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안의 풍경

신현숙展 / SOOK SHIN / 申賢淑 / painting   2009_0604 ▶ 2009_0621

초대일시_2009_0604_목요일_05:00pm

갤러리K 기획초대展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K_gallery K 서울 서초구 서초동 1463-10번지 Tel. +82.2.2055.1410 www.galleryk.org

재불 작가 신현숙의 국내 개인전이 10여년 만에 서초동 갤러리K의 초대로 열린다. 손안에 자연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그녀의 작업은 극사실 회화로 느껴지나 사진을 활용한 표현기법이다. 90년대 초부터 사진과 회화를 접목시킨 표현기법으로 꾸준히 작업 해 온 그녀의 작업들은 사진을 활용하면서도 사진의 특성이 드러나기 보다는 극사실적인 회화로 느껴지도록 표현되었다. "우리안의 풍경"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전시는 회화와 사진의 경계를 허물며 작업해 온 기존의 작품들보다 더 확장된 개념인 설치 형식으로 전시된다. 거대한 둥근 틀 안에는 두 손을 모은 이미지가 나뭇잎이며, 나뭇가지, 하늘, 태양등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그녀가 담으려고 하는 것은 자연이며, 우주이고, 그것들을 담고 있는 손은 다시 자연, 우주의 일부가 된다. 그녀는 이러한 동양적 관념의 인식체계 속에서 우주 안에서의 인간, 인간 안에서의 우주의 본질을 찾아나가고 있는 것이다. ■ 김성희

다중심으로서의 몸의 눈 ● 두 손을 모두어 펼친 손바닥 안에는 물이 고여 있고, 그 안은 얼기설기한 손금들과 함께 반추된 사물들이 담겨있다. 미시적인 손금들과 잔주름은 그다지 깊지 않은 골짝과 야트막한 둔덕을 이루며, 지형이 되고 지세가 된다. 세상 만물 중 못 담을 것이 없을 것 같다. 거대한 대양마저도 담겨져 있으니. 이렇듯이 신현숙의 근작은 소우주로서의 손을 표상하고 있다.

몸의 인식 ● 몸의 인식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어떤 표현 가능성을 발견한 예술가들에 의해 새로운 소재로 다루어지게 된 몸이 그 하나이며, 이성이나 논리 혹은 정신의 인식과는 구별되는 몸의 인식, 즉 인식의 주체로서의 몸이 또 다른 하나이다. 전자가 목적어로서의 몸에 비중을 실은 것이라면, 후자는 주어인 몸을 말한다. 소재로서의 몸의 인식은 이탈리아의 신사실주의 화가 피에르 만조니와 이브 클라인에게로 소급된다. 신체의 일부분을 석고 주형으로 떠내기도 한 마르셀 뒤샹의 작업의 저변을 흐르는, 결정적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붙잡히지 않는 어떤 요소 역시 몸이며 성이며 에로티시즘이다. 몸의 인식 즉 인식의 주체로서의 몸이라는 생각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특히 세계를 인식하고 그 인식한 바를 표현함에 있어서 몸의 인식은 페미니즘의 방법론과 결정적인 연관을 갖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페미니즘의 방법론에서 몸은 정신의 주권을, 감각은 이성의 권위를, 비논리는 논리의 권력을 각각 대체한다. 그러나 몸은 정신으로부터 어떤 부분을 되찾아 오거나 정신의 존재를 거부하는 식으로 자기의 회복을 꾀하지는 않는다. 원래 상태로 되돌려 놓을 무엇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애초에 몸은 하나이지 둘이 아니며, 인식하는 주체로서의 몸은 정신이 대상화시킨 몸과 다른 것이다. 말하자면 몸은 정신과 구별되는 그 무엇이 아니다. ● 신현숙은 한 장의 사진에서 인식하는 주체로서의 몸을 가시화하고 있다. 배꼽의 오목하게 들어간 부위에 손톱 크기만한 거울을 넣고 물을 채운 뒤 거울에 비친 나뭇가지 등속의 영상을 잡은 작품이 그것이다. 여기서 배꼽은 보여지는 대상이, 에로티시즘을 대변하는 신체의 특정 부위가 아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몸의 눈이다. 촉촉하게 젖은 습성(濕性)의 눈동자가 미풍에 EJf고 있는 나뭇가지와 그것에 붙어 있는 잎사귀를 본다. 배꼽은 기가 들고 나는 통로요 단전 이며 몸의 중심이다. ● 여기서 중심은 주체요 시선이며 눈과 동격이다. 중심은 몸의 중심이기 이전에 몸이 갖는 다중심 중 하나이다. 주체와 시선과 눈 역시 몸이 갖는 다주체요 다시선이며 여러 다른 눈들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서 시선이란 촉각시(視) 혹은 촉각지(知)를 말하며, 단순히 시지각 매체를 빌어 자기가 보는 사물을 대상화하는 주체의 방식과는 구별된다. ● 가슴을 찍은 사진에 표현된 유두 역시 심장의 눈이요 몸의 눈이다. 심장은 인격이 신격과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신체의 지표이다. 제사장들이 양 손을 앞으로 모아 배꼽이나 가슴 부위에 대는 것은 다름아닌 배꼽이, 가슴이 신 혹은 신격의 지표이기 때문이다. 그 눈은 때로는 누워서 더러는 선 채로 들국화를, 나비를, 바람을, 녹 쓴 세월의 흔적을, 시간의 지층을 본다. 몸이, 가슴이, 유두가 바람을 본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여기서 본다는 말은 바람의 존재를 느낀다는 것이다. 바람에 움직이는 사물을 보고 바람의 존재를 인식하는 시지각의 방식과는 다르다. 가슴은 생명이 들고 나는 통로요 성소이며 몸의 중심이다 .여기서 중심은 몸의 중심이기 이전에 몸이 갖는 다중심 가운데 하나이다. ● 인식하는 주체로서의 몸은 웅크린 자세로 전면을혹은 뒷면을 보이고 있는 몸을 형상화 한 작업에서도 확인된다. 여기서는 몸 자체가 몸의 눈이다. 이러한 사실은 특히 약간의 엣만 드러난 채 대부분의 얼굴 부위가 어둠 속에 묻혀 있는 작품에 반영된다. 최소한의 단서로만 암시된 얼굴의 실루엣은 보는 동시에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다. 본다는 것은 얼굴의 방향이 전면을 향하고 있다는 말이며, 보지 않는다는 것은 눈을 포함한 얼굴의 대부분이 지워져 있어서 실제로 보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몸을 다룬 다른 작품들에서는 아예 얼굴이 묘사되어 있지 않다. 중심이, 주체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눈은 있다. 웅크리거나 돌아 누운 채 하얗게 드러난 등이, 블라인드 그림자가 만들어 낸 물결 모양의 실루엣이 드리워진 허벅지 혹은 엉덩이가 곧 몸의 눈이다. 몸 안 쪽의 음영이 얼굴을 지우고 있는 어둠이 몸의 눈이다. 여기서 몸은 보여지는 대상으로서의 에로티시즘의 지표가 아니다. 그 자체가 눈이다. 자기 내면을, 혹은 세상을, 사물을 보는. ● 투명 유리판 위에 얼룩 이미지를 만들고 있는 레진과 양철판 위에 덤성덤성 찍혀 있는 깃털과 머리카락의 잔해들로부터 정신과는 다른 몸의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레진이 만든 얼룩이미지는 몸의 인식 중 점도가 있는 어떤 지점을, 양철판 위의 얼룩은 습성으로 대변되는 성향을 지시할 수 있다. 이러한 등식은 인간의 기질 혹은 성향을 우울질이라는. 그 자체로는 추상적인 범주와 함께 점액질과 담즙질 등의 감각적 질료의 형식을 빌어 구분한 전례와 이어진다. 이렇듯이 기질을, 성향을, 정신을 감각적 질료와 동일시하는 태도야 말로 빗물질 회화, 곧 아브직 아트를 이해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등뼈의 긴 선을 따라 돋아난 깃털은 꿈꾸는 몸이다. 한때 머리 혹은 가슴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 하얗게 드러난. 조금은 외로워 보이기도 하는 등이 꿈을 꾸고 있다. 깃털의 잔해가 그 꿈이 달콤한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혹은 머리카락의 잔해가 머리의, 정신의 주검을 대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미 몸의 꿈 역시 찢겨진 것임을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 이러한 몸의 인식은 시선과 응시를 구분한 샤르트르가 그 단서를 제공한 바 있다. 몸의 인식이랄 수 있는 감각적인 느낌을 시지각의 인상과 동격으로 본 촉각지는 현상학의 성과이다. 응시란 시선에 의해 대상화된, 물화된 객체의 눈을 말한다. 시선은 공격을, 응시는 방어를 그 본질로 한다. 응시는 시선의 공격을 의식하며, 그 공격에 스스로가 노출되어져 있음을 느낀다(본다).응시는 원래 음울한 어둡고 우울한 습성의)시선의 욕망을 즐기며 느리게 늘어지거나 불쾌감으로 움츠려들거나 머뭇거리며 불안해하거나 파르르 떠는 몸의 눈이다. 시선의 공격에 대한 응시의 반응은 시선의 욕망과 일치되는 소극적인 것이거나, 죄책감과 자책과 부끄러움으로 시선을 책망하는 적극적인 것이거나 한다. 응시의 적극적인 방어는 신디셔먼의 일부 작품에서도 확인된다. 일부러 스스로를 더럽힌(사실은 더럽지 않은)몸이 시선의 욕망을 거부하며 단절시키며 구토를 일으키게 한다. 여기서 전면을 향해 벌려진 엉덩이가, 음부가 다름 아닌 시선을 정면에서 쏘아 보는 몸의 눈, 곧 응시이다. 이즈음에서 원래 공격적이었던 시선과 그 공격에 대한 방어를 뜻했던 응시의 위치가 뒤집어진다. 즉 응시란 시선의 공격을 즐길 때나 혹은 책망이나 구토로 시선의 욕망에 반응할 때 사실은 방어가 아닌 공격의 위치에 있게 된다. 궁극적으로 공격의 주체인 것은 시선이 아닌 응시인 것이다.

손바닥 안의 우주 ● 신화에서 신은 천 개의, 만 개의, 천만 개의 눈을 가졌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신은 천 개의, 만 개의, 천만 개의 가슴을 가졌다고도 한다. 마찬가지로 천 개의, 만 개의 천만 개의 손을 가졌다고도 한다. 현상학에서 말하는 우주의 살, 곧 우주의 몸이란 무슨 말인가, 감각적 느낌이 시지각적 인상과 동격이 되는 촉각지 혹은 촉각시란 무엇인가. 이 모두가 사실은 몸의 눈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몸은 그 자체로 욕망의 대상이자 주체이며, 눈과 가슴과 손은 작게는 몸이 부리는 욕망의 도구요 부분이며, 크게는 그 자체가 욕망의 주체이자 전체인 몸이기도 하다. 특히 우주를 관념이 아닌 감각의 산물로 보는, 느끼는 것을 보는 것과 동일시함으로써 마침내 인식 혹은 각정에 이른다는 현상학적 태도는 몸이 자연 혹은 소우주로 보는 동양의 관념 없이는 생각되어질 수 없는 부분이다. ●손바닥 안에 나뭇가지가, 하늘이, 대양이, 자연이, 우주가 담겨져 있다. 손이 나뭇가지를, 하늘을, 대양을, 자연을, 우주를 본다. 손은 몸의 또 하나의 눈이며 중심이다. 몸의 중심은 배꼽이며, 가슴이며, 등이며, 손이다. 몸의 모든 중심은 동시에 몸의 눈이기도 한다. 눈은 또 다른 몸인 자연에도 있다. 비가 온 뒤 대지의 음푹 패인 부위에 고여 있는 물웅덩이가 그것이다. 땅의 눈은 인간의 시선과는 다른 방식으로, 다른 시점과 각도에서 세상을 본다. 그 시지각 방식은 바람과 빛을 비롯한 외부로부터 유래하는 일체의 가능한 영향에 대해 열려져 있다. 바람의 행태와 빛의 습성에 수긍하는 그 눈은 세상을 결정화된 어떤 것으로 보는 대신 변화무쌍한, 항상적인 변화 속에 있는 비결정화된 어떤 것으로 본다. ● 신현숙의 근작은 캔버스 천을 인화지로 사용하는 식의 직접화법을 취하거나, 사진 석판이라는 매개를 거치는 간접화법을 취한다. 이때 사진 석판 기법을 이용해 화선지에 찍어낸 이미지를 화선지를 뭉쳐 적절한 질감 효과를 만든 캔버스 표면에 붙인다. 그리고 그 위에 아크릴이나 먹으로 가필을 함으로써 최종적으로 마무리 하는 식의 과정을 거친다. 이 때 캔버스 표면에 화선지를 붙이는 이유는 적당한 질감 효과를 얻기 위함과 수성 안료가 잘 스며들게 하려는 두 가지 목적에서이다. 석판화와 화선지 특유의 질감, 그리고 수성 안료의 가필이 사진 이미지가 지나치게 기계적으로 흐르는 것을 방지하고 조율함으로써 작품의 최종적인 표정이 회화적인 효과의 산물로 읽혀지게 한다. 작업에서 사진 이미지는 거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고 있다. 아마도 정신의 인식과는 구별되는 몸의 인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어떤 정치한 묘사와 사물에 대한 감각적인 접근을 위해 요구되었을 것이다. 화면 속의 이미지가 외관상 둘이면서 의미론적으로 하나가 되는 구성방식이 특징이다. 일체와 다중심의 감각을 근간으로 하는 몸의 인식으로 나눔과 중심의 논리를 본질로 하는 정신의 인식을 넘어서고 있다. ■ 고충환

Vol.20090604f | 신현숙展 / SOOK SHIN / 申賢淑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