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9_0304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갤러리 쿤스트라움 KUNSTRAUM GALLERY 서울 종로구 팔판동 61-1번지 Tel. +82.2.730.2884 www.kunstraum.co.kr
구조화되는 차이의 장 ● '빈 방의 두 기둥'이라는 부제로 열리는 안태현의 전시는 반투명 블록들 안팎을 떠도는 텍스트들로 인하여 명상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글자가 새겨진 투명테이프가 투명 벽돌을 이루고 이것이 모여 다시 기둥이 된다. 진짜 기둥처럼 연출된 작품 「이성적 진실과 감성적 사실」(2009)은 제목 그대로 이성과 감성 사이에 놓인 차이에 주목한다. 두 개의 대조되는 기둥에는 '사랑'처럼, 흔하게 사용하는 일상어의 사전적 정의와 실제의 경험 및 느낌과의 괴리를 대조시킨다. 벽돌이 가지는 단위 구조는 복잡한 하이퍼텍스트로 연결되어, 사전적 정의는 꼬리를 무는 해석의 순환 고리를 형성한다. 투명한 집합적 구조들은 보편적인 정의와 사적인 경험 사이에 벌어진 간극들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양자는 모두 텍스트로 이루어져 있으며, 떠받치는 기둥이 상징하듯 텍스트들은 인간 사회를 이루는 기본적인 구조를 이룬다. 벽에 설치하는 작품들 역시 투명 아크릴 박스에 위에 문자가 새겨진 투명 테이프로 붙이는 방식이다. ● 박스는 여러 형태로 조합되면서 증식하는 느낌을 준다. 투명한 재료들에 실린 텍스트들은 그 중층적 구조에 의해 의미의 교란이 일어나며, 의미로부터 탈각된 기표들은 명확한 좌표가 상실된 공간에 떠돈다. 그것들은 확고하게 정초되지 않은 의미의 특질을 표현한다. 글자는 거꾸로 배열되거나 좌우가 바뀌어 보이는 등, 그자체로도 읽기 힘들게 되어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개념적 언어에 기대되는 바의 확실성을 의문시한다. 2007년에 발표했던 반투명 벽처럼, 벽과 기둥을 이루는 건축적 구조물들은 실재와 가상의 중간에 존재한다. 그의 작품이 놓이거나 설치된 공간은 채워진 듯 하면도 비어있다. 안태현이 그동안 작업에 주로 사용하는 재료들의 성격 자체가 확고한 물질성을 점유하는 것들과 거리가 있다. 그는 흔히 쓰고 버리는 재료들을 사용하며 그것의 본래 용도를 변경한다. 이 전시에서 주로 사용하는 아크릴 박스와 투명 테이프 외에도, 풍선, 파라핀, 빨대, 치약, 글루건, OH 필름 등이 드로잉이나 설치작업의 재료로 사용되었다.
작품 「relationship engraving」(2008)에서 단위 구조는 내부로 증식한다. 아크릴 박스에 펜으로 드로잉하고 그것을 음각으로 판 이 구조물은 관객이 가까이 가면 센서로 조명이 비치면서 음각된 도면화가 드러난다. 순차적으로 작아지는 아크릴 박스들이 겹쳐서 자신을 둘러싼 인간관계를 분석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추상적인 거리를 실제로 측량이 가능한 수치들의 모임으로 단순화시켜, 사람들 간의 거리를 cm 단위로 환원하고 사람 사이의 관계와 친밀도를 화살표로 도식화했다. 이니셜로만 표시된 사람들은 익명적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위치와 연결 상태이지 개성 같은 특별한 자기 동일성이 아니다. 출발과 끝은 만나지만 투명한 겹 구조를 복잡하게 잇는 선들은 투명 벽돌 위에 새겨진 글자와 마찬가지로 무늬처럼 보일 뿐이다. 안태현의 작품에서 텍스트로부터 출발한 복잡한 관계망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공간, 인간과 사물 등의 관계로 확장되곤 한다. 텍스트 작업에서 확고한 의미보다 파생된 의미들을 부각시키듯, 구조적 작업에서도 실체보다는 과정이나 관계성에 주목한다. ● 벽이나 기둥처럼 공간적으로 확장하는 작품과 구조 내부로 파고드는 작품들에서 아크릴이나 테이프 같은 투명한 재료들은 중층적 구조를 강조함과 동시에, 복잡한 의미의 그물망을 형성한다. 이 그물망들은 세계의 실증주의적 자명성을 해체한다. 반투명 재료들은 기표와 경험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와 틈을 표현하는데 적합한 매체이다. 여기에서는 확고한 존재가 아니라, 과정이나 추이가 새로운 존재론의 바탕이 된다. 어른거리는 반투명 구조물 속에 기원과 중심은 모호해 진다. 특히 하이퍼텍스트처럼 꼬리를 무는 해석 행위는 개념의 기초를 닦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안태현의 작품에서 텍스트 내부에는 수많은 틈들이 존재하고, 이 틈에서 또 다른 해석들이 파생된다. 그것은 실증적이고 확실한 것을 추구하는 행위-가령 개념어의 과학적 정의 같은 것-에 내포된 분열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분열성은 주체에게 명확한 사물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는 언어의 투명성을 의문시한다. 대상과 의미, 기의와 기표의 연속적 분열을 예시하는 현대 언어학 이론이 강조하는 것도 언어의 불투명성이다.
안태현의 중층적 작품들은 언어를 구성하는 차이의 체계를 보여주며, 그것 자체가 주체와 대상을 형성한다. 여기에서 언어는 세계를 비추는 것(모방)이 아니라, 세계를 구성한다. 많은 작품에서 보이는 떠도는 기표들은 언어의 유동성이다. 벽돌 같은 모티브는 시작도 중심도 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단위구조를 상징하며, 테이프 같은 모티브는 자르기와 결합이라는 방식을 가지는데, 이 모두는 텍스트의 특징이다. 현대의 텍스트 이론에 의하면, 텍스트를 파악하는 것은 진리들을 찾아내는 논리적인 진행이 아니라, 의미의 구축화 과정이다. 텍스트는 네트워크처럼 연속적인 결합을 통해 확장된다. 바르트에 의하면 텍스트는 사전 같은 닫혀진 정의적인 힘이 없고 무한한 구조가 있으며, 복수 언어적이다. 텍스트란 코드들의 무한한 역동성으로, 코드들의 유희는 다양한 의미를 가능하게 한다. 또한 텍스트는 선행 언설들로 짜여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문화의 모든 것과 관련된다. 텍스트는 단선적인 논리와 의미를 제시하지 않는다. ● 텍스트들은 서로를 표현하기 때문에 지식의 텍스트와 허구의 텍스트 사이의 차이는 사라진다. 실증주의의 기저에 놓인 진리와 오류, 혹은 과학과 우화 사이의 대립은 결국 피상적이다. 과학 내부에도 우화가 있으며, 질서란 무질서의 특별한 예이다. 텍스트는 원초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고 '불완전한 원초적인 것을 대신하는 보충'(데리다)만이 있을 따름이다. 서술은 더 이상 선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표면이 되고, 작품의 통일성과 의미는 표면을 확장하는 데서 나타나는 것이지, 표면 밑에 놓여 있는 유일한 원리를 발견하는데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작품 「이성적 진실과 감성적 사실」에서 유일성과 확고함을 지향하는 사전적 정의는 소격된다. 그가 두 개의 기둥으로 대조시킨 것은 언어와 실제 사이에 존재하는 불연속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 속 다양한 장치들은 확실한 것을 반영하는 것이나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기호들로 된 망을 엮는 과정이다. 망은 그 느슨한 구조를 통해 채우기보다는 비우기를 지향한다. 안태현의 작품에서 언어는 채워질수록 비워지는 역설이 있다.
언어는 바르트가 비유한대로 까도까도 알맹이가 없는 양파와도 같다. 만약 지금까지 텍스트를 씨를 가진 과일 종류로 제시하여 과육은 형태가 되고 씨는 근본이 되었다면, 이제 텍스트는 양파와도 같다. 무한한 겉껍데기들을 제외하면 결국에는 어떤 핵심도 비밀도 불변의 원칙도 없다. 표면들이 겹쳐있는 분산된 공간을 보여주는 안태현의 작품은 여러 목소리와 차이의 흔적이 남아있다. 양파 같은 구조를 가진 「relationship engraving」은 그 메카닉한 형태의 차원에서는 네트워크의 비유로 확장될 수 있다. A.L. 바라바시는 『링크』에서 '모든 것은 모든 것에 잇닿아 있다'는 보르헤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경제, 세포, 인터넷 등과 같이 매우 상이한 시스템들 간의 놀라운 유사성을 지적한다. 화살표의 연결망으로 이루어진 「relationship engraving」은 그물망적Web-based 시각을 제시한다. 그물망은 기하학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동적 시스템을 가진다. 어느 하나로 환원되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구조들은 우리 주변의 복잡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가 된다.
작품 「relationship engraving」에서 이니셜로 표기된 사람들 사이에는 그물망, 즉 링크들에 의해 연결된 노드들이 생겨난다. 이 시스템 속의 개체들은 전체 네트워크의 한 부분들이다. 이처럼 고도로 상호 연결된 삶의 그물망으로부터 그 어떤 것도 배제되어 있지 않다. 링크의 갯수가 웹적인 구조 속에서 가시성을 부여한다. 바라바시는 웹의 구조가 연결선 수가 매우 많은 극소수의 허브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허브는 복잡하고 상호 연결된 세계의 보편적 구성요소이다. 허브는 전체 네트워크의 구조를 지배하며, 그것을 좁은 세상으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주체는 특별한 위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시스템 속의 익명적 개체들은 보다 효과적인 링크를 획득하려고 할 뿐이다. 그것은 단지 망 속에서의 위치 문제이다. 마네킹을 모델로 한 2007년의 한 작품처럼, 안태현의 작품 속 인간의 위상은 투명인간 같다. 중앙에 집중되어 있는 구조가 아니라 단계적으로 집중화되어 있는 계층적 구조를 가지는 그의 작품은 구성요소들 사이에 상호연관성을 기술하는 방법이다. ● 노드와 링크는 복잡계의 상호의존성을 기술한다. 화살표로 표시된 링크들은 상호간의 결속과 속도를 보여준다. 안태현의 작품은 어떤 실체가 아니라 시스템의 구성과 작동원리를 나타내며, 예술작품은 물론 과학기술의 확실성조차 의문시한다. 다나 해러웨이는 위성 네트워크의 예를 들면서, 요즘의 사실들은 빛 위를 달린다고 강조한다. 객관성의 문제는 언제나 이미 부재한 지시물, 지연된 기의들, 분열된 주체들, 기표들의 끝없는 유희에 의해 해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과학은 수사학적이며 관련된 행동가들의 설득이다. 지식은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 과학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힘(권력)이 응축된 것이다. 안태현의 작품은 텍스트화 되고 코드화된 세계 속에서의 역학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합리적 지식으로 가장하고 완전하고 투명한 소통을 꿈꾸는 것은 초월적 태도로서 이제는 더 이상 지지될 수 없는 관점이다. 텍스트로 이루어진 그의 작품들은 예술은 물론 과학조차 존재가 아닌 분열의 이미지가 우세함을 알려준다. ■ 이선영
Vol.20090302e | 안태현展 / AHNTAEHYUN / 安台炫 / installation.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