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9_0508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2:00pm~06:00pm / 화요일 휴관
게이트 갤러리_GATE GALLERY 서울 종로구 가회동 1-5번지 경남빌라 제상가 1층 Tel. +82.2.3673.1006 www.gategallery.kr
아주 오랜만에 서랍 속에 수북이 담겨있는 편지들을 조심스레 꺼내 봅니다. 한 장 한 장의 엽서들은 빛바랜 모습으로 세월의 무게만큼 같이 늙어가고 있었습니다. 손때 묻은 삶의 흔적 속에는 젊은 날의 열정과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지난날의 추억은 모두 아름답지만, 그중에서도 가슴 뛰게 만드는 것 중의 하나가 사람을 향한 그리움과 사진을 향한 열정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추억들과의 정겨운 회상! 바쁘다는 핑계로 그리운 이들을 잊고 살았습니다. 편지를 쓴 기억도 빨간 우체통에서 편지를 꺼내 본 지도 참 오래되었습니다. 5월 게이트갤러리에서 기획하는 최광호 선생님의 『마음의 낙서』展을 기획하면서 삶속의 따스한 그리움들을 꺼내 봅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감사한 분들께 정성이 담긴 마음으로 한줄 한줄 편지를 써 내려가며 가슴에 설레임을 담아보려 합니다. ■ 게이트 갤러리
현실 너머를 향한 내밀한 충동 ● 1989년 말에서 1990년 초까지 엽서와 낙서그림의 형태로 제작한 최광호의 작품에는 30대 작가의 삶에 대한 번민과 자유를 향한 갈망이 잘 나타나 있다. 가족과 스승에게 보내는 엽서의 전면에 메니큐어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사진을 붙이거나 구멍을 뚫어 만든 엽서 시리즈와 틈틈이 시간을 내어 스케치북에 낙서하듯이 그린 데생이 그것으로, 이 작품들은 현재 중견 사진가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의 작업 중에서는 비교적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다. 사진에 대한 작가의 열정과 집요함에 가까운 신념을 잘 알고 있는 지인들이나 사진을 '생활'로 내면화시켜 낸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일반의 인식에 비추어 볼 때 이번에 발표하는 작품들은 '사진가 최광호'의 본령에서 비껴나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한 판단이 표면적으로는 맞을 수 있다. 하지만 실상 면면을 꼼꼼히 뜯어 살펴보면 오히려 이 작품들의 근간을 지배하고 있는 에너지가 이후 폭발적으로 넘쳐나는 사진작업의 추동력이 되고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 에너지란 도대체 근원을 알 수 없이 내면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 고뇌와 번민이다. 그것은 구체성을 띠지 못한 채 막연한 의문 덩어리가 되기도 하고, 명확한 대상을 갖지 않고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반항의식으로 변하기도 하며, 무한을 향한 자유로운 정신이 매순간 마주하는 한계를 넘어서고자 할 때 나타나는 좌절의 형태로 귀결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념들은 엽서에 적어놓은 글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작가는 "살듯이 힘든 사진", 그것은 곧 "나와의 싸움"이라는 인식에 어느 순간 도달한다. 그러한 인식은 나중에 찾아낸 것이겠지만 작가는 처음에는 이국땅에서 자유를 찾았다고 느낀다. 하지만 이내 그 곳은 다시 싸움터가 된다. 누구와 싸우는가. 처음에는 대상이 분명했을 것이다. 수없이 많은 싸움을 거쳐 상대를 이겨내는 과정에서 마지막에 만난 적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다. 자신을 적으로 상정하는 싸움은 본래 괴롭고 힘들 수밖에 없다. "한없이 답답함이..."라고 적은 엽서의 마지막 문장은 그렇게 끝난다. 답답함이 어쩐다는 뜻일까. 아마도 구체적으로 잡히지 않는 무엇 때문에, 혹은 무엇이 자신을 답답하게 만드는지 알 수 없어 답답할 것이다. 답답함을 떨쳐낼 수 없어 작가는 무작정 부딪치고 본다. 무엇이 답답한지를 모르니 무엇과 부딪쳐야 할지, 무엇과 싸워야 할지를 알 수 없을 때 반항이 생긴다. 어떤 무엇에 대한 반항이 아니라 답답함을 이겨내기 위한 몸부림으로 생겨난 반항이다. 그것은 작가 스스로 명료히 의식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최광호의 몸부림이 무엇인지 알기 위한 반항"이라고 쓴다. 그의 몸부림은 곧 사진작업이어서 작업 자체가 반항이다. 하지만 아무리 몸부림쳐도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아 답답해하는 자신을 넘어서야 할 적으로 인식한다. 그러한 인식은 결정적이어서 이제 괴로움과 답답함 자체를 편하게 받아들이는 변화가 생겨난다. 자기를 부정할 수는 없는 까닭이다. 하여 답답함이 작업의 에너지가 되고 그것은 다시 생의 활력소로 변한다. "사진이 왜 이다지도 힘든가 하면서 세상 살 맛 느끼는" 사람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괴롭고 힘들어도 세상 살 맛 난다는 생각은 궁지에서 찾아낸 마지막 버팀목이나 도피적인 탈출구가 아니라 삶에 대한 냉철한 인식의 결과물이다. 본래 자유의 순수한 개념에 한계란 없다. 하지만 삶과 세계는 매순간 넘어설 수 없는 한계로 주어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한계를 선선이 받아들이는 생각은 현실주의자의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의 본래적 의미를 쫓아 현실의 한계를 수긍하지 못하는 자는 한낱 공상 속에서 사는 사람이라고 해야 하는가. 혹은 인간은 현실을 살지 현실 바깥에서 사는 자가 아니어서 마땅히 한계를 수긍해야 한다고 말해야 하는가. 물리적 한계란 넘어설 수 없는 것이지만 그것만이 한계는 아니다. 때로 인간은, 혹은 본질적으로 인간은 초월적 사유를 통해 현실의 한계를 극복해 나가는 존재이다. 그것 없이 인간의 역사는 어떠한 변화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인문학과 예술, 심지어는 자연과학에서도 초월적 사유는 항상 변화의 원동력이 되어 왔다. 그것의 가장 간단한 이름은 상상력이다. 주어진 현실 이상을 살고자 하는 욕망과 그 욕망을 실천하는 힘이 초월적 사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 그의 엽서에 자주 등장하는 사람의 형상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의 모습을 취하기도 하고 정체불명의 원시 생명체를 닮아 있기도 하며, 사지가 뱀처럼 늘어진 기묘한 형태를 띠기도 한다. 그들의 모습이 중요하지는 않다. 다만 주목할 점은 작가가 이러한 형상을 자유롭게, 틀에 얽매이지 않고 손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도록 놓아두는 과정에서 그려냈다는 것이다. 이는 학습 받은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의지의 발현이기도 하다. 학습은 지식을 생산하고 지식은 현실 속에서 사는 법을 알려준다. 요컨대 학습은 현실의 한계 내에서만 살도록 인간을 가둔다. 그런 점에서 현실 바깥으로 자유롭게 뛰쳐나가고자 하는 인간에게 학습이 알려준 지식은 장애물이다. 그것에서 벗어나기란 어렵다. 분별력도 힘이지만 그 힘은 벗어나도록 하는 힘이 아니라 안에 머물도록 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엽서에 구멍을 뚫어버리는 행위는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욕망이 거칠게 분출되는 모습처럼 보인다. 그 욕망이 강한 작가는 그래서 "구멍은 나의 본질"이라고 당당하게 선언한다. 자신의 본질인 구멍에 자신의 사진이나 자신의 분신인 아내의 사진을 붙이는 것은 그런 점에서 자연스럽다. 반대로 두 사람의 얼굴에 구멍을 뚫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구멍 뚫린 얼굴로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정체불명의 생명체는 같은 이유에서 작가의 화신처럼 보인다.
최광호의 엽서 작업은 그간 발표 기회를 좀처럼 만나지 못했던 것 같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든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들은 그의 내면세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요긴한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 개인의 내밀한 생활사를, 요컨대 삶 자체를 송두리째 작업의 주제로 삼아 온 작가에게 끝 모를 고뇌와 번민, 자유를 향한 열정은 삶의 에너지이자 작업의 에너지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에너지가 고갈되면 삶은 끝난다. 작업과 삶을, 번민과 작업을 동일시하는 작가에게 삶은 곧 번민이기도 하다. 그래서 고뇌 없는 작업, 괴롭지 않은 작업은 없다. 이러한 등식이 퇴폐적인 낭만주의적 예술관의 산물이 아님은 그의 치열한 작업 여정이 말해주는 바이다. 이번 엽서전은 그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고 있다. ■ 박평종
마음의 낙서 ● 나는 사진기를 들면 세상을 향하고, 그 세상이 나에게 다가와 나를 이끌어간다. 반면에 사진기가 내손에 없을 때에는 하얀 백지가 나를 부른다. 세상을 보듯, 세상을 생각하듯, 세상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사진이 작품이 되어야하는 그 나로부터도 벗어나 그저 끌쩍끌쩍 거리는 그 낙서가 지금은 나에게 행태 없는 나를 만드는 가장 소중한 마음 나누기가 되어있다. ● 사진기를 들고 세상과 나누는 대화는 마음에 힘이 들어가지만, 하얀 백지를 들고 나누는 대화는 그저 즐겁기만 할뿐 그 무엇의 이유도 없다. 그래서 나는 늘 시간만 나면 나의 마음에 이끌려 낙서를 한다. ■ 최광호
Vol.20090511e | 최광호展 / CHOIKWANGHO / 崔光鎬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