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30pm
갤러리 아트사이드_GALLERY ARTSID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70번지 Tel. +82.2.725.1020 www.artside.org
존재의 심연으로의 여행, '새로운 열망'과 마주할 때까지 - 사물의 절제 ● 황인란의 세계는 명상적이다. 정적과 평화를 위협하는 방해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외부의 소음은 남김없이 차단되어 있다. 내부의 대기를 조율하는 주체는 언설이 아니라 언설의 부재다. 시간은 일시적으로 정지해 있고, 현존 이외의 시간대는 개입하지 않는다. 이 진공 탓에 비둘기의 날갯짓조차 명상의 리듬을 탄다. 그 동작은 역동보다는 정지에 속해 있다. 하물며 올빼미의 쾡한 두 눈은 밤의 적막을 능히 지켜낸다. 인물들은 눈을 감은 채 사색에 잠겨 있다. 부산을 떨거나 상념에 잠긴 채로 정적의 동행자가 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 세계는 시선만큼이나 이미지 또한 절제되어 있다. 한 인물과 비둘기, 이따금 등장하는 화분이나 고양이가 이 느린 세계를 지키는 구성원의 다이다. 이 단촐함의 의미는 존재의 내면에서 횡포를 부리는 '사물의 독재'를 환기할 때 분명해 진다. A.W. 토저(Aiden Wilson Tozer)를 따르면, 불안은 존재의 심연에서 진리에 대한 갈망이 추방되고, 그 자리를 사물들이 차지한 때부터 시작된다.
현 단계의 존재가 범하는 오류의 근원은 존재의 심연을 사물에게 양도한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독재자의 특성은 소유욕이다. 즉 '많이' 획득하고 이득을 내는 것이다. "이 독재자가 우리의 마음에 살기 시작하는 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토저는 밝힌다. 황인란의 부재와 정지의 미학은 존재를 교란하는 사물의 독재를 최소화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를 통해 존재의 심연으로 이어지는 사유의 여정이 마련된다. 평화와 정적은 사물의 독재와 벌여야 할 한 판 싸움에서 유용한 도구가 될 것이다. 이미지의 절제는 상승의 욕망에 중독된 사색의 물꼬를 다시 밑으로 흘려보내기 위한 필연적인 전략이다. 표현(ex-pression)의 완화는 힘이 외부로 분산됨으로써 심연의 싸움에서 산만해지거나 기진하지 않기 위함이다.
황인란의 회화세계는 표현보다는 표현의 절제로, 수사보다는 침묵으로 기울고 있다. 표현의 전문가들에 있어서는 장광설보다 그것의 포기가 더 어려운 미덕이다. 강력한 이슈와 설득하고 싶은 유혹에 빠져드는 이같은 시대에는 더더욱 그렇다. 이 시대의 미술창작행위들이 그토록 노골적이고 소란스러우며, 감각적으로 자극적이거나 개념적 현란함으로 무장하는 이유가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반면 침묵에는 자신을 포장해 왔던 현란한 수사를 포기함으로써, 자신이 드러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맞서는 과정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감각적으론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경험일 수 있다. 그렇더라도, 작가의 절제미를 과장할 필요는 없다. 황인란의 회화는 적지 않은 것들을 이야기한다. 거기에는 함축적이긴 하지만, 누락과 축약을 동반하는 서술형식이 존재한다. 사물들은 모호하고 얇긴 하지만 어떤 상호성을 암시하거나 기호적인 지위를 갖기도 한다. 서술적인 동시에 서술의 부재를 지향한다고 해야 할까. 보여줌, 표현에 관여하지만, 그 보여줌과 표현에는 체념의 뉘앙스가 어려있다. 황인란의 회화는 그렇듯 부재의 미학을 실험하고, 침묵의 언어를 훈련하면서, 조심스럽게, 깨지기 쉬운 상태로 명상의 여정에 첫 발을 들여놓고 있는 것이다.
격자 문양, 부재와 정지 ● 부재의 미학은 이 명상적 공간의 배경 처리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배경을 구성하는 규칙적인 격자 패턴은 이 공간이 바깥세상과는 거의 전적으로 다른 차원임을 암시한다. 그 평면성, 수평과 수직의 예외 없는 엄격함, 어떤 굴곡이나 외부로 향하는 출구도 허용하지 않고, 외부를 보여주는 창조차 없다. 이처럼 배경이 부재를 대변하는 곳에서 상시적 감각은 길을 잃는다. 지상보다 수십 배나 빨리 날고 있음에도, 외부의 참조가 없기 때문에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느낌이 없는 고공비행과 같은 맥락이다. 모노크롬까지는 아니더라도, 색채의 수는 제한되어 있고, 저채도의 파스텔 톤을 지나치지 않는다. 색의 정념이랄까 하는 것들, 뭔가 격하거나 솟아오르는 것의 결과들, 의외의 가능성, 성가시게 하는 요철은 사전적으로 여과되어있다. 물리적 공간이 제한되고, 비교 가능한 외부세계가 부재할수록, 이성적 판단은 위기에 처하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그 차단과 부재가 초래한 위기로 인해, 우리는 우리가 오류없는 판단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자만감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게 된다. 이성이 (자신을 포함해) 세계를 판단할 만큼의 궁극적인 포괄성의 위치에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직감하는 것이랄까. 이러한 깨달음은 다른 종류의 예지력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만들 것이다.
"보고 아는 일반적 방식은 맹목과 수고와 불확실성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의 글은 명상의 깊은 단계가 어떻게 바깥세계의 요인들로부터의 차단에 기초하는 가를 잘 알게 한다 : "모든 변화와 모든 복잡성, 그리고 모든 역설과 모든 다양성은 사라집니다. 우리의 마음은 깨달음의 공중에서, 어둡고도 평온하며 모든 것을 품고 있는 실재에서 헤엄칩니다." 다시 황인란의 회화에서 원근감의 거세는 인물의 묘사로까지 연장됨으로써, 이 수도원적인 차단과 유리가 이 세계의 중요한 시론(詩論)임을 확인해 준다. 원근을 거의 삭제하는 일관하는 묘사방식에 의해 사물들의 존재감은 더욱 감상자에 의해 보완되어야만 하는 결핍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외부와 차단된 이 세계에선 현재의 호흡, 살아있음, 생명 자체가 말을 걸어온다. 사색의 물꼬는 오로지 현재로만 집중된다. 과거의 회한과 미래의 예단 같은 시간의 크로노스적 질서는 이 엄격한 종횡의 차단막을 투과할 수 없다. 이 여과와 통제가 배경을 이루는 격자 패턴의 역할이다. 그것은 일종의 그물이자 차단막이다. 그것은 크로노스적 연대기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며, 카이로스적 사색을 위한 방어막이다. 그것에 의해 모든 불규칙성, 이례성, 예외적인 것들, 불행한 기억들, 행복에 대한 집착, 트라우마들의 격한 파장이 여과된다. 이에 의해 공간은 평온을 유지할 수 있다. 예기치 않음, 우연, 불확실성과 같은 불안과 스트레스의 자양분이 되는 실존의 조건들이 존재를 사로잡고 통제하는 일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단순하고 부드럽고 친근한 세계 ● 황인란의 눈을 감은 채 사색에 잠겨있는 인물들은 분명 중세기의 수사나 퀘이커 교도가 아니다. 그들은 전형적인 도회지 풍의 인물들로, 세련된 차림새와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성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존 번연에 이르는, 파스칼과 톨스토이를 아우르는, 동일한 긴 여정의 한 지점에 있다. 작가와 우리들이 사는 대도시가 사유의 옥토가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불모지라는 의미는 아니다. 사유는 공간의 차원이 아니라, 내적 활동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황인란의 회화는 특별히 다운타운에서의 사유라는, 우리들이 오랫동안 내동댕이쳐 왔던 숙제에 대해 말한다. 도시의 현란함 속에서는 외부세계의 성취동기들로부터 발길을 돌려 내면으로 선회하는 여정이 더욱 조롱당하고 교란되기 마련이다.
"있지도 않은 행복을 찾으러 덫을 놓는 토론장에 발을 들여놓기를 좋아하는", 그같은 지혜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틈새에서, "어둠과 불확실성과 무기력을 겪어야 하는 사유의 책임을 감당해나간다는 것은 더군다나 쉽지 않은 일이다. 황인란의 회화는 세련된 도시인의 명상이라는 주제를 통해 현재진행형인 우리의 진실로 다가온다. 그 세계는 깊고 큰 평온과 평화에 대한 우리 모두의 존재적 결핍과 갈증을 대변한다. 작가는 절제된 형식과 부드러운 색조, 차단과 부재의 회화어법을 통해 명상으로 범주화되곤 하는, 그리고 무엇보다 작가 자신의 것인 따듯한 사색의 한 시각적 알레고리를 제시한다. 그것은 단순하고 부드러우며, 이성의 저편을 갈망하면서도 여전히 우리 곁에서 멀지 않은 친근한 세계이기에 더욱 의미롭다. 무엇보다 그의 회화가 지니는 미덕은 우리가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열망과 마주할 때까지, 존재의 내면으로 향하고자 하는 우리의 깊은 염원을 대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 심상용
Vol.20090311g | 황인란展 / HWANGINRAN / 黃仁蘭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