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 우리 소풍간다. Hey, We are going on a picnic

주황展 / JOOHWANG / 周荒 / photography   2009_0520 ▶ 2009_0610 / 월요일 휴관

주황_altered landscape13_디지털 C 프린트_76.2×101.6cm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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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09_0520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대안공간 풀 ALTERNATIVE SPACE POOL 서울 종로구 세검정로9길 91-5(구기동 56-13번지) Tel. +82.(0)2.396.4805 www.altpool.org

헤이, 우리 소풍간다. * ● 브루클린에 거주하고 있는 사진작가 주황이 서울에서 첫 전시를 연다.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들은 미국에서 찍은 인물사진군과 국내에서 찍은 풍경사진들로 대별되는데, 나중의 이 풍경사진은 2005년에서 2008년 사이에 작가가 몇 차례 미국을 떠나 한국에 와서 촬영한 것이다. 프랑스의 어느 시인이 "떠남은 작은 죽음이다Partir, c'est mourir un peu"라고 썼을 때, 그것은 다소간, 헤어진 사람들에 관한 기억의 문제로 요약될 수 있지만, 심각한 비행공포증에 시달리고 있는 주황에게 이것은 가감 없이 말 그대로이다. 끈질긴 비행공포와 여전한 문화시차가 지배하는 국경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으며 작가가 제작한 풍경사진들은, 그러나 예상과 달리, 일견, 밋밋하고 평범하다. 적어도 여기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 이 풍경사진에는 서울 시내 한강변이나 외곽지대 혹은 도시근교 어디서건 우리가 흔히 마주칠 법한 공원이나 야산, 숲, 강 등이 잡혀 있다. 그런데 이 '자연'은 문화와 대조되는 풍요롭고 장엄한 야생이 아닐뿐더러, 그렇다고 사적인 공간과 비교되는 공공의 인공녹지로 관리되는 모양새도 아니다. 적당히 방치된 채 계절의 흐름을 간간이 알리고 있는 이 자연의 기물棄物들 여기저기로, 고층건물이나 아파트 단지, 대교, 자동차 등이 끼어들고 있는데, 그것들 역시 웅장하거나 위압적인 모습하고는 거리가 있다. 황사가 끼거나 혹은 흐린 날의 가라앉은 색조로 재현되어있는 도시는 다만 신기루처럼 자연 사이에 떠 있을 뿐이다. 그리곤, 사진 전체에 산포되어 있는 나뭇잎, 꽃, 풀이 종종 햇빛을 반사하고, 흰옷이나 빌딩의 파편, 조각배 등이 간혹 그 빛을 흡수하면서, 사진을 바라보는 우리의 상념을 이리저리 이끈다.

주황_altered landscape6_디지털 C 프린트_76.2×101.6cm_2006

어디선가 본 듯한 우리주변의 풍경사진에서 발산되는 애잔함과 낭랑함의 실체는 무엇일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지는 이 '중간정서'는 우선, 주황 사진의 존재론적 위치에 기인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강렬한 스펙터클과 퍼포먼스로 우리 눈을 자극하고 있는 요즘 한국의 현대미술사진과, 다른 한편으로는 놀랄만한 에너지와 집요함으로 우리 몸을 긴장시키는 우리 시대의 디지털 팝이미지 사이에 끼어 있다. 확실히 주황은 사진작가이던 애호가이던 간에 좀처럼 사진적 대상으로 취급하지 않는 그런 방기된 풍경을 붙잡아 기록함으로써, 우리 시야에서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풍경들을 잠시나마 차분히 머물게 하고 있다. 이를테면, 그의 풍경사진은 '울트라하이퍼포스트모던' 강남문화를 닮아있는 작가들의 사진과 부암동, 성북동 등 강북의 옛날 동네문화에 한껏 쏠린 동호인들의 사진 사이 어딘가에서 방전되어 버린 당대적 정서를 충전하고 있는 것이다. 극단적 개념성과 과잉된 노스탤지어 사이에서 놓쳐버린 장소에 관한 사진적 기록은 그런 맥락에서 우리의 현실적 감수성을 적절하게 튜닝 한다고 하겠다. ● 어떻게 보면, 주황의 사진은 사진 이전에, 인간의 시각 자체가 갖는 이중성, 특히 부재의 시각적 경험과 관련이 있다. 존 버거는 시각에는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을 부인하게 되는 속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말한다. 사라짐과 마주하게 될 때 우리는 우리 존재를 무시하는 이런 사라짐에 저항하면서 비가시적인 것 역시 실재한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존 버거,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김우룡 옮김, 열화당, 2004) 전지구상에 흩어져 있는 다른 이주자들처럼 주황에게도 이러한 부재의 시각적 경험이 일상화되어 있을 것이다. 타국에서 그가 볼 때 그는 보는 자신을 포함하지만, 고향을 떠난 자신은 동시에 다른 공간에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배재하는 셈이다. 또는 반대로, 사라진 것을 보지 못하는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같은 공간에 동시에 존재하는 '시차' 덕분에 정착자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그러니까 그가 본 풍경들은 이주와 개발, 이동과 건설로 시공간대가 뒤얽히면서 한껏 두터워진 그 경계의 틈 사이로 잠시 노출된, 이상한 '공터' 같은 것이다. ● 이 공터에 건설된 풍경은 구축적이라기보다는 해체적이고, 계획되었다기보다는 우발적으로 생겨난 것처럼 보인다. 원근법적 시선이 억제된 프레임 안에서 건물이나 나무는 조금씩 어긋나 있는 구도로 잡혀 있고 전체적으로 색채의 톤이 제한되는 가운데, 유독 중경中景이 두껍게 자리 잡고 있다. 물론 사진 매체 특유의 살아있는 디테일들로 인해 화면의 전면성全面性이 강조되면서 관람자의 시선을 여기저기로 분산시키는 효과도 내고 있다. 입체적이지만 평평하고, 꽉 차있지만 허술해 보이는, 이 풍경사진의 국면마다에 우리의 '중간정서'가 조응하면, 순간, 서늘하고 황량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나로서는 이런 종류의 독특한 아름다움이야말로 숭고미가 대세를 이루는 이 시대의 사회 감성학과 상관관계가 있겠다는 판단이 선다.

주황_altered landscape9_디지털 C 프린트_76.2×101.6cm_2006
주황_altered landscape2_디지털 C 프린트_76.2×101.6cm_2006

알려져 있다시피, 이데아와 그것의 표현인 감성적인 물질 사이의 직접적인 조화로부터 오는 감정이 아름다움이라면, 숭고는 혼돈스럽고 끔찍하거나 혐오스러운 현상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수잔 손택, 사진에 관하여, 이재원 옮김, 시울, 2005) 미는 우리에게 대상과의 거리에 기초한 무관심적 쾌를 주지만, 우리를 압도하는 무제한적인 숭고는 오로지 불쾌를 매개로 해서만 가능한 어떤 쾌락을 맛보게 한다. 그런데, 혼란스럽고 무한하며 공포스런 자연경관이 숭고함의 감정을 일깨우기에 가장 적합한 대상이었던 그런 시대는 벌써 지나가 버렸고, 인간의 무의식과 가상공간, 전쟁과 테러 혹은 가난과 파국이 자연의 숭고를 대체했다. 재개발과 되살아난 토건주의, 미래의 운하로 침탈당한 동시대 한국의 자연도 이미 무력해질 대로 무력해졌다. 의심의 대상으로 격하된 자연은 물론, 그 삶의 환경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우리의 기억까지 정조준 하는, 무차별적이고 전면적인 파괴 그 자체야말로 이 시기 숭고의 본령이 되었다. 그리고 간신히 살아남아 소략해진 자연 풍광은 미의 흔적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전도된 세계에서는 미에 비견해서 숭고가 감지되는 것이 아니라 숭고 아래 미가 따라 붙는다. 이를테면, 미는 숭고의 그림자가 된다. 주황이 구조화한 공터의 풍경에서 느껴지는 얕은 슬픔, 환멸, 무기력 같은 감정의 심미적 정체는 바로 그것이다. ● 과거를 기념하려고 하기보다는 스스로를 파괴하는데 골몰하고 있는 숭고미의 현장,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숭고미가 '발굴되고' 있는 그 현장을 만보객 주황이 걷는다. 사진은 애초부터 중간계급에 속한 만보객의 눈을 확장시켜주는 도구였다지만, 주황은 중간계급보다는 차라리 중간지대에 속한다. 브루클린과 서울 사이 그 어딘가에 있는 주황의 중간자적인 위치로 인해서, 아무런 조작 없이 '현실' 그대로 찍은 그의 사진이야말로 오히려 초현실적인 거리감을 갖게 된다. 여기서 그의 사진이 절합하는, 그러니까 제시하는 동시에 이어주는 그 거리감은 시간적이며 사회적인 것이다. 손택이 말한 대로 초현실주의란 한편으로는 흥겹게 또 한편으로는 겸손하게 현실과 관계를 맺어야 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현실적인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점을 암시해주기도 한다.(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이수련옮김, 인간사랑, 2002) 한때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 또 다른 세계, 곧 유토피아를 향한 갈망이었다. 이제, 주황의 사진에서는 오브제의 형태로만 현실을 보게 되는 것, 그로써 끊임없이 현실의 부당함을 기록하고 재생산하는 것만이 진정 현실을 초극하는, 초현실이 된 듯하다. ● 앞서 언급했던, 두툼해진 중경은 제시하는 동시에 이어주는 이 거리감의 요체가 된다. 거기에는 간혹 피크닉을 나온 친구들이나 산책하는 사람들, 가방을 맨 학생들이 방점으로 찍혀있어 사진 전체에 낭랑한 울림을 더한다. 이 작은 사람들에게서는, 대단한 야유회를 연출하는 연인들이나 조깅하는 바쁜 직장인들 또는 학원생활에 사로잡힌 중고생들의 활력과 피곤함 대신, 그런 일상의 트랙에서 약간 비껴나 있는 한가로움과 여유 그리고 일말의 불안과 일탈이 감지된다. 이번 전시에는 보이지 않지만, 주황의 다른 작품들에서 이들은 다시 등장한다. 공터의 풍경에서 작가가 만났던, 운동하는 청소년들, 점심시간에 야외로 빠진 OL들,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중년남성들이 그들이다. 이들을 묘사하는 일련의 사진은 존엄성과 자발성을 잃지 않으면서 자신들이 특정한 성역할의 "수행적 교환행위"를(쥬디스 버틀러,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김윤상 옮김, 인간사랑, 2003) 하고 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었던 이전의 얼굴 사진이나 노래방 사진과 대구를 이룬다. 미국에서 찍은 이 사진 속 인물들은 각자의 표정과 시선 그리고 포즈를 통해서 젊은 아시아여성의 신체에 부과된 규범을 전달하고, 화장법과 헤어스타일 그리고 장신구와 의상을 통해 그 기호와 교섭하고 있었다. 이들이 유독 모호하고 상처받기 쉬워 보였던 것은 그저 주어진 역할을 연기하는 대신 어떤 측면에서는 스스로 상황 자체를 연출해야 했기 때문이다. 노래방 사진에서 노래하는 인물 못지않게 뉴욕 소재 노래방의 인테리어가 강조되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여기의 사진에서도 역시 인물들이 속해있는 공간적 배경 곧 공터의 풍경이 그 수행성의 장치로서 재현될 것이다. 어쨌든, 지금, 사진 속 저 멀리에서 이들은 외치고 있다 ― "헤이, 우리 소풍간다." ■ 백지숙

* 백민석, 『헤이, 우리 소풍간다』, 문학과 지성사, 1999

Vol.20090520c | 주황展 / JOOHWANG / 周荒 / photography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