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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9_0502_토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11:00pm
호기심에 대한 책임감_gallery, curiosity 서울 종로구 부암동 254-5번지 Tel. +82.2.542.7050 www.curiosity.co.kr
김윤재의 산수조각 山水彫刻 ● 근데 갑자기 뭔가 떠올랐는지 우치는 몸을 돌려 정자에 팔짱을 끼고 오른쪽 다리를 약간 앞쪽으로 내밀고 왼쪽 발로 몸을 지탱하고 서있는 낭자에게 말했다. "자루 없는 도끼를 가진 자가 도끼 빠진 자루를 찾으러 왔는데 별도리 없이 이만 하산해야할 것 같소." 우치의 말을 듣자마자 낭자는 팔짱을 풀고, 옥같은 얼굴에 화사한 기색을 가득 담고, 정자의 기둥을 두 손으로 가볍게 잡고는 붉은 입술을 반쯤 열어 미소를 우치에게 보내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뭔가 서로 오해가 있었던 같은데, 낭군께서는 부디 섭섭한 생각 갖지 마시옵고 다시 올라 오소서." 우치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이 적중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기분이 좋아 냉큼 정자로 뛰어 올라갔다. 그는 그/녀가 말한 '도사'를 백발노인, 즉 '남자'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말한 도끼 얘기를 떠올리니 그게 凹와 凸의 은유였음을 문득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낭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그녀의 얼굴은 구름 속의 보름달과 같이 희고 고왔으며, 그 태도는 아침 이슬을 머금은 한 떨기 모란꽃과도 같았다. 두 눈에 머금은 추파는 맑은 물과 같고, 가는 허리는 봄바람에 나부끼는 버들가지 같았으며, 붉은 입술은 마치 앵무단사(鸚鵡丹沙)를 물고 있는 듯하여, 그 아리따운 모습이란 가히 독보적인 절세가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우치는 그녀 앞에 무릎을 끓고 엎드려 호소하는 목소리로 말하기를 "부디 가름침을 바라옵니다." // "정말 배우고 싶은가요?" // "그게 저의 평생 소원입니다." // "무슨 어려움이 있어도 참을 수 있다, 이 말이죠?" // "지당하신 말씀을..." / "미리 말하지만 그림 그리기는 산이나 나무를 그저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스스로 그러함(自然)'의 근원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게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예요. 그러니 자연의 근원을 깨닫는 건 도(道)를 깨우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엇보다도 음·양의 오묘한 변화를 알아야 해요. 만약 당신이 각오가 되었다면, 배낭에 넣어온 지·필·묵은 모조리 버리도록 하세요." 우치는 아예 배낭 자체를 절벽 밑으로 던져 버렸다. "음·양이 무엇인지 아세요?" // "오바하는 생각일지 모르지만, 혹 그걸 자루 빠진 도끼와 도끼 빠진 자루로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낭자가 미소를 지으니 꽃떨기 같은 얼굴에 화색이 무르익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동굴(침실)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그들은 절절하고 황홀한 운우지락(雲雨之樂)을 81일 동안 우치가 하산하기 바로 그날 아침까지 행했다. ● 조선시대 한글소설 『전우치전(田禹治傳)』에 등장하는 전우치를 주인공으로 삼아 쓴 최동훈 감독의 영화 「전우치」가 아니라 졸고 「하산하라!」의 서문격 글에서 인용한 것이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전우치전』은 무위도식하던 재벌이나 부정부패를 일삼는 정치인들이 바글거렸던 조선시대 선조(宣祖)를 배경으로 쓰여진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 전우치는 신묘한 도술을 부려서 홍길동처럼 당시 무위도식하던 재벌이나 부정부패를 일삼는 정치인들에 '똥침'을 놓았다. 그런 까닭인지 혹자는 『전우치전』을 허균의 『홍길동전』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한 마디로 '홍길동 아류' 소설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최동훈 감독이 말했듯이 전우치와 홍길동의 캐릭터는 다르다. 이를테면 "전우치는 홍길동과 달리 대의명분이 없는 인간이고, 콤플렉스도 없고, 그냥 놀고먹고 죽자는 생각을 가진 깡패"라고 말이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최동훈 감독의 영화 「전우치」는 누명을 쓰고 족자그림에 갇힌 조선시대 도사 '전우치'가 500년 후인 현대에 봉인에서 풀려나 세상을 어지럽히는 요괴들에 맞서 싸우는 활약상을 그린 영화라고 한다. 두말할 것도 없이 한글소설 『전우치전』에서 전우치는 족자그림에 갇히지 않았으며 오히려 족자그림을 통해 죽음의 위험에서 탈출하기도 한다. 무위도식하던 재벌이나 부정부패를 일삼는 정치인들을 조롱하던 전우치가 대통령(임금) 앞에 끌려가 사형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는 대통령에게 자신이 평생에 배운 재주를 세상에 전하지 못하게 되니 마지막 소원으로 그 재주를 한 번 발휘할 수 있도록 부탁을 했다. 결국 대통령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전우치는 지·필·묵을 받아 대통령 앞에서 천봉만학(天峰萬壑)과 만장폭포(萬丈瀑布) 산상을 쫒아 흐르게 하고, 시냇가에 버들을 그려 늘어지게 그리고, 밑에 안장 지은 나귀를 그리고 붓을 던졌다. 그리고 나서 전우치는 느닺없이 대통령에게 사은했다. 대통령은 어리둥절해서 '임마, 넌 이제 죽을 넘인데 사은은 무슨 얼어죽을 사은이냐'고 말했다. 하지만 전우치는 대통령의 말에 개의치 않고, 그가 그린 그림 속으로 들어가, 그가 그린 나귀 등에 올라, 그가 그린 산 동구에 들어가더니 그냥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겸재의 '진경산수화' vs 윤재의 '산수조각' ● 머시라? 허무맹랑한 이야기 그만하고 김윤재의 '산수조각'에 대해 말씀해 달라고? 뭬야? 김윤재의 '산수조각'과 '전우치전'이 무슨 관계라도 있냐고요? 아니, 그 둘 사이에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필자가 '전우치전'에 대해 씨부리겠느냐? 지나가면서 중얼거려듯이 소설 전우치에서 전우치는 자신이 그린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 근데 김윤재는 거꾸로 평면의 산수화를 조각으로 만들었다. 그렇다! 김윤재의 산수조각은 산수화를 조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독자 열분들의 이해를 돕기위해 구체적인 사례를 하나 들어보겠다. 윤재의 「그리운 금강산」 시리즈1은 겸재의 「금강내산(金剛內山)」을 모델로 삼아 조각한 것이다. 물론 윤재의 금강내산-조각은 백색의 받침대가 아닌 그가 제작한 그의 아버지 머리에 조각되어 있다.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 특히 북한이 고향인 분들은 더욱 금강산을 그리워한다. 따라서 금강산을 가고 싶어 하시는 아버지의 머리에 입체 금강내산이 표현된 「그리운 금강산」 시리즈1은 적어도 나에게 절묘한 접목으로 느껴진다. 김윤재는 산수조각을 하게 된 이유를 "순수하게 한국인의 작업을 하고 싶어서였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덧붙여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네 일상에서 우리는 점점 더 불필요 하다고 느끼는 과거의 일상을 지우기에 급급한 게 아닐까?"라고 자문했다. 필자가 그의 산수조각을 처음 보았을 때 '가문의 부활 가능성'을 보았다. 우리 현대미술은 (자의에 의해서건 타의에 의해서건) 서양의 현대미술을 수입했다. 두말할 것도 내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서양 현대미술의 수입 자체가 아니라 서양 현대미술의 '소화'의 문제이다. 그동안 우리 미술계는 서양 현대미술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 '설사'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문의 위기'를 극복하고 '가문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무엇보다 우리의 정체성을 찾아야만 한다. 김윤재의 '산수조각'은 바로 우리 정체성 찾기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특히 '진경산수화'라고 불리는 정선의 '산수화'를 모델로 삼아 산수조각을 고안해 놓았다. 그러나 오늘날 어느 작가가 겸재의 그림을 재해석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겸재의 그림을 분석해야만 할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겸재의 그림을 분석한다는 것 자체가 장난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윤재에게 겸재의 그림 분석은 피할 수 없는 일종의 '통과의례'가 되는 셈이다. 만약 윤재가 겸재의 산수화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한다면, 겸재의 산수화를 분석하고 그 분석을 통해 문제제기나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만 한다. 그때 꼭 필요한 것이 현실인식이다. 따라서 김윤재는 옛 그림들에 대한 현실인식을 관통한 탁월한 분석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직 김윤재의 산수조각, 즉 (그림을 조각으로 전이시키는) '도술'이 2% 부족하다. ■ 류병학
Vol.20090507e | 김윤재展 / KIMYUNJAE / 金倫栽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