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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9_0311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pm~07:00pm
모로갤러리_GALLERY MORO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8-16번지 남도빌딩 1층 Tel. +82.2.739.1666 www.morogallery.com
가슴으로 살아가는 삶을 위하여 ● 박지영의 작업은 지극히 개인적인 삶의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소박한 감성적 상상을 펼친다. 그의 작업에는 사회적 이슈와 관련된 뚜렷한 문제의식도 드러나지 않고 어떠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치밀하게 계산된 목적의식도 없으며 유희적 꾸밈도 없다. 그러나 어쩌면 바로 이러한 '없음'으로 인해 그의 작업이 더욱 '의미'를 갖는지 모르겠다.
자본의 시대, 무한의 경쟁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남모를 '무기'를 하나쯤 감추어 두고 산다. 적자생존이란 곧 약육강식에 다름 아니다. 오늘날 약육강식의 원리는 자연계에서뿐만 아니라 경제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러므로 근대이후 '적자생존'이란 용어는 진화론을 설명하는 가장 유용한 말로 이해되었으며 생물학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회적 다윈주의(social Darwinism)이라는 용어까지 낳게 된다. 경쟁은 우리가 삶을 이어가는 가장 치열한 모습이다. 그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모든 힘을 다한다. 힘과 능력을 키우는 일이 가장 기본적인 일이지만 그것은 상대적인 것이므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시도는 그와 또 다른 방향에서 색다른 능력을 키우는 쪽으로도 진행되었다. 이른바 속임수의 역사다.
바다 밑을 기며 시시각각 색을 바꾸는 변신의 천재 문어나 나무 끝에 매달린 대벌레 같은 작은 생명체조차 상대를 속이기 위한 속임수의 능력을 하나쯤 지니고 있다. 적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부풀리는 복어처럼 과장도 속임수의 한 형태다. 모든 것이 자본에 의해 서열화 되는 오늘날 화가로 예술가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없는 능력이라도 만들어야 할지 모른다. 너무 많은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시각적으로 과장된 전위적이지 않은 작업은 더 이상 감각을 자극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많은 작가들은 과장을 적절히 이용한다. 사회적 화제를 부풀리고 그에 대한 반응을 철저히 계산하며 감각적 자극들로 꾸민다. 그러나 모든 것이 과유불급이다. 과장된 전위적 작업들이 관객의 시선을 일시적으로 끌지는 모르겠지만 한편으로 억지스러운 과장은 관객의 심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 이러한 과장의 심리가 예술가로 하여금 사회적 이슈에 대해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하는지도 모른다. 그 이슈가 민감하면 할수록 주목받을 수 있는 여지가 많기 때문인데, 과장 없는 외적 수단의 사용에 둔감하다는 점에서 박지영의 작업은 미련해 보인다. 그의 작업에서는 사회에 대한 즉자적 관심도, 형상의 시각적 강렬함이나 치밀함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이점이 그의 작업을 순수하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한다. 그의 눈은 의식의 내면으로 향하고, 그의 상상은 현실 밖에서 맴돌며, 그의 지향은 순수한 이상을 향하고 있다.
그의 작업의 대부분은 틈틈이 시간 나는 대로 기록해 두었던 드로잉을 바탕으로 한다. 회화작품이나 설치 모두 순간순간 떠오른 발상을 스케치하여 두었던 드로잉의 연장선위에서 완성된다. 따라서 그의 드로잉에 대한 이해는 그의 작업에 대한 소중한 단서를 제공한다. ● 그의 드로잉의 기본 발상은 머리 없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이 삶에서 추구하는 궁극의 목표는 무엇일까? 인간은 서로 다른 일상과 삶을 살아가지만 그 목표는 삶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고 행복을 꿈꾸는 것이다. 자유와 행복이야 말로 우리가 추상화 할 수 있는 진정한 삶의 목표가 아닐까. 자유와 행복,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삶의 궁극으로 내세우지만 사실 이 둘은 하나의 몸과 그 작용으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체용의 관계처럼 행복이란 삶의 결과로 드러나는 심리적 만족이고, 그 삶에서 자유를 획득하는 일은 행복의 조건이다. 즉 자유롭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 우리는 육체와 의식이 모두 자유로울 때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문화를 만들고 문명을 이룩하면서부터 행복이라는 꿈을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행복이란 단지 물질적 기초에서 충족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 만족에서 이루어지는 정신활동이기 때문이다. 경쟁은 문명을 추동하고 발전시켜왔으며 물질적 만족을 충족시켰지만 행복의 관점에서 경쟁은 인간을 타락시킨다. 순수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인간을 순수로부터 꿈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그 요인을 박지영은 '지각'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우리는 지각으로 우리 자신의 삶의 좌표를 계산하고 미래를 설계한다. 인간은 지각으로 상대를 속이고 이용하며 환경을 변화시켜왔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간은 더욱 행복해졌는가? ● 박지영은 행복에 다가서기 위해 인간의 지각으로 상징되는 머리를 거세시켰다. 머리가 거세됨으로써 문명도 거세되고, 속임수도 거세된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살아가기. 아니면 가슴으로 살아가기보다 본성으로 살아가기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매순간 환경의 변화에 대한 반응으로 본성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삶. 이는 오래전부터 인간이 꿈꿔왔던 이상향이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기 전의 삶의 행태다. 자연에 순응하며 자신의 인위적 수요로부터 환경을 변화시키지 않는 태도야 말로 인간을 행복으로 이끄는 길로 여기는 것이다. 머리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무위(無爲)'를 주장했던 노자처럼, '자연(自然)'으로 돌아갈 것을 역설했던 장자처럼 인위적 의식을 거세함으로써 인간다움의 본성을 돌아가고자 하는 그의 지향이 담겨있다. ● 그러나 이러한 이상적 세계는 원시공동체 사회가 아니고서야 현실의 세계에서 실현 불가능한 세계이다. 그러한 점에서 박지영의 작업은 꿈의 세계이고 몽환의 세계이다. 시간과 공간이 뒤틀리고 오직 의식만이 반영되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모든 의식이 소통되는 공간으로 드러난다. 여기에는 생물과 무생물의 구분이 없고 인간과 동물의 구별이 없고 시간의 선후도 없으며 공간의 좌우도 없다. 모든 존재는 대등하게 소통한다. 인간이 의자의 다리가 되고 구두는 의자 위에서 휴식을 취하며 연주를 듣는 청중은 식물이다. 즉 그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존재들은 모두 의식화된 개성의 소유자들이다.
산들은 리듬 속에서 춤추고 나무들은 그 산에 기대어 옹기종기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지만 박지영의 작업에서 느껴지는 최후의 메시지는 존재의 고독에 관한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며 살아간다. 인간의 의식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발전한다. 곧 사회가 개인을 양육한다. 그러나 존재의 최후의 한발은 누구의 것도 아닌 존재 개인의 것이다. 비록 우리가 사회적 삶을 살아간다 할지라도 마지막 존재의 깨우침은 개인적인 의식의 자각에서 일어난다. 박지영 작업에는 존재의 외로움과 고독의 힘이 배어있다. 함께 살아가지만 각기 다른 지향을 지닌 인간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 존재의 고독과 가슴으로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치열한 주장이 담긴 과장과 대비 속에서가 아니라 그저 툭 던지는 듯한 의식의 민멸(泯滅)과 소박한 상상의 담담한 이야기체에서 더욱 설득력을 지닌 형식으로 태어난다. 그래서 이미지 범람의 시대에 이런 소박한 모습의 형상에 더욱 애틋한 눈길이 가는지 모르겠다. ■ 김백균
Vol.20090311c | 박지영展 / PARKJIYOUNG / 朴志英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