 색채에 대한 억압은 해소되었다. 다양한 굵기로 잘려지거나 찢어진 탁본 종이 뭉치가 들어있는 통은 팔렛트를 대신한다. 이 통은 장인에게 익숙한 다양한 기구들이 한데 뒤섞여 있는 연장통을 생각나게 한다. 무질서한 듯하나 필요한 것을 정확하게 끄집어내서 뚝딱 해치우는 것이다. 몇 가지로 한정된 재료이지만 조합의 수는 무한하다. 여기에는 과학적인 정확함보다는 장인적인 융통성이 두드러진다.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에서 브리콜라주bricolage를 행하는 브리콜뢰르bricoleur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브리콜뢰르는 아무것이나 주어진 도구를 써서 자기 손으로 무엇을 만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손재주꾼이 사용하는 재료의 세계는 한정되어 있어서 손쉽게 갖고 있는 것으로 하는 게 승부의 원칙이다. 말하자면 그가 갖고 있는 도구와 재료는 항상 얼마 안 되고 그나마 잡다한 것들이다. ● 각 부품은 실제적이면서도 가능한 관계들의 집합을 나타낸다. 그 부품들은 조작매체이다. 그러나 동일한 유형에 속하는 것이라면 어떠한 조작에라도 쓸 수 있는 매체이다. 레비 스트로스는 브리꼴뢰르의 활동을 신화적 사고와 연결시킨다. 신화적 사고의 특성은 그 구성이 잡다하며 광범위하고, 그러면서도 한정된 재료로 스스로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김명진은 한지 꼴라주를 시작한 초창기에는 일정한 굵기의 탁본 재료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점차 구성요소들은 복잡해져 갔다. 명확한 계획에 따라 사전에 결정된 재료를 사용하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적절한 융통성을 발휘한다. 상황은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만나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구성요소들이 복잡하긴 해도 무한하지는 않으며, 임의적이긴 해도 익숙한 방식으로 계열화되고, 동일한 방법론을 관철함으로서 일관성이 유지된다. 그의 브리꼴라주의 기구들은 구체적인 동시에 잠재적인 관계의 총체로서 폐쇄된 체계를 통해 해결책을 강구한다. 「야생의 사고」가 예시하듯이, 김명진의 브리꼴라주적인 작업은 과학이나 예술과도 다른 방식, 곧 신화적인 방식에 가깝다.

김명진_organscape_장지에 한지콜라주_90×200cm_2009

레비 스트로스에 의하면 신화적 사고의 특성이란 서로가 어울리지 않는 요소로 이루어지고, 또 넓기는 하지만 한계가 있는 레퍼토리를 사용하여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손재주꾼의 논리는 구조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구조화하는 것이다. 신화의 구성단위가 언어에서 빌려온 것이어서 미리 정해진 의미에 따라 구속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손재주꾼이 모아서 쓰고 있는 부품도 그처럼 구속된다. 하나의 선택이 이루어질 때마다 구조는 완전히 재구성된다. 김명진의 방식은 무질서한 듯하나 나름의 질서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추상의 과학은 아니다. 복잡한 선적 움직임은 시간의 흐름을 가시화 한다. 그러나 그것은 신화처럼 무시간적인 시간이다. 덩어리로 응집되거나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가는 선은 물론이거니와, 2000년대 초기의 작업에서 심연의 공간을 가르는 수직 띠의 흐름이나 보이지 않는 중심을 향해 휘몰아치는 선들이 나타내는 시간성 또한 그러하다. ● 일정한 구성요소들의 재조합과 사건의 잔재들을 구조적으로 배열하는 김명진의 『움직이는 풍경』은, 내부와 외부, 소우주와 대우주를 구별하는 가시적인 외관의 질서에 길들여지지 않고, 그것을 무너뜨리며 원초적인 에너지로 충전되어 있는 형상이며, 그것은 신화적 사고와 브리꼴뢰르의 활동이 교차하는 야생의 사고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레비 스트로스는 신화적 사고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용 가능한 수단들의 총체가 암묵적으로 목록화 되거나 구상되어야 하며, 그 결과 재료 집합의 구조와 계획의 구조 사이에 절충이 생긴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 계획의 구조는 일단 만들어지면 당초의 의도로부터 어쩔 수 없이 유리된다. 이 현상을 초현실주의자는 '객관적 우연'이라고 표현 한 바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명진의 탁본의 조합이라는 방식과 초현실주의의 관계를 지적할 수 있다. 그의 탁본은 초현실주의의 프로타주 기법을 떠오르게 하는데, 사물의 표피를 베껴낸 형태와 작가의 무의식이 공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명은 초현실주의 미학에서 '객관적인 우연'처럼, 주관적이고 객관적 요소의 융합을 이룬다.

김명진_organscape_장지에 한지콜라주_122×122cm_2009

초현실주의자 중에서 프로타주와 꼴라주라는 두 가지 방식을 모두 쓴 이는 막스 에른스트로 알려져 있다. 베르너 슈피스는 막스 에른스트에 대한 저서에서 물질과 매체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보여주는 막스 에른스트의 프로타주 기법을 반(反) 회화적인 해결책이라고 평가한다. 에른스트가 프로타주 기법을 발견한 것은 마루의 나뭇결에 매혹된 결과였다. 그것은 나무 밑둥치의 나이테를 탁본하는 김명진의 방식과 유사하다. 에른스트의 최초이며 또한 가장 포괄적인 프로타주 화집은 [박물지](1925)이다. 여기에서 그는 박물학의 대상인 합리적이고 설명 가능한 세계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김명진의 경우에는 박물지 같은 세계의 목록이나 편람을 작성하려는 것이 아니라, 숲으로 대변되는 자연의 내부로 침투하고 그것과 내적으로 공명하려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사물의 표피를 떠내어 그것을 조형적으로 가공하는 과정, 그리고 구조와 대상을 완전히 결합시키지 않는 점은 공통적이다. 그래서 그들의 형상은 모호하고 매혹적이다. 그러나 우연성으로 완전히 흩어지지는 않고 제어된 행동과 제어되지 않은 행동이 조화되어 있다. 초현실주의 미학에서 꼴라주와 프로타주의 출발점은 비슷했다. 양자는 모두 '영감을 환기 시키는 두 가지 기법'(에른스트)이였던 것이다. ● 김명진에게 꼴라주의 재료는 그자체가 조각보 쪼가리 같은 조형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잘려지고 연결되며 중첩되면서 예상치 못한 이미지들이 탄생한다. 반 정도만 가공된 소재를 정돈하고 이를 표면에 부착시키면서 반복과 변형의 과정을 거친다. 한 형태는 또 다른 형태를, 한 색채는 또 다른 색채를 연이어 산출한다. 작품은 무의식이 기록되는 수용기가 된다. 이 방식은 '작품 속에 수많은 메아리를 담는 말없는 그릇이 되기를 원했던'(브르통) 자동기술법을 떠오르게 한다. 나름의 체계를 이루고 있지만 열린 방식을 지향하는 것이다. 물감으로 직접 그리기보다 훨씬 힘들며, 용의주도한 수공적 작업은 예측할 수 없는 선과 형태로 가시화되는데, 그것은 끊임없는 변형의 가능성을 가진다. 이러한 변형은 '결합 불가능한 것을 결합시키고, 단절 불가능한 것을 단절'(브르통)시킨다. 이러한 메카니즘에는 오토마티즘적인 특성이 내포되어 있지만, 그의 작품에서 자동성과 의지 사이의 경계선이 확실하지는 않다. 꼴라주의 방식이 관철되는 그의 작품에서 떠도는 환영은 사실주의적 환영이 아니라, 시각적인optical 환영이다. 그것은 화면의 수수께끼같은 불투과성을 더욱 강조한다. 꼴라주를 통해 잠재된 무의식을 방출시키는 김명진의 방식은 회화의 질료적 동질성을 파괴함으로서, 그가 한 때 부정했던 회화를 다시 규정하고 있다. ■ 이선영

Vol.20090706h | 김명진展 / KIMMYOUNGJIN / 金明辰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