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9_0527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관훈갤러리_KWANHOON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본관 2층 Tel. +82.2.733.6469 www.kwanhoongallery.com
바람을 간지럽히는 낮은 담 ● 덕수궁 돌담길을 떠올리면 괜히 가슴 한켠이 아늑해짐을 느낀다. 사랑하는 연인을 떠올리듯 돌담길에 대한 저마다의 기억들이 방울방울 피어난다. 여기서의 담(wall)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따뜻한 정(情)으로, 정겨운 설레임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다른 담이 있다. 그 담은 나와 타자를 구분하는 경계의 담이다. 각자의 영역을 규정하고, 단절과 차단을 의미하는 담은 거대한 벽으로 다가온다. 그 벽은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단지 그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소외자로 만든다. 담은 나를 타자로 내몬다. 왜냐하면 담은 세계와 나를 구분하는 공허한 벽돌이기 때문이다.
1. 막힘의 담 ● 작가 전은희는 담을 화폭에 옮긴다. 그녀의 담은 답답하게 막혀있다. 거대한 담은 출구도 없이 시선을 차단한다. 그녀에게 담은 위협의 존재, 분리의 벽으로 다가온다. 공간에 놓인 담은 그 담을 둘러싼 주변공간을 둘로 갈라놓는다. 그 갈라짐은 나와 타인의 구분이기도 하고, 나와 나의 인식 사이에 놓인 자리다툼의 장소이기도 하다. 담은 두 벽을 가진다. 나를 안전하게 지키는 안쪽의 벽과 타인의 자리에서 다른 영역을 인정해야 하는 바깥쪽의 벽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는 공허한 콘크리트의 빈공간이 자리한다. 우리의 인식은 결코 담 외부에서 생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담이라는 단어규정 속에서 드러난다. 벽으로의 담은 항상 나를 안전하게 지키면서 나를 위협한다. 도대체 담 너머에는 무엇일 있는 것일까? 베를린 장벽을 사이에 둔 이념대립의 종착역은 허물어버림에 있었다. 그러나 담을 허문다고 모든 것의 경계가 사라지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베를린 장벽이라는 물리적인 벽보다 더 큰 벽, 바로 차별과 편견의 벽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뇌에서 시뮬레이션 되는 상상의 벽이다. 어느 벽이 더 견고한가? 실제적인 막혀있음의 벽과 가상의 막힘, 혹은 믿음의 막힘을 뚫을 수 있는 용기와 가능성은 결코 호응관계를 이루지 않는다. 작가 전은희의 담은 바로 이러한 막힘을 의미한다. 공간의 막힘, 인식의 막힘, 의식의 막힘은 거대한 담벼락으로 답답하게 다가온다. 그녀에게 담은 하늘을 보듯 올려다보아야 할 높은 벽이자 두려움과 위협의 대상이다. 그것은 고립과 배타, 절대적인 것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녀의 담이 이러한 막힘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그녀의 담에서 어떠한 것들을 느낄 수 있는가? 단지 높은 담벼락을 재현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답답함을 느껴지게끔 하는 것이 그녀의 의도인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녀의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녀 스스로가 자신의 담을 무너뜨리고자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는 허물어지기 직전의 오래된 담을 찾아 나선다. 그 오래된 담은 지저분하고 반듯하지 않다. 그것은 마치 오랜 시간 견고성을 강조하던 콘크리트의 신화가 무너지기 직전의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현실의 모습을 보여줌과 같다. 그것은 오랜 편견과 가식을 의미한다. 담이 무너지면 나와 타자의 공간은 나와 또 다른 나의 공간으로 변환된다. 담 안쪽의 나와 담 바깥쪽의 타자와의 경계에서 이제 남은 것은 낡은 인식의 고정태인 흐물흐물해진 담의 관념 밖에 없다. 담은 결코 형태를 가진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경계지움의 추상성을 내포하는 내부의 공간이다. 그 공간은 소외를 원한다. 나를 타인과 구분하고, 타인을 타인과 구분하기 위한 소외, 스스로 벽 밑에서 자신을 나약하게 만드는 소외 말이다. 우리가 다가가지 못하는 삼엄한 경계의 벽, 그 벽은 이제 더 이상 견고한 벽이 아니라,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우리들의 삶의 역사 그 자체이다. 작가는 담이 가지고 있던 긴긴 세월의 흔적을 찾아내려고 애쓴다. 거기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마치 소작농이 못된 지주의 벽에 낙서를 하듯 몹쓸 담이 있는가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살았던 삶의 애환이 담긴 이끼 낀 아련한 담도 있다. 이제 곧 무너져 흔적조차 사라지고, 사람들의 인식 속에나 남아있을 무시무시한 관념의 벽을, 그녀는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삶의 형태를 지닌 호흡하는 담으로 받아들인다.
2. 대화하는 담 ● 그녀의 담은 세월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노랗고 이끼 끼고 지저분한 담은 이제 무너진다. 무너뜨림의 주체는 바로 자연이다. 그러나 담은 다시 경계를 생성한다. 나 자신과 자연세계를 경계 짓고, 나와 자연을 인식하게끔 한다. 곧 나와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나의 모습과 조우하게 된다. 물론 그 벽은 인간에 의해 다시 새로운 콘크리트 벽으로 대체될 것이지만 말이다. 흔적 없는 시골 철도역의 오래된 담처럼 아련함과 지나간 시대의 추억을 마치 내 존재의 안식처인양 끊임없이 내안의 타자를 확인해야 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그녀가 표현한 것처럼 낡고, 지저분한 담벼락을 닮아있다. 담은 낡고 거친 호흡으로 우리들의 편견에 대해, 두려움에 대해, 경계에 대해 폭로한다. 담벼락의 끝자락엔 작은 골목이 생겨난다. 그 골목은 무너진 담을 쫓아 끝없이 길어진다. 그 길은 작가의 무의식과 연결된다. 그 무의식은 도시를 형성하는 벽과 사회를 형성하는 벽 사이에 세워진 경계의 공간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경계가 아니라 절합의 공간이며, 타인과 자신을 구분하지 않고 자신과 자신안의 타인을 모두 수용한다.
담을 비집고 나온 붉은 가스파이프들은 생동하는 삶의 모습을 드러내며 타인과 나를 끊임없이 연결시킨다. 담은 이제 벽이 아니라 하나의 삶의 공간이 된다. 그리하여 작은 창을 내어 빛을 받아들인다. 그녀의 작품에는 이러한 작은 창들이 생성되는 과정이 잘 묘사되어 있다. 처음에는 무너진 벽돌에 의한 뚫림의 공간들이 차츰 미리 구성된 창들로 대체된다. 담은 이제 자신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타자를 받아들인다. 거기엔 새가 들어와 노래할 수 도 있고, 다람쥐가 비를 피해 잠시 들를 수도 있다. 결국 그녀는 담을 통해 나를 둘러싼 삶의 시간들을 기록하고, 그 무상한 담을 바라볼 때 약간의 회고의 시간이 필요함을 드러낸다. 그녀는 오래된 벽에 새겨진 나와 타인간의 거리를 인식하고, 그 거리만큼의 두께를 거친 붓질로 표현한다. 그녀의 예술에 대한 붓질이 거칠면 거칠수록 담은 더더욱 고즈넉해진다. 거친 담을 받아드는 그녀의 고운 캔버스는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는 낡은 담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제 그녀의 담은 타인을 향해, 나를 향해 바라보는 만큼의 열린 공간을 제공한다. 그리하여 담은 스스로 다가와 나에게 말을 건다.
현대를 살아가는 회색빛 콘크리트의 꽉 찬 공허를 무너뜨리듯, 돌담은 각각의 돌과 돌 사이를 비어있음의 공간으로 메운다. 돌담은 마치 제주도의 그것처럼 거센 바람을 모두 막아낸다. 그 돌담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는 차단으로써의 담이 아니라 자연과 동화하기를 원하는 낮은 담이다. 바람이 흘러가야 한다는 진리를 엉기성기 돌들로 비워내고, 지나가는 바람을 간지럽히는 담은 삶의 소소한 흔적들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전은희의 담은 바로 이렇게 나와 타인, 그리고 자연과 관계하는 낮은 담이다. ■ 백곤
Vol.20090524d | 전은희展 / JUNEUNHEE / 田銀姬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