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김영화 블로그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9_0612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2:00pm~08:00pm
수운회관 1307호 서울 종로구 경운동 88번지 Tel. +82.2.733.7807 www.chondogyo.or.kr
자본, 영혼을 갈취하는. 민중미술의 오리지널과 포스트 사이에서 ■ 이번 작업에서 돈의 논리로 재편된 삶의 조건에 대한 김영화의 관심과 발언은 계속되고 있다. '있는 자'와 '없는 자'의 대립 속에서 돈의 논리는 계층을 구획하고 삶을 황폐화시킨다. 자본에 대한 김영화의 진단은 모호하지 않다. 자본이 역동하는 사각지대에서 자본은 자기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예술적 실천에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작가 자신이 누구보다 통절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주목할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구체화하는 개념적, 미학적 방법론이다. 김영화는 이를 '신경미학'으로 특정한다. 일반적으로 신경미학이란, 표현과 감각 경험의 상관을 다루면서 최근 들어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영역이다. 김영화가 끌어온 신경미학이란, 감각을 통해 세계가 자신을 탐침하는 방법이면서 그가 화면을 구성하는 방법이며, 그가 세계를 '방법하는' 방법이다. 그에게 신경이란 생리적 감각이나 뇌의 작용일 뿐만 아니라 작가로서 자신의 가장 예리한 감수성에 관한 것이다. 그는 신경감각을 그림의 표면이 유발하는 착시효과로만 한정하지 않는다. 몸의 감각을 거쳐 산출되는 감성을 사회적 존재로서 세계와 만나는 '벌거벗은 공간'에 던져 놓는다. 그렇게 노출된 곳에서 감지되는 벌건 역설, 그것이 바로 자본의 본능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사건을 중첩시키는 것은 그 사건들이 일본 화폐로 상징되는 국제 정치경제 논리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금융자본은 한국사회라는 제한된 영역을 넘어선 초국가적인 지대에서 글로벌하게 연동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체현되는 모순과 폭력은 이러한 자본의 세계적 확장을 관철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역사적 단편이라는 것이다. 그가 역사의 현재와 과거를 조합하는 공간은 무의식으로 출몰하는 괴수처럼 감각신경의 상상적 지평에 적극 투입된다.
회화를 실천하는 작가로서 김영화에게 신경으로서의 망막의 반응은 가장 기본적인 것일 수 있지만, 시신경 체계는 '뇌수의 분비물'이라는 사유와 갈라낼 수 없을만큼 혼융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김영화가 이번 전시를 [것 수트라]로 호명하고 있다는 건 의미심장한 일이다. 것(gut)은 창자나 내장을 가리키며 내장은 예민하게 감수하는 감각 신경망으로 짜여진다. 수트라(Sūtra)는 깨달은 자의 가르침을 엮은 경전이다. 그렇다면, '것 수트라'는 신체라는 물질과 비물질로서의 정신이 혼재하는 비상(非常)한 체계를 가리키는 비비상(非非常)한 전략이란 말인가? 흥미로운 일은, 김영화가 '것'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존재'인 영혼으로 반전을 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혼의 경전, 것 수트라. 그는 이를 '사육(사육)'으로 변증한다. 불콰하게 뒤얽힌 선들은 살의 이미지를 에두르며, 역사적 사건의 결속을 화폐로서 들이밀었던 바로 그 방식으로 육신의 극밀한 신경망의 광장에 상상적 자본의 대표 형식인 숫자로 발정한 기호를 깊이 새겨 넣는다. 그의 작업이 근본적으로 사회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면 작가가 걸러낸 것은 지금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을 관리하는 강력한 사회 시스템인 '자본주의'다. 그래서, 사육(飼育)이다. 그러나, 사육(謝肉)이다.
비평적 관점에서 민중미술의 오리지널과 포스트 사이에서 김영화가 보여주는 미학적 가능성이 어떻게 확산될 것인가를 예측하기란 쉽지 않다. 자본에 대한 고발과 저항을 이미지로 변환하는 과정이 현실적 효력을 발휘하기에는, 작가는 너무 작고 자본력은 너무 크다. 그토록 자본은 '사회생활' 전체를 거머쥔 거대한 체제다. 돈 앞에 장사 없다. 자본에 대항하기 보다는 적당히 타협하는 생을 추구하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을까? 나에게조차 돈은 그렇게 가혹하게 삶을 침탈하는 잔혹한 실체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는 이 점에 관해서만큼은 물러서지 않는다. 자본력의 현재적 작동에 대한 문제의식은 오리지널의 그 어느 선배들보다 극명하다. 회화적 저항을 지속시키는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는 이 태도는 김영화론을 서술해 나가는 과정에서 분명하게 체감된다. 무지막지한 자본의 존재만큼 그에 대한 체제 저항 역시 확연하지만 그것이 그 무슨 사회주의 혁명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미술 실천은 회화의 협소한 영역에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의 작업에 인접하는 다양한 시민개혁활동에 관심을 보내고 있으며 이른바 '지역화폐운동'은 그에게 매우 중대한 사회적 대안으로 보인다. 이처럼 김영화의 미학적 실천이 자본주의의 폭정에 맞서는 또 다른 시도들과 결합할 때 일정한 사회적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근거는 없다. 반체제미술이 세상을 바꾸리라는 확신은 순진한 꿈에 불과했지만, 거대한 변환, 사회는 다시 또 다시 '거대한 변환'을 모색하고 있다. 김영화는 그렇게 '인간이라는 직업'을 가진 인간을 위한 사회의 '가능성들'을 위하여, 민중미술의 오리지널과 포스트 사이에서 개인과 집단 사이에서 사회와 역사의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나아갈 길을 찾고 있으며, 그가 탐색하는 길은 미술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비평적인 관점에서도 탐구할만한 시도가 될 것이다. 되어야 할 것이다. 잃을 것이라고는 불가능성밖에 없지 않은가. ■ 김동일
자신을 여전히 민중미술가로 호명한다면, 어떤 느낌? 무어라 부르건 상관없다. 나는 이승에서 김영화일 뿐. 무언가 피가 끓는 거 하고 싶어서 하는 게 그렇게 불릴 뿐이다. 지난 10여 년 동안 근황은? 오랫동안 도심에서 살다 작년에 용인으로 작업실을 옮겼는데 변화는? 내게 지난 10여 년은 하얀 기억이다. 10년만 되돌려 준다면 지구를 들 것 같다. 한동안 시골에서 문 걸어 잠그고 목숨을 연명했던 사람이다. 도시에서는 정신 사나워 못산다. 화면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이 좀 무섭다. 무슨 이유라도? 악몽을 자주 꾸나? 내 그림을 무섭다고들 한다. 가까운 사람들은 그림을 줘도 싫단다. 살아있는 게 악몽 아닌가? 그거 좋게 해보려고 위빠사나 명상을 했다. 도로나무아미타불. 돈이 싫은가? 그림으로 돈을 버는 건 어떤가? 그림으로 돈을 번다면 어디다 어떻게 쓸건가? 돈? 좋다. 너무 좋다. 이 판떼기에서 돈은 하느님이다. 양아치 하느님. 내가 돈을 번다면 그나마 벌었다면 그림으로다. 앞으로 돈을 번다면, 우선 생존 그리고 가난한 여행. 몽골에 가고 싶다. 말 타러. 지역화폐운동? 이 무신 뚱딴지 같은 소린가? 뚱딴지 아니고, 알고 보면 이거야말로 국가자본의 횡포에서 벗어나는 힘센 시민운동이다.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그들은 실패했다. 국가압력으로, 내부 분열로. 내게 아직 명확한 답은 없다. 몸으로 움직이기 전에는. 지역화폐운동으로, 자본의 현재적 모순으로부터 도망갈 수 있다고 보는가? 자본의 가장 추잡한 속성인 무한경쟁, 양육강식 등을 어떻게 손보게 되지 않을까? 턱끝으로 부리는 노동이 아니고, 나만이 할 수 있는 노동이 살림밑천이 되고, 뭐 그런 율도국스러운... 당장 전면적인 실현은 어렵고, 한걸음씩 땅을 넓혀 나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 글쎄, 지역화폐운동은 이념이라기 보다는 좀 가벼워 보인다. 그저 몇 사람들이 잘난척하는 수작 아닌가? 인정한다. 잘난척 있다. 많은 진보운동들이 그렇듯 주둥이로만 떠들어대는. 그러나 어떻게든 이 시대를 살아내야만 할 것 아닌가? 이쯤에서 지역화폐운동은 내게 가장 크게 보인다. 이번 전시 '것 수트라'는 「오감도 횡령건」의 첫째판이라 명명했다. 전체 기획을 좀 쉽게 설명한다면? 사실 제목에 다 들어있다. 김영화는 세계를 이렇게 본다. 근데 횡령은 또 뭐야? 여시아문,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라 하지 않고, '붓다가 말한 것을 나는 이렇게 들었다' 이건데, 있는 그대로 본다는 위빠사나다. 그런데 과연 인간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까? 아니다. 현미경을 통해서 볼까? 아닌 거 같다. 현미경이 보는 게 아닐까? ""현대는 시뮬라크르 시대다."라는 이 말에 피눈물 난다. 그렇게 보는 나를 보는. 횡령이다. 복잡한가? 복잡하다. 인간이니까. 두 번째 기획인 광기의 경전, '갈보집에서' 역시 기대된다. 살포시. 의도와 내용을 공개한다면? 갈보집에서? 오금이 저리도록 훌륭한 제목 아닌가? 윈도우를 어디다 들이대느냐가 관건인데, 이를테면, 작가들은 다 갈보다. 이럴 수도 있고, 또… 모판이 될 '발코니'는 맨바닥 삶을 살아낸 사생아 장 주네의 가장 형이상학적인 작품이라 한다. 거울, 정신분열, 혁명, 게다가 제3의 눈까지, 총출동한다. 오감도와 엇비슷하다. 나는 이것을 통째로 횡령해야 하는데, 천하의 불여우 벨라스케스가 어른거린다. 근데, 뭔 살포시? 평론가들은 다 갈보닷! 이럴 수도 있다는 걸 잊지마시라. 하긴 내가 그런다고 뭐. 화폐, 자본에 대한 문제의식은 매우 현실적인데 반해, 주제는 의외로 관념적으로 보인다. 이유는? 이런 예술질, 그러니까 딴따라질은 문지방에서 저지르는 관념질이다. 허공에다 대고 주먹질. 내가 갤러리 안팎에서 뭔 지랄을 해도 현실은 요지부동이다. 그게 문제라니까 그게. 불교의 영향이 눈에 뜨인다. 운동의 차원에서 삶의 모순을 치열한 투쟁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와 억겁의 영원 속에서 삶을 사소한 일로 해소하려는 불교적 세계관 사이에 갈등은 없었나? 종교가 아니라 종교성을. 이른바 저항은 억겁에서 찰나를 오지게 사는 방법이다. 개인적으론 '0 won'에서 보여진 기괴한 형상의 출처가 궁금하다. 이미지의 내용은? 어디서, 어떻게 마주친 형상인지? 특별한 에피소드라도? 천기누설 하겠다. You're a man, I'm a God, This is a tragedy, Dionysus in 69. 그 연극에 나오는 한 컷. 83년쯤엔가 그린건데 얼굴이 누굴 닮았다. 그걸 다시 손봤다. 요즘 하도 피곤해서 박카스를 마신다. 근데, 디오니소스가 바로 박카스신 아닌가? 그래서? 그렇다는 거다. 어떤 그림에는 제목이 없고, 또 제목만 있는 그림이 있다. 이 무슨 황당한 시츄에이션인가? 의도는? 거울뉴런. 세상이 황당무지로소이다. 의도? 산소는 언제 발견되었을까? 다시 지역화폐 문제로 돌아가 보자. 지역화폐운동의 큰 줄기를 요약해 달라. 그리고 그 줄기 속에서 당신의 그림이 위치하는 지점은 어디인가? 기존의 지역화폐 개념을 뒤집었다. 그들의 지역화폐. 747로는 그들만의 747을, CO2로는 탄소배출권을, 참고로 나는 이 탄소배출권으로 드러난 글로벌 녹색사업을 글러먹을 사기라 본다. 엘 고어가 '불편한 진실'로 누구의 입장을 대변했을까? FRB, 미국은 국민 세금을 담보로 이 FRB(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대출을 받아 달러를 발행한다. 그러나 우리가 쓰고 있는 돈도 사채다. 돌고 돌아 돈이라는 그 돈은 돌고 돌면서 엄청난 이윤을 특정 집단이 독점한다. 그러나 지역통화는 오래 갖고 있을수록 손해다. 벌금이 붙는다. 이자가 아니라. 상상불허 대공황도래운운하는 이 잘난 시대에, 이게 다 돈 때문이야! 삶이 꼭 그러지는 않을지라도 이게 다 돈 때문이야… 아닌가? 아닌가? ■ 김동일이 질문하고 김영화가 대답한 이메일 인터뷰
Vol.20090604d | 김영화展 / KIMYOUNGHWA / 金英花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