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yond the Book-知에 묻다

최은경展 / CHOIEUNKYUNG / 崔銀卿 / sculpture   2009_0318 ▶ 2009_0513 / 월요일 휴관

최은경_LETTING GO_스테인레스 스틸_42×64×12cm_2008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상_GALLERYSANG 서울 종로구 팔판동 115-52번지 B1 Tel. +82.2.730.0030 www.gallerysang.co.kr

지(知)와 생(生)의 패러독스 ●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고 삶의 질을 높이려는 시도를 합니다. 묻고 인식하고 정의 내리는 일을 지성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지성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을까요? 하나의 문명을 만들어내어 차곡차곡 다음 문명으로 옮길 수 있었던 요인은 언어를 통한 인간의 지식능력 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식과 지성은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정보와 정보의 선택 능력간의 차이라 할 수 있겠지요. 또는 지식과 지혜라거나, 지식과 그 지식의 실천 여부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공통적인 것은 모두 지-앎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지성이 문명을 진보시킬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 조각가 최은경이 지난 9년 간 작업해 왔던 책이 상징하는 것은 단순한 지식을 넘어선 '앎', 즉 '지성(知性)'에 관한 것이었다고 이해됩니다.

최은경_LAND OF ABSENCE_스테인레스 스틸_42×64×12cm_2008

책은 정보를 저장하는 대표적인 사물입니다. 책의 목적은 지성을 통하여 삶을 나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한 교육은 지성을 자라나게 하고 훈련시키는 대표적인 시스템입니다. 그 시스템으로 성장한 많은 지성인들이 인류 공동체를 이끌어간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진실한 정보와 바른 선택을 위한 지성은 인류문명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짓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이렇듯 살아가는데 있어 앎은 커다란 자산이며 힘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이 명제를 하나의 예술작품이 거스르고 있습니다. 2001년 작품인「반폐쇄회로(anti closed-circuit)」는 펼쳐진 책을 조롱하듯이 글자를 볼 수 없도록 뒤덮어 버린 작품입니다. 그것은 오물처럼 보이기도 하고 뜨끈한 수프 같아 보이거나 책을 녹여버릴 수 도 있는 어떤 액체 같아 보입니다. 날카롭고 명확한 지성과는 정반대의 모호하고 혼돈스러운 그것을 뒤집어쓴 책의 모습은 마치 비극의 한 장면처럼 느껴집니다. 이 작품은 갤러리나 미술관이 아닌 캘리포니아 데이비스 대학(University of California, Davis)의 쉴즈 도서관(Shield Library) 안에서 평범한 책상 위에 놓여진 채 전시되었습니다. 대학교 도서관 안에 놓여진 '책 아닌 책'은 지성이라는 벽돌로 이루어진 거대한 문명을 향한 뜨거운 물음과 같습니다.

최은경_Book_세라믹_23×21×11cm_2002 최은경_books_세라믹_각 20×14×4cm_2007

상대가 안 되는 게임일 수도 있을까요? 견고한 지성을 뜨거운 가슴으로 난데없이 베어버리는 일 따위는. ● 작가는 지속적으로 책-知에 물음을 던지는 작업을 합니다. 그의 첫 작업이 책-知에 대한 도전(anti)이었기에 이후 일련의 책 작품 또한 비슷한 연장선상에서 읽혀집니다. 작가는 책의 내용을 이루는 언어를 통해 책에 되묻습니다. 거짓(Lies). 용감한 선택(The brave choice). 인간과 신의 규칙(The rules of human being and god). 정의(Justice). 그리고 어머니(MOTHER) 등 등... ● 책을 통해 인간의 지성에 물음을 던지는 이 작품들은 단순 명료한 단어를 통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게 합니다. 이 단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지성을 통하여 우리 존재에 울림을 가져다줍니다. 그것은 우리의 지성을 회의하게 합니다. 단어의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묻습니다. 앎이 삶을 통해 발현되는가를 묻는 겁니다. 이 책임감은 앎이 삶으로 체화 되지 못했음을 숙연하게 일깨워줌으로써 비롯됩니다. ●「Forgiveness」에서 거울처럼 말갛게 비쳐지는 거대한 책은 부끄러운 우리의 모습을 비춰줍니다. 야생의 동물과 순백의 연약한 흰사슴과의 대비를 통하여 지성을 갖추었다고 자부하는 우리의 모습을 무척 초라하게 보여줍니다. 자연의 순수함 앞에서 강철같은 지성은 오히려 무겁고 피로해 보입니다. 아는 대로 살지 못함. 그것을 느끼는 순간 지성이 갖는 한계를 또 다시 알게 됩니다. 작가는 'FORGIVENESS-용서' 라는 단어를 제시하면서 다시 한번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삶에 다가서려고 합니다. ● 삶으로 녹여내지 못하는 앎이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는 것은 지금 우리의 문명이 증명합니다. 자명하게 드러나는 비극뿐만이 아니라 일상에 은근히 배어 있는 불신과 상처는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 입니다. 이것은 앎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를 보여주는 실상입니다. 그러나 내가 아는 바대로 살아지지 않는다는 사실과 그로 인한 좌절은 손쉽게 무시됩니다. 과연 앎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은경_book justice_대리석_35×27×18cm_2005

현재를 살게 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지성의 힘은 얼마나 큰 것일까요? ● 또 다른 측면에서 인간의 지식은 먼지 한 톨보다 작은 것 같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을 이루는 물질적 성분의 기초와 원리를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할뿐더러 정신과 영혼의 차원은 그저 어렴풋이 짐작할 뿐 그 답을 알 길이 없습니다. 인간의 뇌가 지금 보다 백 배 이상 효율적으로 사용된다고 하여서 세계에 대한 전체적인 통찰이 가능할까요? 이런 질문을 하다보면 무엇을 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입니다. 삶으로 체화 되지 않는 앎에 대한 서글픔이나 앎의 끝까지 간다 하더라도 그 앎의 깊이가 바닷속의 물방울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허탈함은 지성에 대한 두 가지 차원의 한계라고 해 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그렇다면 지성에 대한 추구를 그만두어야 할 것인가? 그에 대한 답도 긍정은 아닙니다.

최은경_book_클레이_20×19×18cm_2003

우리는 삶에 대한 정답을 결코 다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의 앎과 일치하는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르게 아는 것, 진실을 추구하는 것을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앎이 가진 한계를 가슴 깊은 곳에 새기고 나서 금방 그것을 잊은 듯 절실하게 따져 물어 가야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삶이 가진 지독한 모순이 존재합니다. ● 이러한 패러독스는 조각가 최은경으로 하여금 힐난하며 부정하던 그 책을 끌어안고 결국엔 그 속에서 희망을 건져 올리려고 애쓰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해 매우 아름다운 예술작품이 탄생하였습니다. 이처럼 지와 생 사이의 모순 가득한 우리 삶도 그 자체로 아름다운 여정이 될 것이라는 신뢰를 가지고 갈 따름입니다. ● 2008년 새로운 책 작품에 작가는 인공이 닿지 않은 자연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았습니다. 제목은「발견되지 않은 곳_Land of Absence」 그리고「Letting go」입니다. 저는「Letting go」를 '무위(無爲)'라 하고 싶습니다.

최은경_MOTHER_스테인레스 스틸_50×39×38cm_2002

항상 백성들로 하여금 무지(無知) 무욕(無欲)하게 하고, / 저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로 하여금 / 감히 무엇을 하려고 하지 못하게 한다. / 무위(無爲)를 실천하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다. // 常事民無知無欲(상사민무지무욕) / 使夫智子不敢爲也(사부지자불감위야) / 爲無爲(위무위) / 則無不治(즉무불치) // 노자,『도덕경 3장』 - ( 최진석,『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 '무위'에 대한 또 다르게 참조할 문장은 중국의 진영첩(陣榮捷)선생의 해석이 있습니다. "Non-action(무위) is not meant literary 'inactivity', but rather 'taking no action that is contrary to nature'-in other words, letting Nature take its own course.") (장기근, 이석호,『노자/장자』 )

최은경_The Anti Closed Circuit_클레이_70×35×25cm_2001

(무위-無爲-는 글자 그대로의 '비활동'이란 뜻이기보다는 '자연에 거슬러 행하지 않음' 즉, 자연 자체의 흐름에 따라 한다는 것이다.) ● 현대 문명에 있어서 지성의 무용함과 폐해를 직감한 최은경 작가의 작업이 지성에 대한 애정 어린 비판에서 출발하여 자연의 본을 따라서 사는 삶에 대한 통찰로 나아가는 것으로 읽혀집니다. 그것은 노자가 설파한 인위적이고 오만한 지성에 대한 경계이며 동시에 순수한 본성을 회복하라는 지혜와 오버랩되는 부분입니다. 그것은 지성을 부정하고 어리석음을 숭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한계를 파악하고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삶의 길을 모색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 최은경 작가가 자신의 서고로 초대하여 보여주는 이 책들은 우리에게 겸손하고 따뜻한 삶을 제안합니다. 생의 광활함과 존재의 가난함을 깊이 느끼게 해줍니다. 어머니(MOTHER)인 자연으로부터 배우며 사는 것이 知와 生의 패러독스(Paradox)를 뛰어넘는 길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 신혜영

Vol.20090318b | 최은경展 / CHOIEUNKYUNG / 崔銀卿 / sculpture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