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9_0509_토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30am~09:00pm / 월요일 휴관
아트스페이스 스푼_ARTSPACE SPOON 서울 종로구 부암동 43-2번지 Tel. +82.2.394.3694 www.staart.kr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에서 만난 앨리스 ● Alice in Nostalgia. 작가 고선경이 자신의 근작에 부친 이 주제는 향수에 빠진 앨리스를 뜻한다. 그림에 등장하는 소녀는 열려진 공간과 실내 정경을 배경으로 그 속을 기웃거리거나 서성이고 있다. 소녀 앨리스가 자신의 향수의 근원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소녀는 다름 아닌 작가 자신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 그녀는 도대체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자신의 존재가 유래한 뿌리, 근원, 원형을 찾고 있으며, 진정 자기라고 부를 수 있는 실체를 찾고 있는 것이다. 선불교의 십우도에서 소로 비유되는 인간의 본성, 소승불교에서의 진아, 프로이드의 리비도(맹목적인 의지에 의해 추동되는 무의식)와 실존주의의 자기소외(실존적 타자로서 자기 자신을 낯설게 느끼는 경험)는 모두 이 실체에 대한 자의식과 연동돼 있다. 일종의 원형의식에 의해 추동되는 이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은 모든 인간의 보편적 자질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림 속 소녀는 작가의 자화상이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도 한 것이다. ● 향수는 과거 지향적이다.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회상과 회한, 기억과 재생에 연루돼 있는 향수는 결코 미래를 향하는 법이 없다. 미래를 향하는 향수는 비논리적이며 모순이다. 향수는 언제나 이미 일어난 어떤 일에 대한 감정이며,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을 반추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향수는 존재론적 행위이다. 자신의 존재가 유래한 그 근원은 아득하고 멀다.
플라톤은 그 근원을 이데아라고 부르고, 융은 원형이라고 명하며, 라캉은 상상계라고 칭한다. 플라톤은 인간이 일종의 관념세계인 이데아로부터 유래했다고 본다. 그랬던 인간이 감각세계 속에 편입되면서 처음의 순수성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유래한 세계에 대한 기억마저 망실하고 만다. 따라서 예술가에게는 그렇게 상실되고 망실된 순수한 세계, 관념세계, 이데아를 상기시키고 일깨우는 일이 과제로서 주어진다. 그리고 융의 원형은 일종의 존재론적 끌림으로 나타나고, 집단무의식의 형태로서 현상한다. 논리를 따질 것도 없이 저절로 일어나는 끌림, 동화, 공감현상으로서 일종의 신화적이고 문화적인 자산에 속하는 것이다. 역시 그 원형의식을 복원하는 일이 예술가의 몫으로 주어진다. ● 그런가하면 라캉의 상상계는 미처 자의식이 생겨나기도 전에 유아가 속해져 있던 세계다. 경계와 구분과 차이에 대한 인식이 없는 융합의 세계이며 자족적인 세계이다. 행복한 카오스의 세계라고나 할까. 그 속에서 마냥 행복했던 유아는 그러나 언어로 구획된 세계, 경계와 구분과 차이로 나눠진 세계인 상징계 속으로 편입하면서 행복한 카오스를 억압하고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성장을 멈춘 아이들, 이를테면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의 주인공 오스카나, 루이스 캐럴의 소설 속 주인공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그리고 키덜트족(젖병을 빠는 어른들)은 그 자족적인 혼돈이 그리운 것이다. 그리고 작가의 자화상이면서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도 한 그림 속 앨리스 역시 그러하다(어른은 향수를 통해 현실을 보상받는다).
Alice in Nostalgia. 고선경이 자신의 근작에 부친 이 주제 속엔 서로 다른 두개의 텍스트가 중첩돼 있다. 루이스 캐럴의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향수』가 그것이다. 앨리스가 또 다른 이상한(알 수 없는) 나라인 영화 『향수』속으로, 그 영화에 그려진 주인공의 여정과 장면 속으로 들어갔다고나 할까. ● 작가는 진작부터 자신을 앨리스와 동일시해왔다. 「Walking with Alice」(2006)와 「Alices Island」(2007)에 이어 근작에서의 「Alice in nostalgia」(2009)에 이르기까지. 앨리스를 자신의 분신, 얼터에고, 도플갱어, 아바타로 내세우면서 앨리스와 더불어 이상한 나라와 거울나라를 여행하기도 하고(루이스 캐럴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함께 거울나라의 앨리스를 집필하기도 했다), 앨리스를 낯선 섬에다 고립시키기도 하고, 향수에 빠져들게도 한다. 작가는 인형극에서의 인형술사처럼 자신의 분신인 앨리스를 이러저러한 상황과 문맥 속으로 떠나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작 작가 자신은? 이중분열이고 다중분열이다. 사실 인간은 의식과 몸을 분리해서 의식을 멀리 떠나보낼 수 있다는 점에서 분열은 인간의 보편적 자질이기도 하다. 굳이 따지자면 유독 예술가들이 그 보편적 자질을 의식의 층위로 끄집어 올려 특수한 경험과 비전을 예시해주는 도구로써 전용하는 것이 다른 점이다.
그렇게 고선경은 앨리스를 이상한 나라(무의식의 실체를 예시해주는)이면서 동시에 거울 나라(자기반영성의 실체를 예시해주는)이기도 한 섬으로, 그리고 영화 『향수』 속으로 떠나보낸다. 여기서 섬은 마치 밀실처럼 이중적이다. 자기를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동시에 외부로부터 자기를 고립시키고 격리시킨다. 새들이 전깃줄에 앉을 때 적당한 거리가 유지되지 않으면 서로 싸운다. 고독은 좋지만 고립은 두렵다. 그 섬은 이런 인간의 이중성과 이율배반을 상징한다. ● 그 섬에 가면 허허벌판에 마치 소금창고 같은 허름한 건물이 있는데, 바로 무대세트로 지어진 것이다. 그 자체 무의식의 집이며 숨어있기 좋은 방이기도 한 그 임시건물은 미셀 푸코의 헤테로토피아 즉 없는 장소, 부재하는 장소, 잊혀진 장소를 떠올리게 한다. 푸코는 군대와 감옥 그리고 정신병원처럼 사회적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사람들에게 잊혀진 이 격리된 사회의 지점들에서 혁명의 계기를 보고, 대안사회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여기에 연극무대와 영화세트를 보탤 수 있을 것이다. 둘 다 임시방편의 사회(유사사회?)란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를 통해 의식이 변화되는 계기로서 작용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다. 의식의 변화는 세트장을 기웃거리는 앨리스처럼 자신의 무의식과 대면하고 자신의 또 다른 자아(타자)와 직면하는 행위, 즉 자기반성적인 행위로부터 비롯된다.
그런가하면 앨리스가 여행하는 또 다른 이상한 나라인 영화 『향수』를 만든 타르코프스키는 철학자이자 영상시인으로 수식되는 러시아 출신의 영화감독으로서, 영화가 잃어버린 시간과 기억을 복원해주는 가장 강력한 매체임을 증명해 보인다. 시간과 기억을 복원해준다? 이야말로 주체가 자기의 존재가 유래한 근원을 찾고, 추적하고, 되새김질하면서 행하는 일이 아닌가. 역사적 사실과 존재론적 사실, 역사적 트라우마와 존재론적 트라우마를 날실과 씨실삼아 직조해내는 방법과 과정을 통해 마침내 거대한 원형의식에 맞닥트리게 하는 그의 영상문법은 그대로 무의식의 여정을 위한 훌륭한 텍스트가 되어준다. ● 그 장면 속에서 앨리스는 물과 만난다. 물이 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임시로 쳐놓은 비닐에 고인 물과, 폭격으로 허물어진 건물의 잔해 사이로 마구 쏟아져 내리는 빗물과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물은 불과 함께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중요한 상징 중 하나이며, 그 의미는 거울과 통한다(루이스 캐럴의 거울나라의 앨리스와 함께 타르코프스키 역시 거울이라는 영화를 남겼다). 물은 거울에 비친 주체의 자기반영적인 성질과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을 의미론적으로 변주한 것이다. 더불어 물은 무엇보다도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정화하고 재생해준다. 앨리스로 상징되는 무의식을 위로하는 물이다. ● 그 물로 상징되는 거울 이미지는 현실 속 이미지와는 다르다. 현실의 거울이 자기를 반듯하고 투명하게 반영한다면, 무의식의 거울은 왜곡되고 불투명하게 반영한다. 핀홀 카메라에 포착된 피사체처럼 화면의 가장자리가 어둑하게 보인다거나, 화면 속 이미지가 부분적으로 왜곡돼 보이는 것이다. 이로써 결코 투명하게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무의식에 대한 무지를 상징하고, 판타지가 덧붙여져서 무의식을 왜곡하고 각색하는 것을 상징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의식에 대한 기억의 불완전한 복원력과 재생력을 상징한다. 그리고 거울 이미지는 앨리스가 또 다른 앨리스를 만나는 것에서, 자아가 또 다른 자아(타자)와 대면하는 것에서 극적상황이 연출된다. 나아가 앨리스가 여러 명의 앨리스로 분열되는 것에서, 자아가 허다한 다른 자아들로 분화되는 것에서 캐럴의 이상한 거울나라의 비전은 마침내 완성된다. 비전? 판타지? 꿈? 무의식? 마침내 행복하고 자족적인 카오스의 세계 속으로 들어온 것일까. ■ 고충환
Vol.20090511g | 고선경展 / KOHSUNKYUNG / 高仙京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