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duction of the Material Ghost

남대웅展 / NAMDAEWOONG / 南大雄 / painting   2009_0603 ▶ 2009_0621 / 월, 화요일 예약오픈

남대웅_Hugo_캔버스에 유채_145.5×89.4cm_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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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9_0603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수~일요일_11:00am~06:00pm / 월, 화요일 예약오픈

옆집갤러리_NEXT DOOR Gallery 서울 종로구 창성동 122-8번지 Tel. +82.2.730.2560 www.nextdoorgallery.co.kr

남대웅은 유령을 그린다. 일상에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특정한 도구의 도움을 받으면 보이는 사람들의 흔적을 그린다. 언뜻 보면 유명한 남자 배우들을 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남자들이 영화에서 맡은 배역을 그리는 것이다. 그러니 캔버스 속에 그려진 인물들은 세상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의 오로지 영화 속에서만 존재한다. 남대웅이 그린 대상들은 그 배우들이 맡은 수많은 역할 중에 어느 한 역할, 극 중에서만 살아있는- 그것도 스크린 속에서만-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그런 남자를 그린 것이다. 그런 만큼 비록 그 배우 본래의 이미지가 따라다니더라도, 배우는 기껏해야 그림의 대상이 된 극중인물의 껍데기에 불과할 뿐이다.

남대웅_Leslie_캔버스에 유채_145.5×112cm_2009
남대웅_Mickey_캔버스에 유채_145.5×112cm_2009

장국영을 그린 것은 아니고, 그가 주연을 했던 영화「영웅본색」의 키트를 그린 것이고, 「프리실라의 모험, 사막의 여왕 (Adventures of Priscilla, Queen of the Desert)」이라는 영화에서 휴고 위고 (Hugo Weaving)이 연기한 틱/밋지 (Tick/ Mitzi)와 테렌스 스탬프 (Terrence Stamp)가 연기한 버르나데트 (Bernadette), 가이 피얼스 (Guy Pearce)가 연기한 아담/펠리치아 (Adam/ Felicia)를,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황야의 무법자 (A Fistful of Dollars)」에서 연기했던 조 (Joe), 미키 루크 (Mickey Rourke)가 「할리와 말보로맨 (Harley Davidson and the Marlboro Man)」에서 연기했던 할리 데이비슨 (Harley Davidson),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Leonardo DiCaprio)가 「로미오와 줄리엣(Romeo and Juliet)」에서 연기했던 로미오 (Romeo), 톰 크루즈 (Tom Cruise)가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Interview with the Vampire)」에서 연기한 레스타트 드 라이온코트 (Lestat de Lioncourt)를 그린 것이다. 물론 캔버스 위에 재현된 대다수의 인물들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스타 배우이지만, '사실'은 그 배우들이 아닌 것이다. 작가가 그 배우들이 연기한 수많은 작품 중에서, 또 한 영화 안에서 지나가는 수많은 장면 중에서 유독 그 작품 속에서 바로 이 장면을 분절해서 다시 화폭 속으로 옮긴 것은 그 배우들이 가지고 있는 특정한 아이콘적인 이미지 때문이 아니라, 그 이미지 자체가 이미 작품의 오브제가 되어버리는 인덱스적인 속성 때문이다. ● 기계인 카메라의 힘으로 찍히는 사람은 가감이 없이 있는 그대로 카메라가 찍은 대로 스크린이나 텔레비전, 컴퓨터 모니터 등에서 찍은 그 상태로 재현된다. 찍힐 때는 사람이 카메라 앞에 존재하지만, 찍힌 후에는 그 사람이 없어도 찍힌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 이미지로 나타난다. 단지 이미지뿐이지만 실제 찍힌 사람과 같은 사람이 모니터나 스크린 속에서 찍힌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촬영 현장에 없었던 사람들의 눈에는 마치 그 이미지 자체가 실제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이 보인다. 그 이미지를 보고 있는 사람은 그 이미지를 이미지로 대하기보다는 산 사람처럼 대하게 되고, 그 이미지에 대해서 심리적으로 정서적으로 반응한다. 물론 그 이미지가 이미지뿐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정서적으로는 그 이미지를 실제로 찍힌 사람과 동일시하게 된다. 즉 그 이미지가 실제로는 전기 그림자나 빛의 흔적에 불과하지만, 그 이미지를 실제 그 찍힌 사람과 겹쳐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찍힌 사람을 모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친숙한 이미지가 도리어 실체로 여겨지고, 찍힌 사람 자체는 이미지의 껍데기나 들러리로 간주되는 전도가 발생한다. 이런 상태가 극단화된 무비 스타의 경우에는, 이미지 그 자체가 완벽하게 실제 그 사람 자체로부터 독립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이미지에 기생하는 흔적이 되어 사라져버리는 역전이 일어나는 것이다. 빛의 흔적이라는 이미지의 실제 내용 (index)은 은폐되고 그 이미지가 표상하는 인간으로서 무비 스타 (icon)만 전면에 떠돌아 다니는 것이다. ● 앤디 워홀이 이런 아이콘의 특성을 간파해서 당대 대중 스타들의 표상을 기가 막히게 재현해 내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마오나 레닌처럼 미국인들이 저주해 마지않던 안티 아이콘까지 그림이나 판화로 새로운 이미지를 더없이 쿨하게 재생해 내었다. 심지어 일반인까지 이런 아이콘처럼 초상화를 제작하여, 적어도 그 초상화 속에서 일반인이 잠시 아이콘이 되게 만들어 주는 환상을 심어줘서 떼돈을 벌기까지 했던 것이다. 실제 그 모델을 압도하는 이런 초상화는 '뽀샾'으로 이미지를 성형하는 수준과는 차원이 다른 아우라를 뿜어낸다. 소위 원판보다 복사판이 더 빛이나 복사판이 원판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시뮬라크라라는 '대세'를 일찍이 갈파하여 워홀은 스스로 자신을 자기가 살던 시대의 아이콘으로 만들어 그 아이콘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이콘의 본성답게 워홀은 스스로 '살아있는 귀신'으로 살았고, 그 귀신의 자리에서 귀신들을 그렸으며, 죽는 순간까지 귀신도 모르게 귀신처럼 죽었다. 그의 죽음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담낭 수술을 받을 때도 가발을 벗지 않았고, 죽는 순간에도 간호사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원인 모를 심장마비로 가발을 쓴 채 아무도 없는 병실에서 임종을 맞았던 것이다.

남대웅_Keanu_캔버스에 유채_74×74cm_2009

워홀에 비해서 남대웅은 지극히 평범한 30대 중반의 한국 남자의 자리에서 영화 속의 인물을 그렸다. 왜소하고 평범한 동양남자의 '시시한' 외모에 대한 열등감에 찌들어, 훤칠하고 미남의 전형으로 받아들였던 영화 속의 주인공을 동경하면서 자랐다. 뿌리 깊은 열등감 속에서 영화를 보면서 스타들의 용모에서 발견되는 특정 이미지 속에 스스로를 밀어 넣으면서 이상화된 자신의 모습을 이중화시켜 나갔다. 본래의 자기 모습을 특정 배우의 이미지 속에서 발견하고, 그 이상화된 이미지 속에서 화가 자신의 모습을 작품의 대상으로 발전시켜 이상화시켰던 배우의 코, 수염, 턱, 눈매 등을 그려나갔다. 처음에는 그 부위만을 강조하여 그 부위와 그 주변만을 특징적으로 그려나가다가 점차 얼굴 전체와 몸 전체로까지 확대해 나갔다. 그리고는 마침내 얼굴만 철저하게 클로즈업하여 안면 전체의 표면적 요소를 풍경화시켜 어느 특정 부위뿐만 아니라 그 인물이 풍겨내는 분위기까지 '카리스마'적으로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자기 자신의 이미지와 배우의 특정 이미지를 동일시하여 겹쳐 놓았다가 작업 과정에서 다시 그 겹쳐진 이미지를 분리시켜 배우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타자화시켜 나가면서, 자신을 그 배우의 이미지처럼 그려나간 것이다. 그래서 작가의 이미지와 해당 배우의 이미지가 포개지고 분리되고 다시 포개지는 과정 속에서 원래 상이했던 두 계열의 이미지가 마치 서로가 서로를 끌어 당기고 끌리면서 블랙홀에 빠져드는 것과 같은 공명만 울리는 것이다.

남대웅_Leo_캔버스에 유채_145.5×112cm_2009
남대웅_Tom_캔버스에 유채_74×74cm_2009

캔버스 속에 있는 배우, 특히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로미오와 톰 크루즈가 분한 라이온코트의 얼굴을 재현한 그림이 보는 사람을 홀리는 마력을 뿜어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가가 그려 넣은 마주 보는 이중적 이미지 사이에서 발생하는 특이한 잉여성이 그림을 찬찬히 보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고 들뜨게 만드는 것이다. 그 동요가 너무나 사소하고 은밀해서, 파문이 일어나는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이성적으로 돌아보면서도 그것을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정도의 마음의 동요에 불과한 것처럼 느낀다. 그런데, 이렇게 사소하게 마음이 흔들리게 되면 될수록 칙칙하게 보이는 캔버스 속의 색채가 점차 밝게 환해지면서 별다른 이유도 없이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가벼워진다. 들뜨게 되는 것인데, 왜 들뜨는지 단번 알 수 없으니까 돌이켜 보면 마치 귀신에 홀린 기분마저 드는 것이다. 작가의 상상이 만들어 낸 가상이 다시 가상을 만들어 내고, 그 만들어진 가상이 가상으로 캔버스에 재현되면서 우리는 가상을 가상으로서 '실감' 있게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 내가 남대웅이 창출한 가상 속 남자들 이미지 앞에서 겪은 구체적 경험은 유혹을 당하는 것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동성애자가 아닌 남자인 내가 남자의 이미지에 의해 유혹 따위를 느낄 리가 만무하다. 다시 말하자면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 전시된 그림으로부터 어떠한 성적인 뉘앙스를 느낄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나를 은밀하게 꼬시는 것 같은 느낌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원래 미남에 대한 기준이 남자와 여자가 대체로 다른데, 영화 속의 남자 배우들은 여자들의 아이콘이지 남자들의 아이콘은 아닌 경우가 태반이다. 즉 남자들이 동경하는 남자 배우가 있다면 대부분은 그 남성 배우와 자신을 직접적으로 동일시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이라서 여자들이 동경하는 남자 배우와 다른 경우가 많다. 동성애자가 아닐 바에야 남자에게서 성적인 매력을 느낄 리가 없으므로, 결국 작품 속 인물들이 뿜어 내는 매력은 남자들 자기들이 여자라면 매력을 느낄, 그러한 남자의 매력을 투사한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남대웅이 열망해 왔던 그 무비 스타들이 남대웅에게 어필하는 까닭은 작가 자신이 그런 남자 배우와 동일시되면, 그 배우를 섹시하다고 생각하는 대부분 여성들이 자기들도 배우처럼 좋아해 줄 것이라고 하는, 남자의 관점에서 구성된 여자들이 느끼는 남자의 매력인 것이다. 남자인 작가가 여자의 입장에서 구성한 남자의 환상을 작품 대상으로 선정된 배우에게 투사시켜서 나름대로 그들의 초상을 그려낸 것이다. 그러니 그 남자들에게서 어떤 성적인 매력이 흘러나올 리가 없는 것이다. 그냥 남자가 보는 쿨한 남자의 초상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남자인 나도 그 덩그런 그림 앞에서면 뭔가 홀리는 기운을 느끼는 것이다.

남대웅_Clint_캔버스에 유채_145.5×112cm_2009

스스로가 창출한 환상적인 나르시스트적인 이중 주체화 과정 속에서 나르시스트가 되어버린 작가에게 드러난 남자의 초상은 일반적 의미에서 볼 때 연상되는 나르시스트적인 이미지와는 자못 다를 수 밖에 없다. 오히려 상처투성이, 피투성이, 만신창이가 된 남자들의 고독한 모습이나 천진난만하게 청춘 그 자체를 위해 순교해 버린 성자 같은 남자, 심지어 여자가 되어서라도 그 감각을 맛보려고 하는 여장 남자의 모습이 캔버스를 채우고 있다. 그런 칙칙한 듯 보이는 남자들이 쿨하게 보일 뿐만 아니라 알 수 없는 힘으로 보는 사람을 홀린다. 유혹하는 것이다. 대놓고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유혹인지 아닌지 은밀하고 부드럽게 보는 사람을 빨아들이는 것이다. 의식이 유혹에 반응한다기보다는 무의식이 나도 모르게 반응하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감응이고 공명이다. 유혹을 유혹으로 인지하기 전에 몸이 알아서 먼저 반응하는 것이다. 유혹이 유혹으로 작동하려면 유혹의 주체가 유혹의 객체와 분리되어 하나가 당기고 하나가 밀려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유혹하듯이 스스로 유혹당하는 것이다. 그것은 유혹 자체가 욕망이 작동하는 방식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욕망이라는 게 프로이디언들 주장처럼 주체의 결여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를 구성하는 능력인 것이다. 그러니까 욕망은 개인이나 주체가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나 자아가 욕망의 내재적 과정 속에 있으며, 그 과정 안에서 매번 상황에 따라 욕망이 특정한 형상을 갖는다. 결국 유혹도 그러한 욕망의 형상과 결부된 어떤 양태의 이름에 불과하다. ● 따라서 남대웅이 모니터 속에 들어 있는 유령 따위를 그린 것은 결국 유혹이라는 이름의 욕망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찬찬히 보고 있으려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뒤흔들리고 들뜨게 되는 것이다. 유혹에 빠지는 게 왜 안 되는 것인지, 욕망에 몸을 맡기면 뭐가 대수인지 의문이 들기도 하고 심지어 당연하게 유혹이나 욕망을 막으려는 관습과 제도에 대하여 탈선하고 탈주하고 싶은 충동이 몽글몽글 피어나는 것이다. 욕망이라는 것이 결여에서 일어나는 부정적인 힘이라기보다는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충동이나 생산하는 능력처럼 보이는 것이다. ● 남자 배우의 이미지를 매개로 욕망을 개념적으로 포획한 그 그림이 불러일으키는 유혹은 단순히 내가 외롭고 보잘 것이 없는 중늙은이기 때문이 아니라 욕망을 부정적인 금지 규범으로 만든 제도와 사회에 대하여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욕망이 개인적 심리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개인이나 주체가 욕망을 갖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주체나 자아가 욕망의 내재적 과정 속에 고정된 어떠한 본성이 없는 형식화되지 않는 질료적 흐름처럼 있는 것이 아닐까. 그 과정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사물과 맺어가는 관계에 따라 접속되어 새로운 외부를 포섭하여 다른 본성을 가진 욕망이 그때 그때 생겨 난다. 유혹은 그러한 욕망의 특정한 형상에 결부된 어떤 양태의 이름에 불과하다. 남대웅이 그려 낸 영화 속의 남자들은 이러한 유혹의 형상을 한 욕망 그 자체였던 것이다. ■ 신지웅

Vol.20090603f | 남대웅展 / NAMDAEWOONG / 南大雄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