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9_0313_금요일_04:00pm
참여작가_김홍주_김해민_임동식_정광호_홍명섭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대전시립미술관 DAEJEON MUSEUM OF ART 대전시 서구 만년동 396번지 제1~4전시실 Tel. +82.42.602.3200 www.dma.go.kr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 미술은 무엇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 혹은 음악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비해 미술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막막함을 불러일으킨다. 이미 지난 세기의 초반부터 지금까지 미술은 미술과 미술이 아닌 것의 경계를 긋고, 다시 긋고, 또다시 긋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미술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가능한 하나의 대답으로 '미술이 아닌 것을 제외한 것이 미술'이라고 하더라도 크게 틀린 대답이 아닌 것이다. 현대미술은 미술과 미술이 아닌 것, 혹은 미술이면서 미술이 아닌 것을 모두 포함하고 있고, 이 경계적인 성격은 중요한 계기를 이루고 있다. ● 동시대의 미술은 미술과 미술 아닌 것의 경계에 서 있을 뿐더러, 내적으로는 보편적인 호소력을 가진 측면과 고도로 현학적인 면, 객관적 인식의 측면과 주관적 표현의 측면, 느낌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그것이 외부 사물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되는 상태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 이러한 대립적인 계기들은 어떤 미술작품 안에서 상호작용을 하게 되고, 이러한 상호작용을 바라보는 일이 곧 감상의 일부가 된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展에 초대된 작가들, 김홍주, 김해민, 임동식, 정광호, 홍명섭은 그들의 작품 안에 더할 수 없이 흥미로운 가치들의 경계를 품고 있다. 김홍주의 작품은 최근 세필로 그린 화사한 꽃그림 등이 잘 알려져 있지만, 초기부터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이미 존재하는 오브제와 그림의 관계이다. 오브제를 이용한 작품이건 캔버스 작품이건 그의 작품에는 그려지지 않고 남겨진 부분과 그려진 부분이 존재하는데, 그려진 것과 그려지지 않은 경계의 부분에서 어떤 의미가 발생되고 있으며, 바로 그러한 지점이 알아볼 수 있는 사물을 그리는 그의 작품이 쉽사리 편안하게 다가오지 않는 이유가 된다. 오브제를 이용한 김홍주의 초기작으로부터 현재의 작품까지 그려진 부분과 남겨진 부분의 경계를 드러내는 작품들이 이번 전시에 보여지게 된다. ● 미디어아티스트 김해민의 작품은 첫눈에 유머와 재치가 두드러진 강점으로 다가오지만, 그가 담고자 하는 메시지는 그 이면에 있다. 중력을 가진 지구상에 살아가는 존재의 조건에 관한 문제(「직립희롱」), 분단을 비롯한 시대의 문제(「50초의 렌더링」,「접촉불량」) 등이 김해민의 손에 의해 시시덕거리는 농담 속에 진담의 뼈를 담는 방식으로 다루어지며, 이번 전시에서는 이러한 작품들이 선별되어 전시될 것이다. ● 야외설치 및 퍼포먼스를 주로 하는 자연미술(Natur Kunst)의 시기를 지나 회화 작업에 몰두해 있는 임동식의 경우, 자연이든 사람이든 어떤 대상에 대한 지극한 정성을 담아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수선화 꽃밭을 지나면서 수선화들이 모두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광경에 자신도 모르게 모자를 벗고 수선화들을 향해 마주 인사를 했다는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대상에 대한 그의 공감도는 대단하다. 그런데 대상과 공감을 이루었던 자신의 아름다운 순간을 끊임없는 반추하는 그의 작품의 방식은, 대상에 대한 사랑과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자연애(自然愛)와 자기애(自己愛)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 구리선을 용접하여 반짝이는 나뭇잎과 항아리 형태를 만들어내는 정광호 작품의 경우 쉽게 대중의 기호와 미감을 자극하는 측면이 있지만 그 형태의 연원은 조각에 대응하는 비-조각, 즉 비-조각적 조각을 구현하고자 하는 의지에 있었다. 구리선 작품들 이전의 오브제 설치 작품이나 철판 작업 등으로부터 그의 문제의식을 추적하여 현재에 이르는 작품의 추이를 보고자 한다. ● 조각과 설치, 그리고 사진 등 장르를 넘나드는 홍명섭의 작품의 경우, 관객들은 당혹감과 어려움을 느끼게 되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스타일의 일관성 없음과 난해한 제목 때문일 것이다. 전시장 사면에 검은색 테이프를 두르거나 로프를 늘어놓는 일, 그리고 달걀과 솜과 꽃 사진 등의 관계가 무엇인지, 그리고 특별한 제목이 필요 없음을 나타내는「무제(無題)」를 무제로 쓰지 않고「탈-제(脫-題)」로 비틀어 쓰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의 작품을 단편적으로 본다면 결코 이해하기 쉽지 않다. 본 전시에서는 과거 작품들로부터 현재작에 이르기까지 그가 사용하는 언어와 작품의 관계를 추적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 김홍주의 그려진 것과 그려지지 않은 것의 경계, 김해민의 농담과 진담의 경계, 정광호의 조각과 비조각의 경계, 홍명섭의 언어와 사물의 경계, 이번 전시에서는 이러한 경계의 지점들을 드러냄으로써 이들의 작품에 한발 더 나아가고, 더불어 관객으로 하여금 미술을 이루는 기본적인 조건들을 돌이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할 것이다. ■ 이윤희
나는 글자나 도상들로부터 그림을 시작한다. 그림을 그려나가는 과정에서 이들 글자나 도상들은 새로운 이미지들로 생겨난다. 그리하여 그 의미들이 변화되리라는 기대 속에서 점진적인 제작이 이루어진다.그렇다고 이미 결정된 어떤 의미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 의미들은 관람자와 문화적 장소에 의해 생성될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1996년8월22일) ● 그림의 의미는 그림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려진 바탕과 그림의 경계를 넘어서 있는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생산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개개의 그림들이 그것에 놓여진 공간, 그림과 그림의 관계, 보는 자의 맥락 속에서 경험되어짐과 동시에 의미가 생성되리라 기대한다. (1997년 3월) ■ 김홍주
빛과 어둠 사이의 의식 / 빛과 더불어 나타나는 복제된 이미지의 파편들 / 그 시각적 착란을 통해 증식하고 해체되는 이미지들 사이에서 느끼는 / 현재라는 미분의 찰라 / 낯선 시선/ 시선의 충돌 / 침묵 / 이미지 상호간에 소통되는 인식의 단절과 모호한 중첩 / 그리고 부조리한 상황 / 그 사이에 서있는 한 이방인을 상상해 본다. // ■ 김해민
나 임동식이 30년간 몰두한 '야투(야투,Field Shot)'는 들로 던진다, 들에서 내게로 던져 온다는 뜻으로 채택한 말로서 실내중심의 미술행위를 야외로 전환하며 기존 방법론을 확장, 재해석하는데 있다. 이 현장작업은 그간 사진 동영상 매체에 의한 기록에 의존하는 한계를 가졌다. 그러므로 현장에서 이룬 내용들은 그림으로 다시 전환하여 수작업으로써 느낌과 생각을 포함시킨 회화로써 제작하였는데 자연 속에서 이룬 작위적 행위자체를 그리는 것이 곧 요즘 내 그림의 명분이 된다는 생각을 담는다. ● 자연공간속에 머무름은 정신의 개방과 선(禪)적 자유상태를 있게 해준다. 유리창으로 닫힌 '콘크리트 건물의 안에서 바라본 자연'에 적응된 인간들은 야외에서의 견문, 체험분야와 인간자신들의 근원까지도 멀리한다, 그 어떤 결과로 생겨난 것(자연)으로부터 스스로 멀어짐은 최종적인 의미에서 그들의 죽음을 뜻한다. 형성(생성)과 소멸과정의 한 변화 그들의 자연스런 의미 가운데 죽음은 새로운 의미 내용에 이르러 위험스러운 궁지에 몰리게 된다.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먹구름처럼 그들은 새로운 형성(생성)없는 소멸과정을 밟게 된다. ■ 임동식
작가는 1994년 녹색갤러리에서 개인전 제목을 『비-조각적 조각』이라 명명한 바 있고, 그 이후로도 이 조어를 틈틈이 사용하고 있다. 정광호의 비-조각적 조각에 대해서... 1 비-조각은 조각 이외의 것, 즉 조각이 관련 맺는 상황이다. 2 조각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비-조각적 상황으로 인해 조각이 되는 것이다. 3 나는 나의 오브제들을 통해 비-조각적 상황과 관계를 맺거나 비-조각의 세계로 진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4 나의 오브제들이 비-조각의 세계로 나아갈 때 드는 불안감이 있으나 그것은 접촉하는 피부로 인해 삭감될 수 있다. 5 그 피부란 평면(회화)과 입체(조각)가 면한 곳이다. 6 조각은 풍경적 조건들을 탐색하는데, 이 풍경은 회화적인 것이므로, 조각은 회화적 텍스트안에 놓여질 필요가 있다. 7 비-조각적 조각이 지향하는 것은 이성중심주의, 혹은 빛 중심주의라 일컬어질 수 있는 것 반대편에 있는 것, 즉 그림자의 세계이다. ■ 이윤희
나의 작업은 나에게 새삼 새로울 것이 없다. 그렇다고 낡음에 대한 관념도 없다. 나의 작업에서 새로움이란, 종적인 시간 선상위에서 운용되는 그런 것은 아니다. 나의 작업에서 한 방향의 단선적 시간으로 흘러가는 추이는 예상할 수 없다. 나의 작업은 언제나 동시 병발적 이거나 퇴행적이기도 하여 시대착오적이라 할 생리를 갖고 있는 셈이다. ■ 홍명섭
Vol.20090313h |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