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9_0502_토요일_07:00pm
관람시간 / 24시간 관람가능
작은공간 이소 대구시 남구 대명3동 1891-3번지 B1 Tel. +82.10.2232.4674 cafe.naver.com/withiso
세속적 농담, 유아적 망상 ● 작가와 많은 이야기(사실은 말다툼)를 하면서 나는 제법 스트레스를 받았다. 나에 대한 비판적 비꼬움을 은근슬쩍 돌려 말하는 듯 하면서도 직설적인 그의 말하기 방식이 내 자존심을 제법 자극했기 때문이다. 폼 잡지마라. 솔직해라. 이상한 얘기 갖다 붙이지 마라. 제대로 알고 적어라. 물론 알맞게 돌려 말하긴 했지만 사실 그게 더 기분 나빴다. 어떻게 글을 적어도 마땅치 않아 할 것 같은 그의 표정이 생각나 스트레스는 자꾸 쌓여 가고, 차라리 글을 적지 않는 것이 내가 편한 길이지만 나름 추구하는 것이 있어 결국 적기로 했다. 전시를 위해 적어야 하는 이 글이 이렇게 되버리고 만 것은 내가 그에게서 받았던 스트레스를 고스란히 건방진 글로써 복수하겠다는 다짐과 그의 냄새가 물씬 풍기게 적어버리겠다는 객기가 작용했으며, 솔직함과 폼 잡지 않음이 어떤 건지 제대로 보여줘서 되려 깜딱 놀라게 만들어 버리겠다는 심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특징이나 장점을 가지고 요리 볶고 조리 볶아 글을 적어내야 하는 상황이다.
먼저 그의 작품은 작가의 의도로써 파악하기 보다는 작가라는 인간 혹은 평범한 세속인의 한사람으로써 드러나는 행태를 유추해보는 것이 올바른 방향일 수 있다. 왜냐하면 작가는 자신의 의도와 인식의 뚜렷함을 통해 작업을 수행하기보다는 자신의 본능과 직관, 일상적인 상념과 상상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이 나름 솔직하고 순박해서 어떠한 전략을 의심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작품에 관한 설명보다는 그가 미술을 어떤 방식으로 대하며, 접근하고 있는지가 더 재밌고 생각해볼 건덕지가 있는 듯 하다.
세속인(이 글을 읽고 있다면 대부분 세속인일 것이다)이 세속적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미술 안에서는 사실 통용되기 힘든 것이다. 세속적인 이야기는 통용되지만 세속적으로 이야기하긴 힘들다는 게 더 맞겠다. 아니 통용되기 힘들다기보다 미술 안에 있는 수많은 감시자들의 시선 속에서 그런 식의 이야기방식은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작가가 용기가 많다는 것을 이야기 하려는 게 아니라 작가에게는 그런 용기가 전혀 필요 없다고 이야기 하려는 것이다. 그는 미술을 거창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아마 안 땡기면 언제 그만둘지 모를 일이다. 그의 접근 방식은 술자리에서 불알친구에게 저질스런 농담을 던지듯 거침없고 겉치레 없는 단순함이며 건방짐이다. 그가 미술을 가지고 뻘짓은 할 수 있지만 적어도 가식적인 거짓말이나 가오를 잡지는 않을 거라는 게 오히려 전략 없는 솔직함으로 느껴지며, 되려 그 부분이 그를 미술 앞에서 당당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로써의 폼, 즉 외적인 겉치레 뿐만 아니라 어떠한 현상을 작품을 통해 보여주는 방식자체가 여타 작가들처럼 좀 더 많이 아는, 좀 더 많이 깨달은, 세속과는 거리를 두고 있는 입장이 아니라 오히려 좀 모자란, 세속에 속해 있는 자신을 통해 이야기 한다. 이번 전시에서 보여 지는 벽화라는 형식과 작업과정을 관람자와 공유하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에게 벽화라는 형식은 생계 수단이자 그 공간에서 실질적인 교감을 형성하고 얼마 안 있어 사라지게 될 것들이다. 이는 예술작품이 마치 영원할 것 같은, 품(品)으로써의 지나친 아우라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동떨어지지 않은 삶, 생활과 직접적인 연관아래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작가의 관점을 은연중 반영하고 있는 것이리라.
'유아적'이라는 단어는 작가를 '아이 같은', '아이처럼'에 비유하고 있는 것인데, 모든 행위의 발단을 재미에서 찾는 뇌구조. 엉뚱하거나 유치한 상상력에 기반한 모습들은 전형적인 아이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를 아이라 한다면 정상적인 아이는 아닐 것이고, 뭔가 어덜트 한 구린내를 지워버릴 수 없다. 나름 순수하긴 하지만 삼촌이 몰래 숨겨놓은 성인물을 죄다 섭렵해버린 느낌이랄까. 섭렵하는 것까진 괜찮다지만 아직 사회적 시선과 부끄러움에 길들여지지 않은 탓에 자신이 섭렵한 것들을 온 사방에 떠벌리고 다니며 주위사람들을 민망케 한다. 아이는 그 민망함을 알고 있어서 사람들의 표정에 나타나는 민망함을 즐긴다. 작품에 나타나는 이러한 민망함은 강력한 사회적 구속력에 대한 반항이자 인간이란 동물에 대한 반성적 부끄러움을 향하고 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사회라는 틀에서 의미 있는 가치와 그보다 더 큰 범위, 즉 자연에서 의미 있는 가치는 알다시피 상극이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아이의 어덜트는 사회 안에서는 변태적 횡포지만 그 밖에서는 나름 정의(?)를 위한 반항이자 애정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농담과 망상은 앞 뒤 사건이나 상황, 이야기의 연결고리가 난데없이 끊어지는 지점. 그리고 그 끊어짐을 통해 웃음이나 허무맹랑함을 생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농담과 망상도 그와 같은 모습이다. 현실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리고 웃음과 허무맹랑함으로 넘겨버리는 과정은 통쾌하기도 하지만 한순간 헛웃음으로 넘겨버리자니 뭔가 찝찝하고 캥긴다. 현실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렸다고는 하지만 그 속에 나타난 모습들이 우리들 혹은 인간의 보이지 않는 실상을 되려 잘 그리고 있거나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어서일 게다. 작가는 세상에 길들여지고 무감각해진 민망함을 들춰내고는 혼자서 얄밉게 쪼개고 있다. 한 단계 매듭만 풀면 가슴에 비수를 꽂아버리는, 딱 기분 나쁘기 좋을만한 그의 말하기 방식처럼 농담과 망상은 어느새 신랄하다. ■ 작은공간 이소
Vol.20090509g | 김종현展 / KIMJONGHYUN / 金鍾鉉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