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결과 질감을 드러낸 조각

김정미展 / KIMJUNGMI / 金正美 / sculpture   2009_0603 ▶ 2009_0609

김정미_사과 apple_대리석_30×30×29cm, 28×28×34cm, 28×28×23cm_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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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9_0603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주말, 공휴일 10:30am~06:00pm

갤러리 라메르_GALLERY LAMER 서울 종로구 인사동 194번지 홍익빌딩 1층 Tel. +82.2.730.5454 www.gallerylamer.com

김정미의 조각-자연의 결과 질감을 드러낸 조각 ● 김정미의 근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전작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전작과 근작이 유기적으로 연속돼 있기 때문이다. 전작에서는 주제의식이 크게 조각의 본질에 대한 관심과 자연의 본성에 대한 관심으로 구분돼 있는데, 근작에서는 이 두 지층이 하나로 통합된 인상을 준다. 물론 인간의 실존적이고 존재론적인 조건에 대한 관심과 상황인식에서 비롯된, 다른 경향성의 작업들도 있다. 하지만 이 작업들은 이후 작가의 작업이 보여주는 일관성과는 다소 그 맥락이 동떨어져 보이며, 초창기의 작업인 만큼 진지한 주제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습작기나 통과의례 정도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김정미_사과 lll apple lll_대리석_35×74×26cm, 30.5×68×13.5cm_2009

작가의 작업은 이렇듯 조각의 본질과 자연의 본성을 경유해서 근작에서 마침내 하나로 통합되고 있다. 그 과정이 마치 정립과 반립을 거쳐 변증법적 합일에 이르는 사유와 사상의 전개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외관상 조각의 본질과 자연의 본성은 서로 다른 전망에 속해 있다. 조각의 본질은 모더니즘 서사에 그 기반을 두고 있으며, 자연의 본성은 자연주의(사실적인)의 전망에 내포돼 있는 것이다. 작가의 근작은 이처럼 서로 다른 전망의 두 경향이 통합 제시됨으로써 특유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니까 가장 조각적인 형식에다 자연의 본성을 담아내고, 그 과정에서 조각과 자연은 그 경계를 허물고 서로 삼투되고 있는 것이다. ● 따라서 작가의 전작을 분석함으로써 근작의 이해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조각의 본질로 예시된 「상자」와 「자리」 연작, 그리고 자연의 본성으로서 예시된 「자두」에서 엿보이는 경향과 태도는 다만 그 형태와 소재가 바뀌었을 뿐 그대로 근작의 한 부분으로 용해돼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외가 없지는 않지만, 작가는 시종 대리석이라는 특정 재료를 사용하는데, 이 또한 본질과 본성을 겨냥한 주제의식을 일관되게 지지하는 대목이다. 결국 조각의 본질은 대리석의 물성과 연계돼 있으며, 자연의 본성 또한 대리석의 본성에 연루돼 있다. 이로써 작가의 작업에는 조각의 본질과 자연의 본성 그리고 대리석의 물성이 하나로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김정미_사과 ll apple ll_대리석, 브론즈_35×83×26cm_2009

김정미의 근작에는 사과와 씨앗 그리고 가랑잎이 소재로서 도입된다. 이 소재들이 하나같이 자연에서 채취한 것들이며, 그리고 사실적인 형태로 재현되었다는 점에서 전작에서 자연의 본성으로 예시된 「자두」와의 연장선상에 있다. 특히 마른 감씨를 소재로 한 「씨앗」이나 「가랑잎」이 그러하며, 「사과」 연작은 이와는 좀 다른 맥락에 속한다. ●「사과」 연작에서는 감각적인 형태(사실적인 형태)에 대한 충실한 재현을 넘어 기하학적인 형태(추상적인 형태)와의 대비 내지는 조화를 꾀한 듯한 느낌이다. 사과를 얹어둘 일종의 좌대를 끌어들인 것인데, 그 형태나 구조가 「상자」와 「자리」 연작을 변주한 것 같다. 그 좌대는 위에 얹힐 사과를 위한 부수적인 장치로서보다는 그 자체 독자적인 개체성을 확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과와도 유기적으로 어우러져 마치 한 몸(한 피스)처럼 느껴진다. 따라서 미니멀리즘을 연상시킬 만큼 심플한 구조와 정적인 느낌이 감지되는 그 오브제는 단순한 좌대가 아니다. 그리고 이는 「자리」가 외관상 의자의 형태를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의자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좌대나 의자는 다만 구실에 지나지 않을 뿐, 사실은 조각의 본질(최소한의 구조에 대한 환원주의적 태도)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추수된 형태이며 구조인 것이다. ● 이처럼 기하학적인 형태의 오브제와 유기적인 형태의 사과가 어우러진 경우가 있는가 하면(분리된 채 한 피스를 이루는), 아예 한 덩어리를 이루는 예도 있다. 대리석 속에 기하학적인 형태와 유기적인 형태가 함께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사과를 사각의 형태로 잘라낸 형상으로서, 때론 정사각형에 가깝기도 하고 더러는 옆으로 긴 직사각형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자연스레 사과의 유기적인 곡선과 각진 부분이 대비되면서, 특히 사과 꼭지의 움푹 파인 부분이 강조돼 보인다. 이로써 모더니즘적 환원으로 나타난 조각의 본질과 자연주의적 재현에 바탕을 둔 자연의 본성이 대리석의 물성을 매개로 해서 서로 통합되고 있는 것이다.

김정미_씨앗 seed_대리석_16×51×8.5cm, 12×51×7cm, 17×52×10cm, 17×53×10cm_2009

한편, 각진 부분과 사과의 잘려진 형태가 맞닿는 부분에 생겨난 곡선이 자연의 유기적인 풍경을 상기시키는데, 하늘과 땅이 맞닿는 공지선이나 공제선을 암시하기도 하고 계곡을 떠올리게도 한다. 이처럼 작품은 사과인 동시에 풍경의 한 부분으로도 읽힌다. 그럼으로써 작은 자연(사과)과 큰 자연(풍경), 소우주와 대우주와의 유기적인 관계의 형상화가 느껴진다. 그 자체를 작가가 일상 속에서 찾아낸 자연의 본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그리고 사과꼭지와 연결된 속으로 움푹 파인 부분을 형상화한 것은 아마도 사과의 생장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는 생명의 근원, 생명의 샘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생긴 모습도 그렇지만, 세상의 근원이며 세상의 배꼽(움파로스)이라는 상징적 의미로 확대 해석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이처럼 「사과」는 배꼽을 상기시키고 몸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이는 「자두」가 에로틱한 기호를 연상시키는 것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러니까 자연에서 찾아낸 몸과의 유사성(단순한 형태적 유사성을 넘어 본성의 유사성을 아우르는)인 것이며, 그 자체 자연과 신체를 하나로 보는 생태학적 인식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것이다. 자연과 일체가 되지 않고서는 생각하기도 실현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김정미_가랑잎 dead leaves_브론즈_12×25×5cm_2008

이와 함께 김정미의 조각은 시각적인 경험을 넘어 거의 촉각적이다. 대리석 특유의 투명성과 더불어 부드럽고 섬세한 굴곡과 표면질감에서 자연의 육질이 느껴지는 듯하다. 자연 고유의 생명을 머금은 듯한 곡선과 표면질감을 얻기 위해 작가는 일일이 손사포질로 그 표면을 갈아낸다. 이렇게 한 작품을 갈아내는데 짧게는 하루가 꼬박 걸리기도 하고 길게는 수일이 걸리기도 하는데, 어찌 보면 작가의 작업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과정이 아닐까 싶다.

김정미_잎맥 vein_은_20×20×1.5cm_2009

작가에게 있어서 대리석의 표면을 손으로 갈아낸다는 행위는 그 자체 대리석 속에 숨겨진 자연의 결과 질감을 찾아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대리석의 질감과 손의 질감이 긴밀하게 교감하고 삼투되는 과정을 통해서 마침내 자연의 질감이 찾아지는 것이다. 그 과정 중에 대리석과 손, 주체와 객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서로 혼재된다. 주와 객의 구별이 뚜렷하면 대리석의 단단한 재질을 뚫고 부드러운 속살에, 자연의 질감에 이르지 못한다. 나를 허물 때 너에게 건너갈 수 있고, 너에게 동화될 수 있고, 너와 일체가 될 수 있다. 메를로 퐁티는 나와 너(세계) 사이에 우주적 살이 채워져 있어서 나와 너를 주체와 객체로 분리할 수 없다고 한다. 나와 너는 진즉부터 하나이며, 똑같은 전망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대리석에 동화되고 자연에 스며든다.

김정미 작업실_가변설치_2009

로댕은 예술의 유일한 원리란 눈에 보이는 것을 모사하는 것이며, 따라서 정확하게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정확하게 보고, 본 그대로를 모사한다는 것이 그러나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인식의 동물이며, 인식의 프리즘을 통해서 세상을 본다. 따라서 때로는 인식이 장애가 될 수 있다. 이런 인식의 베일을 걷어내고 볼 때 세상은 처음 보는 것처럼 보이고, 그럴 때에야 비로소 세상은 나를 설레게 할 수 있다. ● 자두나 사과 등 자연을 소재로 한 김정미의 작업은 자연을 자의적이고 임의적으로 해석하거나 변형시키지 않는다. 가급적 자연의 원형에, 자연의 본성에 충실한 태도를 보여준다. 이를 위해 조각의 최소구조 내지는 최소한의 물적 조건으로의 환원을 수행하며, 자연의 원형에로의 환원을 감행한다. 이로써 자연에 내장된 생명력을 드러내고, 자연의 위대한 모성과 대면케 한다. ■ 고충환

Vol.20090603b | 김정미展 / KIMJUNGMI / 金正美 / sculpture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