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MPLE

하은미展 / HAEUNMI / 河銀美 / painting   2009_0623 ▶ 2009_0628 / 월요일 휴관

하은미_RUMPLE-the economist_캔버스에 유채_164×150cm_2008

초대일시_2009_0623_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월요일 휴관

봉산문화회관 BONGSAN CULTURAL CENTER 대구시 중구 봉산문화거리 133번지 2층 Tel. +82.53.661.3081~2 www.bongsanart.org

화가 하은미의 작품은 매우 신경질적이고 폭력적이다. 영문 판 잡지나 신문과 같은 종이류를 구겨놓은 듯한 형상이 그녀의 그림 속에 담겨 있다. 관객들이 이 그림 속에 담긴 날카로움을 억압된 정신과 신체의 격정적인 반응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사실이다. '구기거나 헝클어놓다'라는 뜻을 가진 럼플(rumple)은 그녀를 통해 오브제가 새로운 질서로 다시 구성되는 일련의 작업이다. 작가는 종이로 출판된 문화상품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빛바랜 폐지로 소멸해가는 과정에 끼어든다. 그런데 인쇄된 종이들이 갖는 본원적 가치는 복원되지 않고, 오히려 더 훼손됨으로써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다. ● 물론, 새로운 그 의미는 단일체가 아니라 다의적인 의미'들'로 독해될 가능성이 크다.

하은미_RUMPLE-consumer report_플렉시 유리에 유채_95×140cm_2009
하은미_RUMPLE-beaux arts_플렉시 유리에 유채_75×130cm_2009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인류의 역사를 말과 글이 경쟁해 온 장으로 파악한 것과 비슷하게, 하은미의 그림은 매스커뮤니케이션-대량 의사소통-으로서 문자의 권위에 대항하는 예술 작품-소량 의사소통-으로서 회화의 특권을 보여준다. 신문이나 잡지는 대중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매체라는 점에서 그 자체가 폭력적일 수 있다. 대중매체는 지성과 객관성, 경건함, 교양, 공익성과 같은 가치를 내세우더라도 다수의 여론이 남기는 맹점은 종종 무시된다. 예술 체계는 그 맹점을 파고든다. 작가 역시 구겨진 대상을 통해 감성, 주관성, 흥분, 즉흥성, 욕망으로 채워진 대립 항을 설정한다.

하은미_RUMPLE-military_캔버스에 유채_180×179cm_2008

이것은 문자 텍스트의 권위를 파괴한다. ● 관객들은 이 도발적인 미술을 접하면서, 두 개로 나눠진 지각의 층위 중 어느 하나를 택하게 된다. 그림에서 구겨짐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지, 아니면 그 속의 오브제를 먼저 보이는지 둘 중 하나다. 어느 쪽을 먼저 인지하던지 간에 결국 관객은 책이 구겨진 현상 자체에 이르러 훼손된 책이 가진 맥락을 캐묻는다. 그 책의 맥락은 책의 제목과 디자인으로 이루어진 기호(sign)이다. ● 어떤 사물이든 사람이든 그 본성을 제대로 잘 보게끔 하는 것은 새롭거나 완벽하게 미끈한 상태일 때가 아니다. 어느 정도 닳고 익숙해지고 제멋대로인 상태에서 제대로 볼 수 있다.

하은미_RUMPLE-simpson's poster_플렉시 유리에 유채_70×48cm_2008
하은미_RUMPLE-national geographic_캔버스에 유채_182×117cm_2008

그곳에 대상의 진리가 있다. 하은미의 모든 그림에 인용된 매체 오브제는 그것만의 고유한 텍스트(이름, 표지 그림, 주요 기사)와 또 다른 소통을 이루고 있다. 구겨진 그림과 반듯한 텍스트, 이 두 가지는 경쟁적이며, 화해할 수 없다. ● 이 모순적인 시각 정보의 틈은 분명히 회화적이며, 나는 그 이미지를 탐닉한다. 그림을 보는 주체인 나는 나 자신의 무능함을 발견하게 되며, 동시에 화가의 기술을 가늠한다. 예술 비평가 혹은 이론가로서 나는 설령 그림 속 잡지 신문에 글을 쓸 수 있을지언정 화가처럼 붓을 능수능란하게 다루지 못한다. 화가는 텍스트를 우위에 둔 그 종이류를 망가트린다. 이것은 글에 대한 그림의 우위를 원하는 작가의 징후이다. ● 앞으로 하은미의 작업은 여러 주제를 담아낼 유연성이 크다.

하은미_RUMPLE-newsweek_플렉시 유리에 유채_36×30cm_2008

그녀의 그림은 어떤 책이나 잡지를 그려 넣어도 뚜렷한 메시지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조각이나 설치 작업으로 변형될 여지도 크다. 반복은 예술 형식에서 일관성과 효율성을 살리는 방법인데, 하은미의 작업은 조금씩의 변화(음악으로 치자면 변주)만으로 전혀 다른 의미를 이끌어낼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가능성은 상상력과 실천력을 요구한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실재하는 매체를 비난하거나 혹은 칭송했다. 타임이나 헤럴드,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그것이다. 이것이 일종의 상징적인 행위를 넘어서려면, 좀더 구체적인 대상을 오브제로 삼을 필요가 있다. 예컨대 서양미술사를, 월간미술을, 조선일보를, 대학 지도교수의 도록 논문을 구겨 찢을 용기는 없는가? 나는 바란다. 작가의 자세가 더 신경질적이길! 더 폭력적이길! ■ 윤규홍

Vol.20090623a | 하은미展 / HAEUNMI / 河銀美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