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9_0210_화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K_Gallery K 서울 서초구 서초동 1463-10번지 Tel. +82.2.2055.1410 www.galleryk.org
캔디맨, 뒤범벅된 욕망과 아이러니 ● 리얼리티를 밀어붙이다 보면 불현듯 리얼리티는 박제가 되고, 그 리얼리티를 구성해주던 현실이 낯설고 이질적이고 생경하게 변질되는 지점이 있다. 박종필의 회화는 바로 이 지점, 즉 리얼리티와 하이포리얼리티, 현실과 비 혹은 초 현실, 진짜와 가짜의 경계에 대한 인식과 강하게 연동돼 있다. ● 분명 현실에서 시작한 것이지만, 어느 지점에선가 문득 현실을 넘어서버린 것이다. 현실보다 더 생생한 현실, 현실보다 더 생생하게 현실을 구현해주는 이 기시감(데자뷰)이 바로 시뮬라시옹이고 시뮬라크르이다. 실제로는 없으면서 있는 양 하는, 진짜를 완벽하게 흉내 낸 가짜들의 천국이 개시된 것이다. 현대인은 이 가짜들의 세계에 충분히 길들여져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진짜보다 더 친근함을 느끼기조차 한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구조화된 도시 속에 자리한 인공동굴이나 인공폭포가 현대인이 사실상 상실한 계절감각을 일깨워주는가 하면, 생화보다 더 생화 같은 조화가 자연에 대한 상실감을 위무해준다. ● 모조는 이처럼 자연을 흉내 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밀랍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냉면과 탕수육이, 케이크와 크라상(크루아상)이 식당과 빵집의 쇼윈도를 장식하고 있는 장면은 이제 일상적인 풍경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그런가하면 작가의 경우에서처럼 이 모조 그대로를 그림으로 옮겨다 놓으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진짜와 비교해 볼 수 있는 문맥이 사라지면서, 진짜와 가짜를 가름하게 해주는 단서가 덩달아 증발해버리기 때문이다. 사각의 프레임 속에 갇힌 너무나 생생한 이 이미지는 진짜일까 가짜일까. 그 이미지는 진짜를 모델로 한 것(원본에 연유한 가상)일까 아니면 모조를 모델로 한 것(가상의 가상)일까. 여기서 우리는 진짜와 가짜를 가름하는 경계에 대한 인식이 문맥과, 이를테면 그 자체를 타자와 비교해 볼 수 있는 문맥과 강하게 연동돼 있음을 알 수 있다. 해서, 문맥이 사라지면 단서도 경계도 경계에 대한 인식도 덩달아 사라져버린다. 이렇게 해서 모조는 마침내 그 자체의 자족적인 존재성을 획득할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실제에게만 바쳐졌던 진정성과 경외감을 가로채기에 이른 것이다.
나아가 대개 가짜는 진짜보다 더 매력적이고 유혹적이다. 그것이 진짜의 생명력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진짜는 그 속에 내장된 생명력으로 인해 부패하지만, 향기(생명)를 결여한 조화처럼 가짜는 가장 찬란한 청춘 그대로 영원히 멈춰서 있기 때문이다. 그 지점, 그 성질이 바로 이미지(모조와 가상)의 힘이며 유혹이며 매력이며 함정이며 딜레마다. 그리고 그 자체(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기시감과 삶의 정점에 대한, 진정한 삶에 대한 약속)가 이미지의 정치학과 강하게 연동돼 있음은 알려진 바와 같다. ● 박종필의 그림은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은 진짜와 가짜를 가름하게 해주는 경계에 대한 인식에 의해 추동되며, 동시에 그 경계가 알려진 것처럼 그렇게 뚜렷하지만은 않다는, 이른바 경계에 대한 의심에 연동돼 있다. 대략 케이크 시리즈, 휴먼캔디 시리즈, 휴먼캔들 시리즈, 그리고 근작에서 새로이 시도되고 있는 가짜풍경 시리즈를 아우르는 그의 그림들을 보면 하나같이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극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말하자면 그의 그림은 소위 네오팝의 경향성과 함께 주로 젊은 신진작가 층을 중심으로 최근 들어 뚜렷한 트랜드를 형성하고 있는 소위 하이포리얼리즘 경향의 한 부류처럼 보인다. 그러나 범상치 않은 제목(이를테면 휴먼캔디나 휴먼캔들?)도 그렇거니와 실제 그림 역시 하이포리얼리즘 경향과의 단순한 동일시를 넘어선다. 말하자면 그가 대상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대상(가짜) 자체의 즉물성이나 즉자적 존재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며, 진짜와 가짜와의 경계(혹은 경계에 대한 인식)를 허물기 위한 것이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실적인 묘사 이면에 놓여진 일종의 그로테스크(이질감이나 이물성)를 더 잘 은폐하면서 동시에 더 잘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이를 통해 말하자면 일종의 그로테스크 리얼리티라고 부를 만한 미학 상의 한 지점을, 그 속성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 이를테면 그의 그림은 그저 평범한 케이크처럼 보인다. 파인애플과 키위, 딸기와 포도, 그리고 오렌지조각 등 풍부한 토핑과 시럽이 곁들여진 케이크 조각은 한눈에도 먹음직스럽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체리 같기도 하고 캔디 같기도 한 반투명의 조각이 보이는데, 사탕으로 만들어진 캔디맨이다. 그 캔디맨의 머리가 녹아내려 시럽과 함께 뒤범벅이 되면서 기묘한 감정을 자아낸다. 그 빨간 즙액이 시럽의 색채와 섞이면서 케이크는 문득 피의 제단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사실적인 묘사에 의해 지지되는 리얼리티와, 케이크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물질의 출현에 연유한 그로테스크가 결합된 이른바 그로테스크리얼리티가 열리는 것이다. 휴먼캔들 역시 그 경우가 크게 다르지 않다. 그저 평범하게만 보이는 형형색색의 양초들이 저마다 불 밝히고 있는 정경이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해주는 동화 속 정경처럼 보이고, 따뜻하고 부드럽고 우호적인 온기로 인해 특히 겨울의 포근한 솜이불 같은 정취를 더해주는 세련된 빵집 광고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양초 역시 알고 보면 사람의 두상이거나 몸체로 조형된 것들이며, 심지어는 녹아내려 응고된 덩어리가 핏덩이의 태아를 연상시키기조차 한다.
누군가의 입 속에 넣어져 그의 미각을 충족시켜주는 동안 정작 저 자신은 존재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 캔디맨이나, 누군가의 어둠을 대신 불 밝혀주는 동안 정작 저 자신은 녹아내려 대기 중에 산화되고 마는 캔들맨의 존재를 얘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마도 모르긴 해도 세상에는 제가 먹는 것이 사실은 누군가의 욕망이며 소망이며 존재를 가로챈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거나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현대판 식인종들이다. 하지만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단순한 사회학적 인식론에 머물지 않는다. ● 정작 작가의 관심은 이보다는 더 심층적인 부분, 말하자면 식인풍습 즉 카니발리즘이 열어 보이는 낯설고 이질적이고 생경한 어떤 비전을 겨냥하고 있는 것 같다. 말하자면 케이크와 인신공양이, 시럽과 제물이 흘리는 피가, 만찬과 토사물이, 양초의 우호적인 불빛과 핏덩어리 태아가, 욕망과 금욕과 퇴폐가, 삶과 죽음이,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그 경계를 허물고 충돌하며 삼투되는 어떤 지점을 예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은 얼핏 보면 그 소재며 기법이 크리쉐를 연상시킬 만큼 뻔하고 평범한 것들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결코 평범할 수 없는 그림들인데, 말하자면 그 속에 일종의 낯설음을 내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평범한 것, 익숙한 것, 뻔한 것이 그 이면에 숨기고 있는 낯설음, 이질감, 생경함은 실은 캐니와 언캐니에 대한 인식에 연유한 것이다. 즉 낯 설은 것은 그저 낯 설기만한 것이 아니라, 원래 친숙한 것이 낯설게 변질된 것이라는. 주지하다시피 프로이드는 이로부터 공포와 두려움을 도출해낸다. 즉 너무나 친근한 것이어서 간과하고 있던 것이 그 속에 내장하고 있던 이물성과 이질성, 괴물성과 타자성을 드러내는 순간에 공포가 출현한다고 본 것이다. 이는 경계에 대한 인식이 사실은 불분명하다는 것으로까지 나아간다. 즉 친숙한 것은 진작부터 그 속에 낯선 것을 내장하고 있었고, 낯선 것은 원래는 친숙한 것이었다.
케이크 속에 인신공양이, 인신공양 속에 케이크가, 시럽 속에 피가, 피 속에 시럽이, 만찬 속에 토사물이, 토사물 속에 만찬이 이미 예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양가성이다. 그 속에 독을 내장하고 있는 묘약임으로 인해 모든 언술(특히 문자 형식의)의 이중성을 의미하는 파르마콘(parmacon)과도 통하는, 양가성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경계는 다름 아닌 인식론의 산물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인식론의 바깥에서 보면 모든 경계는 불분명해지고, 나아가 지워져버리고 만다. ● 작가는 이처럼 양가성이나 탈경계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뒤범벅된 욕망을 표상하는 한편, 그 욕망으로 하여금 모든 경계의 지점들을 가로지르며 횡단하게 하고, 이로써 친근한 것과 낯선 것, 아름다운 것과 기괴한 것, 미각(미감)을 자극하는 것과 역겨운 것, 일상적인 것과 타자적인 것이 충돌하고 삼투되는 지점을, 이를테면 사물과 세계와 대상에 내장된 아이러니의 실체를 드러낸다. 이를 통해 무엇보다도 경계에 대한 인식론적 관성을 심각하게 재고하게끔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 고충환
Vol.20090210b | 박종필展 / PARKJONGPIL / 朴鍾弼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