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9_0603_수요일_05:3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CHEOUNGJU ART STUDIO 충북 청주시 상당구 용암동 2098번지 Tel. +82.43.200.6135~7 www.cjartstudio.com
留白-틈, 엿보기 ● 그는 늘 틈, 여백, 마진(margin), 변두리에 대한 생각이 많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로서 그가 보여주려는 것도 그 '틈'에 대한 물음이다. 그에게 있어 '틈'이란, 대상과 대상 사이에 벌어진 간격이라든가 관객과의 소통에서 생기는 그런 거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현대미술이 빠르게 변모하는 양상 속에서 놓치고 간 틈들을 좇아 역영(逆泳)하며 구상적 회화에 대한 성찰로부터 오히려 한발을 더 나가고자 하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 ● 이번 전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번 전시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점·선의 해체적 묘사에서 틈틈이 삽입됐던 구상적 회화들이 이번 전시를 통해 주를 이루고 작가가 그 회화성에 더욱 몰입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구상적 회화성에서 작가가 추구하는 영역의 확장으로부터의 틈이란 과거 유화기법에 묻혀 봉인돼 있는 기법을 찾아 현대적인 재료 기법으로 소화해 낸다든지, 또는 과거 시대성(미술양식), 특히 그가 관심 있어 하는 고전주의 기법의 제작과정 중에 묻혀 있는 일련의 과정(흰색으로 명암 modelé하기, glacis 기법 등)을 틈으로서 바라보고 이끌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즉, 전통 회화기법에서 색채에 묻혀버린 밑 작업을 완성의 단계로 끌어낼 때 그 기법에서만 느낄 수 있는 흰색 공간의 힘과 작가의 사상적 기반인 동양적 고요함을 접목하는 것이 이번 작업의 의도이자 풀어야 할 과제이다. ● 바로 작가의 이러한 전통적 회화성에 대한 고집은 현 시대가 요구하는 시대성에 역행하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대 미술의 탈장르적 가로지르기와 철학적 담론들은 현대 작가들에게 노마드적 다양한 예술경험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영역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는 외부로 여행하는 노마디즘이 아닌 작가 내부로의 여행을 즐기는 노마디즘을 선택한다. 사각형의 틀, 일반적 소재와 고전적 기법으로의 천착과 더불어 작가 내면으로의 집요한 탐색이 이 시대에 어떻게 맞물리고, 또한 동시대에 늘어놓을 그의 내면의 방들을 얼마나 깊이 있고 자유롭게 진열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현대미술이 띠고 있는 혼미양상의 탈장르적 예술장치들 - 매체, 상징, 기호, 색채, 철학적 담론 등 - 을 배제시키는 과정에서 마주하는 그 장치들의 유혹으로부터 그는 역행을 지속했고 나름의 담담한 자유를 획득했다고 보며, 독자적인 정신세계를 어떠한 과정으로 풀어냈는지를 이번 전시를 통해서 여실히 보여준다.
명제 이야기 ● 그의 그림에서 이야기는 늘 최소한으로 작용한다. 오로지 행할 뿐이다. 그가 지난 개인전에서 보여준 '행(行)'은 최소단위로의 여행으로, 처음 시작은 예술에 있어서의 필수불가결한 색(色)의 흔적을 지우는 일이었다. 거기서 출발한 선(線)으로의 여행, 그리고 선(線)마저 지우는 일로 들어서서 드디어 점(點)으로 안착, 수 - 억 개의 점의 향연을 누렸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색(色)으로 돌아왔다. ● 분명 그는 색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모노크롬에 다다르는 탈 이미지화된 공간에서 보여주는 건 흰색 바탕에 흰색. 작가에게 있어 이 흰색은 바로 '공간'으로 인식된다. 그러면 이 탈색에 가까운 흰색의 의미는 무엇일까? 제목에서의 흰색[白]은 큰 공간[大空]이라 말하여지고, 이곳에 머무른다[留] 함은 간과되어지기 쉬운 미세 틈으로의 의식과 시각의 이동일 것이다. 예를 들면 텍스트의 자(字)와 자간(字間)의 관계에서 특히 그는 내용보다는 흰색의 행간, 마진(margin)에서 그 의미를 찾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서로 협조되는 이율대대(異律對待)의 관계에서 백색은 있음과 없음의 양극단에 있는 심리적 공간이라고 그는 제시한다. 그래서 제목의 의미를 비어있음에 두고 있고, 미세 여백이 큰 공간임을 작가는 일견하고 백색의 의미를 끌어내온다. 留白, 그 심리적 공간에서 그는 또 시소타기를 한다.
회사후소(繪事後素) ● 이렇듯 동양사상에서 공간의 여백을 중시하듯이 작가는 여백을 잘 그리는, 아니 잘 만드는 일로 시작한다. 그 흰색을 더욱 돋보이게 하려고 밑 작업에 지극한 정성을 쏟은 흔적이 보인다. 캔버스 천의 한 올이라도 감추기 위해, 그려지는 image(흰 나무)보다 밑 작업의 완성도에 더욱 매달린 듯하다. 모든 예술가라면 과정을 모두 중시하겠지만 특히 김사환의 밑 작업은 흰색으로 덮고 또 그 위에 덧칠하고 나서 흰색으로 형태를 구축하는 과정(modelé)에 작가의 모든 에너지를 쏟는 것으로, 이것은 곧 하나의 완성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칠하고 덧칠하기를 10여 차례, 이런 과정을 하나라도 건너뛰기라도 한다면 그 효과는 숨결이 들어가느냐 아니냐의 결정적인 문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작가의 밑 작업에서 보여주는 반복된 과정을 통해 흰색 감추기는 바로 흰색 드러내기의 반복적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 반복적 행위에서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본성의 추구는 즉 보이는 대상과 보는 주체와의 이중적 관계에서 성립되는 행위 이외는 아무 이야기가 없다. 단지 행위만을 고집하고 일종의 예술적 장치로 더 나아가지 않으려는 멈춤의 미학이 엿보인다.
회귀 ● '대상을 보면 대상만 생각하고 대상만 보아야 한다. 그리고 제작과정은 오히려 대상을 떠나고 전일(全一)된 작가의 혼신만 있으면 된다. 대상을 통해 나를 무언가 다른 객관, 예를 들어 나무에 대한 심리적·사회적·예술적 의미를 투영하려 하는 순간 예술은 망가진다. 허위로 된다. 대상만 바라보고 그대로 옮겨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주관, 자신의 해석, 의지를 덧붙인다. 객관은 그렇게 걸어 나온다. 그뿐이다.' (작가 노트 중)_김사환
한 예로, Malévitch가 대상에서 완전히 해방된 화면을 추구해서 결국 '흰 바탕 위의 하얀 사각형'(Carré blanc sur fond blanc)으로 반 대상(non-objectivité)과 절대 감성의 형태와 색을 표현했다면, 작가 김사환이 백색(白色)의 유희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의 흰 캔버스 공간 안에 단지 한 대상만을 배치하고 감정과 이야기를 최소화하여 흰 여백을 그리고 그 속에서 노닐다 머무름 없이 나오는 것이다. ● 흰색이란 모든 색을 수용 가능하게 하면서 또한 모든 흔적을 제거할 수 있는 색이다. 흰색으로부터 탈색되는(소멸되는) 것의 에너지와 그가 선택한 흰색 나무 - 플라타너스는 겨울과 봄이 오기 전에 스스로의 힘에 의해 모든 것을 벗어 흰색 살을 드러내는 특징이 있음 - 를 매개로 에너지의 생성과 소멸을 반복된 제스처를 통해 흰색 감추기와 흰색 드러내기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이 반복적 흰색 드러내기 과정을 통해 고도의 집중된 태도에서만이 얻을 수 있는 동양적 고요함을 작가는 즐기고 있는 것이다. ● 결국, 김사환은 흰색과 흰색 나무에서 느끼는 시각적 자극을 보는 이에 따라 다양한 해석 가능성으로 남겨둔다. 이것은 곧 M. Duchamp의 말로 귀결된다. "작품을 완성하는 것은 바로 관객의 몫이다."_C'est le spectateur qui réalise le tableau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형태와 색으로 돌아온 지금 그가 더 이상 색과 형태의 조형에 스스로 홀리지 않고도 즐겁다는 것이며, 그것은 '예술이 그 아무것도 포함하지 않는다.'라는 예술론에서 나온 지극히 평온한 즐거움과 아름다움이 아닐까 한다. ■ 손명희
Vol.20090605h | 김사환展 / KIMSAWHAN / 金士奐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