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다시 오고

조현서(란향)展 / CHOHYUNSEO / 趙賢書 / drawing   2009_0501 ▶ 2009_0514

조현서_인생은 아름다워_합성수지에 기계 드로잉_가변설치_각 180×60cm_2009_부분

초대일시_2009_0501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8:00pm

롯데갤러리 부산본점 LOTTE GALLERY BUSAN STORE 부산시 부산진구 부전2동 503-15번지 롯데백화점 B2 Tel. +82.51.810.2328 www.lotteshopping.com

꽃잎의 미열微熱, 선禪이 되다. ● 열, 그것은 살아있음의 기호적 징후다. 생명의 약동이다. 또한 그것은 물질과 의식사이의 경계에서 세상의 진실, 실재계를 포함하고 있다. 의식의 변이와 신체의 변양이 거짓 없이, 실제적으로, 유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 오래된 진실을 맑은 두레박으로 건져 올리는 이가 조현서작가다. 열은 그자체로 샘솟는다. 때론 거대한 폭풍우 같지만 대개는 미세하고 음지를 지향한다. 또한 그러한 작은 것에 세상의 진실이 담겨있다. 사춘기 때의 열이 거센 비바람 이었다면 삶의 모진 사건들을 격고 난 뒤의 열은 섬세하면서 거대하고 음흉하면서 아름답다. 그것은 떨어지는 꽃잎과 같다. 그 떨어지는 꽃잎을 쫓아가다, 이슬비에 흠뻑 젖은 신체가 담지 하는 열, 그러한 미세하지만 삶의 카오스로 인도하는 미묘한 열, 돌아온 카오스모스의 열이다. 그 깊고 깊은 파문의 끝, 비밀스러운 기호를 조현서는 포착한다. 기호의 제국과 싸우는 것이다.

조현서_인생은 아름다워_합성수지에 기계 드로잉_가변설치_각 180×60cm_2009

그러므로 작가는 항상 미열을 안고 있다. 세상의 열정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조현서의 기호 해독술解讀術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곧 고정된 주체와 객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최상의 해독기계다. 그녀의 작동방식은 때로는 유아론적으로 때로는 탈주체적으로 타자를 파고든다. 세상의 처연한 아름다움을 한편으로는 정답게 한편으로는 전율스럽게 표현한다. 곧 그녀는 세상의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다. 세상의 얼굴에 가라앉은 내재적 열 곧 힘을 사유하고 그렇게 함으로서 세상의 객관적 인식에 다가서고자 하는 것, 그것이 작가의 생존방식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항상 탐험중이다.

조현서_관계_캔버스에 기계 드로잉_100×180cm_2009

열의 탐험, 그것은 주체의 능동적 의지를 낮출 때 가능한 것이다. 열은 기본적으로 물질에서 올라오는 것이기 때문에 관찰자의 주관적 의지가 확대되면 그것의 역능은 쉽게 사라진다. 그러므로 조현서가 열을 탐험하는 방식은 역설적이거나 삼투압처럼 깊게 스며드는 것이다. ● 먼저, 타자를 조응할 때는 역설적으로 사유한다. 곧 떨어지는 꽃잎이 세상을 대면할 때 그녀가 맞닿는 갈등과 소외, 조소와 동조, 비판과 모방이 마치 이야기를 하듯이 속삭이고 있다. 그렇다, 열을 감지하는 주체가 애벌레처럼 작아졌지만 그 드러내는 형식은 연극적 구조가 되고 있다. 추락하는 강도의 슬픈 애사가 펼쳐진다. 그러나 조현서는 역설적으로 유아론적 주체를 확대하여 피상적 낙관주의자가 된다. 마치 떨어진 화살의 풀 무덤을 찾아 허덕일 때처럼 그것은 슬픈 재현임에도 입에는 웃음을 머금고 있다. 의식적인 기쁨, 물질적이고 신체적인 슬픔, 이 가느다란 경계를 작가는 특유의 긍정적 세계관으로 인도하고 있다. 그 긍정은 자신과 타자의 열을 올 곧게 받아들이는 지성적 태도이다.

조현서_길을 걷다_합성수지에 기계 드로잉_가변설치_2008

두 번째 삼투압처럼 작용할 때는 상위의 관념적 방식이거나 수동적 종합으로 자신의 열을 단련하는 경우이다. 주체를 먼 곳으로 데려가는 것이 관념적 방식이다. 작가는 관념의 극한으로 열을 탐지한다. 열을 잔뜩 머금은 얼굴을 탈영토화하는 것이다. 의지의 극한으로, 의지를 무화하는 것이다. 얼굴의 각 부위가 열로서 분화되고 갈라 치고 있다. 스토리는 사라지고 깊은 사유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의지의 삼투압으로 열을 흡수하는 것에서 자신과 타자를 넘어서고자 한다. 의지의 극한이 열을 만날 때 의식이 아닌 신체의 사유 지평이 우리에게 드러난다.

조현서_길을 걷다_합성수지에 기계 드로잉_가변설치_2008

이것과 반대되는 극한의 방식이 수동적 종합의 방식이다. 곧 의지를 극한으로 몰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의지와 감성을 열에 맡기는 것이다. 이것은 주로 드로잉 작품에서 드러나는 방식이다. 떨어지는 꽃잎의 존재방식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다. 섬세한 열의 이동 경로를 추적하여 존재의 근원적인 현존의 지평을 드러낸다. 이때 작가는 타자와 함께 노닐고 노래한다. 융합의 점이 곶串처럼 이동하고 있다. 일체의 갈등, 모방, 동조는 사라지고 깊고 깊은 심연 속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이 깊은 어두운 전조가 세계의 객관적 인식의 장이다. 이 천상의 조화와 대지의 깊은 울림으로 인도한 것이 열의 삼투압이다. ● 이러한 열의 조응과 구성 그리고 같이 가고자 하는 근원적 작가의 역능은 어디에서 빠져나오는가? 그것은 작가가 신체를 사유하는 방식이다. 그 신체에서 열이 집중되는 방식 곧 열의 투입과 산출의 방정식을 작가가 항상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곧 열의 방정식, 열의 경제학이 영위되는 것이다.

조현서_co-worker_캔버스에 기계 드로잉_100×180cm_2009

열의 경제학의 토대는 떨어지는 꽃잎의 미혹이다. 꽃잎 스스로 또 다른 떨어지는 꽃잎을 유혹하는 세상의 반복이자 작가의 반복, 곧 생산의 과정이자 생산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미혹에 내재하는 열의 운용과 나아가 쾌락을 지향하는 무서운 음모이자 즐거운 감응을 작가는 드러내고자 한다. 조현서는 모두를 표현한다. 곧 현실원칙에 의해 제어되는 미혹의 열과 추락하는 열의 생산 모두를 드러낸다. 열과 열이 우발적으로 충동하여 솟구치는 세상의 사건을 작가가 사유하는 것, 그것이 조현서가 바라보는 사물이다. 작가가 소유하고 있는 사물은 열과 열의 충돌에 의하여 발생된 것, 그것의 끝없는 추락이다.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을 작가는 결국 간직하고 그렇게 또한 존재하는 것, 곧 떨어지는 것이 그녀의 우월한 존재방식이다. 그렇다. 작가 스스로 떨어지는 꽃잎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조현서_Cho class_합성수지에 기계 드로잉_가변설치_각130×60cm_2008

스스로 떨어지는 대상의 열과 조현서 미열이 마주치는 지점은 선善의 위선이 아닌 선이 아닌 것의 진실 됨이다. 그러나 그 작동방식은 아직 유용하지는 않다. 물론 유용을 추구하는 영역은 아니지만 그만큼 육화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열과 열의 충돌에 의하여 생산된 것을 육화할 때, 그 때의 열은 5월의 바람이 되고 진흙이 되어 꽃잎의 생산에 일조할 것이다. 결국 작가 조현서는 미혹을 벗어나고자 혹은 열을 탐하고자 열의 블락bloc에 포획되거나 벗어나거나 반대로 자기가 포획하거나 같이 간다. 경계는 끝없이 움직이고 있다. 선善의 위선에 맞서 선線의 선단先端에서 생명의 열을 포착하는 열의 불선不善들이 선禪이 되어 나풀거리고 있다. 5월의 떨어지는 꽃잎을 쫓아가는 선禪의 무리를 보라! ■ 安九

Vol.20090502g | 조현서(란향)展 / CHOHYUNSEO / 趙賢書 / draw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