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RPTION_흡수

정은유展 / CHUNGEUNYOU / 鄭恩有 / painting.installation   2009_0311 ▶ 2009_0317

정은유_Absorption_아크릴 케이스, 의류_240×60×60cm_2009

초대일시_2009_0311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토포하우스_TOPOHAUS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4번지 Tel. +82.2.734.7555 www.topohaus.com

기억의 흡수 ● 회화가 감각의 영역이 아닌 인식의 영역으로 시각 예술의 차원 이동을 가능케 한 뒤, 캔버스 속에 공간적, 정신적 깊이를 부여하는 문제는 회화의 지속적인 화두였다. 한 작가의 움직임 속에 탄생한 선과 형체는 우리가 머물고 있는 3차원의 마지막 끝자락이자, 또 다른 인식의 차원으로 넘어서는 흔들림이다. 그래서 회화는 하나의 막다른 현실의 벽이라기보다는 필름처럼 경계를 지니면서도 다른 차원을 공유하고 있는 투명한 막과도 같은 것이 된다. ● 이 투명한 막 위에 작가는 지금까지 축적된 자신의 수양을 때론 은유적으로 때론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회화에 있어 진화라고 하는 것은 독창성을 가지고 기존의 표현 방식에 얇은 변이를 덧붙이는 것이다. 어떤 이는 농담처럼, 어떤 이는 진담처럼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 그래서 작가가 한 장을 열게 될 때 우리는 그 막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우리의 시각적 인식 체계를 규정지은 것은 물론 원근법이다. 그리고 풍경(landscape)이다. 풍경의 개념은 알프스 산맥을 넘나들면서 생기게 되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기 전에는 몰랐던 땅의 그림들. 플랑드르 중심의 북구 르네상스와 이탈리아 중심의 남부 르네상스의 시각적인 섞임에서 새로운 퍼스펙티브가 생겨나게 되었다.

정은유_Drawing-Absorption_종이에 혼합재료_각 35×25cm_2008

북구의 다가서게끔 만드는 작은 그림들과 남부의 뒷걸음질 치게 만드는 웅장한 그림들의 차이, 자연의 풍경과 회화의 풍경의 차이, '진짜 공간'과 '버츄얼 리얼리티' 사이에서 인간은 고독한 나무처럼 서 있다. ● 역사의 흐름 속에서 회화는 그리기(drawing)와 칠하기(painting)의 혼재를 체험했고, 선(line)과 색채(color)의 역전도 경험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부터 미국으로 이어지는 회화적 혈맥은 그곳의 자본주의적인 가치체제의 경박함으로 인해 다른 성향으로 흘러간 것도 사실이다. 정신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 사이에 선 회화의 존재성, 그것에 대한 유니크한 조롱을 우린 마르셀 뒤샹의 작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 이런 세계사적인 흐름 속에서 미술의 움직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성격, 그리고 회화의 절대적 가치 등에 대해 고민한 작가가 정은유이다. 장르간이든, 재료간이든, 형식간이든 혼성적인 과정 속에서의 순수성이라는 '회화성'을 고민해왔던 그는 과거 다소 전통적이라 느껴질 수 있는 화풍으로 존재의 고독과 심연을 파헤치는 작업을 계속해 왔었다. 주로 고깃덩어리 같은 인간의 육체 속에 숨겨져 있는 정신성을 끄집어내기 위해 치열한 몸싸움을 벌였다. 굵고 거친 검은 선들로 묘사된 웅크린 육체들은 마치 벽을 긁는 수형자의 절규처럼 처절하게 자신의 감정을 화면 밖으로 표출시켰다.

정은유_Proximity and Distance_종이에 혼합재료, 아크릴케이스, 의류, 나무_187×60×60cm_2009

고독한 내면을 강렬한 색채와 꿈틀거리는 붓질로, 다소 과장되었지만 진실성 있게 표현했던 반 고흐의 자화상 같은 풍경을 정은유도 동경했다. 가장 육적이면서도 가장 정신적인 경지의 화면을 추구한 것이다. ● 처음부터 정은유가 가졌던 회화의 존재 이유는 이중성과 양면성이라는 인간 존재의 문제였다. 인간을 획일화된 사고의 틀에 가둘 수 없음을 그는 알고 있었고, 그 배경엔 상대주의적 가치관에 입각한 불교적 사유의 생성론과 연관 있다. 모든 우연과 필연의 상관성, 모든 극단들의 융화와 원융에 있어서 대립되는 모든 것들은 이중성과 양면성 속에서 뒤섞이고 겹쳐진다. 그것이 안으로든 바깥으로든 우리의 존재가 이 현실의 차원에서 숙명처럼 부여받은 삶의 조건인 것이다. 정은유는 이런 대상들과의 관계 속에서 명백함이라는 개념의 모순됨을 찾아내고, 그 관계들을 좀 더 역동적인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세계를 열린 구조의 차원으로 그려내고 싶어 한다. ● 이번 전시에 등장하는 원형캔버스는 바로 명백함을 추구하는 고정적인 시선―회화에서 본다면 원근법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세계를 고정될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하고 캔버스를 돌려가면서 그린 것이다.

정은유_Proximity and Distance_종이에 혼합재료, 아크릴케이스, 의류, 나무_187×60×60cm_2009

그것은 원심력의 그림이 아니라 구심력의 그림이다. 마티스의 드로잉「과일과 중국 화병이 있는 정물」을 자신의 시공간으로 대입시켜 그린 작품이나,「연장될 수 있는 점들이 사물과 있다」,「생각-공유」같은 작품들은 시간과 공간의 확장과 전이 그리고 그로 인한 상호간의 흡수를 보여준다. ● 과거 그가 아크릴판의 형상과 캔버스 위의 형상이 겹쳐지는 그 틈의 공간을 통해 겉과 속, 안과 밖의 상관성과 불확정성을 주된 테마로 삼았다면, 이번엔 캔버스를 돌려가면서 그린 형태의 해체를 통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섞임'이 만들어 놓는 구심력적인 파장, 그리고 그로 인한 시공간의 흡수를 지향하고 있다. ● 정은유의 외할머니가 지은 옛 한복들은 하나의 층을 이루며 색채의 기둥이 되어간다. 외할머니의 손길이 닿던 시간, 그것을 입고 다닌 어머니의 공간이 삼대의 맥이 되어 그에게로 흘러내린다. 그 옷 속에 배었던 그 시절의 공기와 지금 전시장의 공기가 서로 흡수되며 시공간을 초월한 관계를 공유하려 한다. 색채의 층과 시간의 결이 오래되고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를 상기시켜준다. ● 정은유에게 있어서 이번 전시는 과거의 회화적 방식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공간이해로 방향전환하려는 터닝포인트와도 같은 것이다. 다소 직설적이거나 장치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회화의 물성을 지키면서 정신적이고 개념적인 무언가를 덧입히고 새겨 넣으려는 그의 시도는 잔잔한 파문의 오래된 벽지 문양처럼 사그라들다가 빛난다. ■ 이건수

정은유_Continuation of Still Life with Fruits and Chinese Vase at the YeonNam Atelier_ 플렉시 유리,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목탄_212×212×7.2cm_2009

지난 십여 년 동안 존재의 본질에 접근하고자 이중성과 양면성이란 주제를 가지고 인간에 대한 탐구를 통해서 거친 붓터치로 내면적, 감성적 표현에 중점을 뒀었다. 양면성에 중심을 둔 나의 작품들은 대상들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고 개별 대상들 간의 결합 방식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이 대상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단순한 대상이 될 수도 있다. 확연히 하나의 뜻으로 해석되는 '명백성'에 대립하는 입장을 표명하고 싶었다. 모든 사건들의 전체 인상은 관찰 방식과 관찰 시각에 좌우된다. 즉, 한 사태의 전체 인상은 관찰자의 기분과 감정 상태에 따라 변화된다. 모든 사건을 나는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하지만 결국은 내 입장에서 관찰할 것이며 다른 감상자들은 또 다르게 자기 입장에서 다른 시각으로 볼 것이다.

정은유_Points that can be continued are with objects_ 플렉시 유리,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silicate chalks_212×212×7.2cm_2009

대상들 사이의 관계나 대상들 간의 결합 방식을 단순명료하면서도 다양한 각도로 응시하고자 노력한다. 원은 흔히 우주의 근본원리, 삼라만상, 한 가지, 단순함, 다양한 각도로 보는 것에 어려움이 있는 조형적 의미의 원 등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원은 고정되어있지 않은 것으로도, 그러나 이미 고정되어있는 것일 수도 있다. 원을 돌려가며 보여지는 대상이나 보이는 사물을, 또는 예전에 그랬듯이 나의 뇌리 속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종잡을 수 없는 상념들을 분리하고 해체하여 작업해 갔다. 나는 한자리에 멈춰 서서 한 공간을 그리고 종이를 돌려 또다시 다른 한 공간을 그리며 나도 돌고, 종이를 돌려 또다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여러 차례 작업했다. 인체에 대한 작업에선 인체의 골격이 흘러가는 데로 선을 끊어지지 않게 하나로 연결시켜 표현했으나 근래 작업은 분리와 해체에 중심을 두고 반복을 거듭하며 자연스런 선을 간략하면서도 짧게 끊어서 연결시키고자 했다. 이렇듯 반복을 거듭해가며 지속적으로 원을 돌려가며 작업하다보니 불현듯 또다시 현실과 이상이란 두 가지 현상과 관계의 모호한 경계를 발견하기도 한다.

정은유_Linseed and Terebene_종이에 연필, 과슈_35×35cm_2008

여러 가지 가치에 대한, 특히 예술의 가치에 대한 많은 고민을 한다. 다소 엉뚱한 면이 있겠지만 영화 『No Country for Old Men』에선 의역을 하던 직역을 하던 아니면 추상적인 의미이던 정말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었다. 그렇다면 예술을 위한 예술가는 있는가. 다분히 주관적 입장일 수도 있겠지만 요즈음 예술의 가치가 무엇인지 예술가의 가치는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것은 포장되어 있다. 그 어떠한 것도 포장되어 있지 않은 것이 없는 듯하다. 심지어 예술조차도. ●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오십여 년 전에 딸을 시집보낼 무렵 그 당시 시대적 상황이 그렇듯이 옷가지를 손수 장만하셨는데 그 자태가 여느 예술가 못지않다. 바느질의 손길이 녹아난, 차곡차곡 한땀한땀 엮어간 정성이 고스란히 배어나와 시집가는 딸을 위해 정성스레 준비한 옷가지는 모녀간의 관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또는 보이는 '작품'이다. 모녀관계를 오십여 년이란 세월이 홅고 지나간 흔적의 저고리, 치마, 속곳 등 옷가지들은 그 어느 것보다도 순수한 가치를 지니고 포장이란 단어로 절대 형용할 수 없는 진정한 예술작품이다.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옷을 만들며 희로애락을 나누며 현실과 이상적인 미래에 대해 논하고 시공간을 초월한 그들만의 관계를 공유한 것을 나는 진정한 가치의 작품으로 승화시키고 싶다. ● 작업실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신발들의 주인은 누구이며, 신발의 가치는 어떨까 그 어느 것도 예술이 될 수 없는 대상은 없다. ■ 정은유

Vol.20090311b | 정은유展 / CHUNGEUNYOU / 鄭恩有 / painting.installation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