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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9_0307_토요일_06:00pm
관람시간 / 01:00pm~09:00pm
예술공간 헛_HUT 서울 마포구 서교동 368-13번지 Tel. +82.2.6401.3613 club.cyworld.com/hut368 www.hut368.com
나는 망각을 기억하는 것을 잊어버렸다"는 "나는 기억을 기억하는 것을 기억한다"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Luc Jeand'heur,『나는 망각을 기억하는 것을 잊어버렸다(잠에서 깨어난 괴물)』) ● '패닉룸'은 가상적이지만 현실적인 위험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추상적인 공간이다. 시간적으로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위험을 인지하고 그것에 대해 대비하기 위한 일종의 안전장치이다. 이 방어적인 공간 안에서 사건은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같은 제목의 영화에서처럼 '패닉룸'은 오히려 또 다른 패닉을 불러들인다. 아니 불러들일 것이다. 그 때 발생하는 패닉은 치료받아야 하는 심리적인 장애상태가 아니다. 반대로 반복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성찰의 순간이거나, 발생한 균열을 인지할 수 있는 순간이다.
현장에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도착한다. 징후의 냄새가 물씬 나기는 하지만, 아무 일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오직 공범자나 우연한 목격자만이 그 순간에 위치할 수 있다. 작업은 범죄현장을 기록한 흔적들, 정보라는 이름으로 인터넷에서 광범위하게 유통되는 이미지를 통해 만들어진다. 유동적인 이미지의 소재들은 마치 영화의 편집작업이나 몽타쥬, 스토리보드를 위한 재료처럼 다루어진다. 그 안에서 단서는 부분적인 진실 외에는 지니지 못한다. 배치되고 편집되기 이전에는 다듬어지지 않은 암석처럼 어떤 것도 될 수 있다. 수집된 이미지들의 복잡다단한 반추와 재조립을 통해, 캔버스에 기록될 수 있는 것은 역사적인 과거의 흔적이나 진실의 기록이 아니라, 오히려 불확실할 것이라고 예측되지만 분명해 보이는 미래의 흔적이다. 그래서 이미지 안에는 구체적인 사건의 정황이나 피해자의 참혹한 모습들은 존재할 수 없다. 작업은 그것이 이루어지기 이전의 어떤 지점을 항상 가리킨다. 반대로 역사적인 구체성은 이미지에서 도려내지고 해체된다. 구체적인 알리바이 대신 뭉뚱그려 칠해진 일상처럼 그렇게 불안정한 흔적이 조용히 내려 앉아 있다. 그것은 완전히 치료되는 류의 염증이 아니라, 잠복해 있는 결핵처럼 항시 내재한 시한폭탄 같은 것이다. 징후를 읽는 더듬이는 항상 켜져 있어야 한다.
범죄현장은 지식에 의한 공범자와 같고 행위 속에 공범자를 내포하고 있는 기괴한 총합적 영역이다.(피터 슬로터다이크,『예술작품의 시간성과 범죄의 시간』) ● 범죄현장에는 항상 행위의 주체로서의 인물이 존재한다. 우리는 쉽게 그들을 괴물로 지칭한다. 하지만, 문제는 항상 단순하지 않다. 수많은 추리소설과 추리드라마는 단서에 의존해 괴물을 찾는데 전력투구를 하는 탐정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괴물이 그들에 의해 잡혔을 때, 안도감과 쾌감이 관객에게 제공된다. 원하든 원치 않든, 미디어와 정보를 통해 현재 우리는 피해자, 탐정, 우연한 목격자로서의 입장뿐 아니라, 우리가 지칭하는 괴물과 공범자의 입장을 한 몸에 지니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각기 다른 입장의 수많은 정당성들을 한 몸에 지니고 있다. 무의식적인 즐김 속에서 그것들 사이에 큰 균열이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했다. 망각의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에 등장하는 '니나'처럼.
망각을 일깨우는 것은 극단적인 구체성이 아니라, 데이빗 린치의 이미지 파편처럼 오히려 복잡다단한 순간의 직감 같은 것들이다. 이제 이미지를 안다는 환상에서 빠져 나올 때이다. 단지 이미지들 사이의 관계성을 읽을 수 있거나, 혹은 이미지들의 관계성을 읽는 자와의 관계성만을 읽을 수 있다. 그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판단할 수 없다. 관계성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단지 맥락의 정당성에 대한 주장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괴물, 추적자, 희생자, 공범자, 목격자의 다층적인 입장들을 동시에 인지할 수 있다는 전제 안에서 작가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새로운 맥락으로 이미지들 사이의 관계성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목격자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공범자들의 묵인 속에 범죄현장에서 지워져 버린 수많은 '죽음의 기억'을 망각의 늪에서 끌어내는 것이다. ■ 오용석
Vol.20090307e | 오용석展 / OHYONGSEOK / 吳庸碩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