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9_0318_수요일_06:3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관훈갤러리_KWANHOON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본관 2층 Tel. +82.2.733.6469 www.kwanhoongallery.com
전광판 혹은 시선 권력의 공간 ● 김현관의 사진 프레임 안에는 풍경들이 들어 있다. 그 풍경들은 아주 낯익다. 그 풍경들은 우리가 흔히 지나다니는 서울의 중심가 풍경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현관의 사진들을 풍경사진으로 분류하기는 어렵다.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프레임을 채우는 익숙한 대도시 풍경들 안에는 중심이 있고 그 중심에서는 특별한 오브제 하나가 빛을 발하고 있다. 그 빛나는 오브제는 다름 아닌 LED전광판이다. 전광판은 물론 이제는 누구에게나 익숙해진 대도시 풍경의 한 요소이다. 하지만 김현관의 사진 한 가운데에서 빛을 발하는 전광판은 대도시 풍경의 일상적 요소가 아니라 하나의 특별한 기호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 특별한 기호는 그의 사진들을 단순한 풍경 사진이 아니라 꼼꼼히 독해해야 할 텍스트 사진, 더 정확히 전광판 풍경 텍스트 사진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김현관의 사진들 안에서 전광판은 어떤 기호로 작용하는 것일까? 그 기호가 김현관의 사진들을 텍스트로 만든다면 그 텍스트가 함유하는 의미 내용들은 어떻게 독해되어야 하는 것일까?
내가 보기에 김현관의 전광판 기호는 세 가지 층위에서 그 의미내용이 독해된다. 우선 전광판의 '시각적 기호성'이 있다. 김현관의 사진 공간은 말하자면 격자 공간 구조를 지닌다. 즉 프레임 공간 안에 또 하나의 프레임 공간인 전광판 공간이 액자처럼 배치되어 있다. 그 격자 공간 구조는 얼핏 보기에 우리의 일상적 시각구조를 모방하는 듯이 보인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일상적 시선 안에서 전광판 공간이 대도시 중심가 풍경 속의 한 부수 공간이듯 김현관의 격자 공간 구조 안에서도 전광판 공간은 그 작은 크기 때문에 중심가 풍경의 한 소속 공간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김현관은 그 전광판을 풍경의 중심에 위치시킴으로써 프레임 내 공간 구도를 전복 시킨다. 즉 전광판은 풍경의 한가운데를 점거함으로서 더 이상 풍경 속의 한 부수 공간이 아니라 풍경의 중심 공간으로 변하며 그에 따라 주변 풍경들이 전광판 공간의 배경 공간으로 도치된다. 하지만 그러한 공간의 세력 재분배가 단순히 일상적 시각 구도의 전복만을 꾀하는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러한 공간 구도의 전복을 통해서 사진을 응시하는 시선이 모르는 사이에 심리적 시선으로 전환된다는데 있다. 다시 말해 사진 공간 구도의 재 세력화는 사진 공간 자체를 익숙함과 낯설음이라는 심리적 공간으로 바꾸고 그렇게 치환된 심리적 공간 구도 안에서 익숙하던 대도시 풍경은 어쩐지 낯설고 이질적인 풍경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낯설음의 심리적 시선은 풍경을 단순한 시각적 현상이 아니라 읽어내야 하는 모종의 내용이 함유된 텍스트 공간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김현관은 말하자면 전광판을 기호로 삼아 시각적 공간을 심리적 공간으로 바꿈으로써 사진 공간을 텍스트 공간으로 의미화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주목해야 하는 건 전광판의 '정치적 기호성'이다. 어쩌면 김현관의 사진적 의도가 가장 무겁게 실려 있는 전광판의 정치적 함의는 무엇보다 전광판 공간을 채우고 있는 이미지들을 통해서 드러난다. 김현관의 카메라가 장 노출을 통해서 포착하는 전광판의 이미지들은 일견 두서없어 보이지만 조금만 주목하면 그 모두가 이 시대를 지배하는 대표적 권력들을 지시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예컨대 달러 지폐와 맨하튼 금융가 이미지는 자본권력을, 성조기와 덩샤오핑 이미지는 정치권력을, 심미적이고 관능적인 신체 이미지들은 대중문화 권력을 지시하는 또렷한 시니피앙들이 아닌가. 그러나 전광판을 정치적으로 기호화하는 김현관의 사진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이 시대 권력의 모습이 다만 시각적으로 확인되는 구체적인 이미지 공간에서만 멈추는 건 아니다. 보다 중요한 건 그러한 시선의 권력들이 대도시 일상 공간에서 수행되는 특별한 방식에 대한 인식이다. 물론 우리는 프레임 공간의 한 가운데에서 묵묵히 그러나 집요하게 빛을 발하는 전광판을 오래 바라보는 사이에 그 발광체의 사각 공간이 우리 모두를 일방적으로, 항구적으로, 또 반복적으로 응시하는 숨은 권력의 시선, 즉 푸코가 근대적 감옥과 정신병원의 감시 시스템을 정의하기 위해 사용했던 판옵티쿰적 감시 권력의 시선을 닮았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하지만 그러한 판옵티쿰적 시선 권력의 존재와 더불어 보는 이가 김현관의 사진 안에서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 또 하나의 특별한 사실이 있는데 그건 다름 아닌 전광판이 거리를 내려다보며 서 있는 적당한 높이, 즉 전광판의 설치 고도이다. 김현관의 사진 안에서 전광판들은 저마다 서 있는 장소는 달라도 늘 일정한 시선의 고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 고도는 다름 아닌 전광판이 가장 편하고 자연스럽게 눈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높이, 우리가 길을 걷거나 신호등 앞에서 차를 멈추었을 때 무의식적으로 응시하게 되는 높이, 그리하여 응시되는 대상이 자연스럽게 보는 이의 무의식 안으로 침투해 들어올 수 있는 그런 전략적 눈높이이기도 하다. 그리고 김현관의 전광판 기호화를 통해서 비로소 인식되는 그러한 전광판의 눈높이는 이 시대 지배적인 권력들이 수행되는 특별한 방식, 즉 대도시 시선의 권력은 감시자의 일방적인 강요와 통제가 아니라 오히려 피 감시자의 자발적 내면화를 통해서 보다 심층적으로 행사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는 이로 하여금 깨닫게 만든다. 다시 말해 김현관의 전광판 정치 기호화는 이 시대 권력의 수행방식이 판옵티쿰적이 아니라 역(逆) 판옵티쿰적이며 그러한 시선의 내면화를 통해서 권력은 보다 심층적으로 일상화되고 있음을 새삼스럽게 인식시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광판의 '정신분석학적 기호성'이 언급될 수 있다. 전광판의 기호를 정신분석학적으로 독해할 때, 김현관의 사진적 격자 공간 구조는 이중적이 아니라 삼중적이 된다. 즉 풍경 공간 안에 전광판 공간이 내포되어 있듯 전광판 공간 안에서 또 하나의 공간이 발견되는데 그 공간은 시각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지만 어쩌면 가장 또렷한 이미지로 보는 이에게 다가오는 공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보이지 않는 격자 공간의 이미지는 다름 아닌 사진을 응시하는 우리들 자신의 내면 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전광판 공간이 나의 내면 공간으로 치환되어 응시될 때 그 전광판 안의 이미지들은 더 이상 타자가 행사하는 외적 권력 이미지가 아니라 내적 권력의 이미지, 그 권력을 동일시한 나 자신의 거울 이미지로 전환된다. 예컨대 달러 화폐들의 이미지는 다름 아닌 자본에 대한 나의 욕망과 얼마나 정확히 닮았는가? 또 여성의 관능적 신체 이미지와 화려한 상품 이미지들은 나 자신의 은밀한 성적 욕망과 소유 욕망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전광판은 김현관의 정신분석학적 기호성 안에서 더 이상 감시 권력의 공간이 아니다. 그 공간은 오히려 그 권력을 내면화하면서 마침내 동일시되어버린 우리들 자신의 오염된 의식 공간과 욕망 공간을 비추는 거울판이 된다. 그리고 우리가 김현관의 전광판 사진들 앞에서 한동안 걸음을 멈추게 된다면 그 또한 그 안에서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일 것이다. ■ 김진영
Vol.20090318d | 김현관展 / KIMHYUNKWAN / 金炫寬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