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종이부인

정종미展 / JUNGJONGMEE / 鄭種美 / painting   2009_0206 ▶ 2009_0301 / 월요일 휴관

정종미_황진이_한지, 비단, 모시, 안료, 염료, 콩즙_193.5×520cm_2008_부분

초대일시_2009_0206_금요일_05:00pm

금호미술관 초대展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금호미술관 KUMHO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사간동 78번지 Tel. +82.2.720.5114 www.kumhomuseum.com

정종미의 "종이 부인", 종이에서 태어나 종이 옷을 입다.-I. "종이 부인" ● "유화부인, 허황후, 선덕여왕, 신사임당, 허난설헌, 황진이, 논개, 매창, 명성황후, 유관순, 나혜석". 이들은 기원전 1세기부터 20세기 전반기 사이에 살았고 역사서에 기록된 소수의 여인들 중의 일부로서 정종미가 이번 개인전에서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이 여인들은 이번 전시를 통해서 "역사 속의 종이 부인"이라는 이름의 기념비적인 모습으로 오늘의 관객 앞에 부활하게 되었다.

정종미_황진이_한지, 비단, 모시, 안료, 염료, 콩즙_193.5×520cm_2008

이번 전시 제목인 "역사 속의 종이 부인"은 정종미가 1994년부터 탐구하고 표현해 오던 주제와 소재, 작업 방식과 재료를 총체적으로 담고 있다. 그녀는 1970년대 후반 국내 대학에서 동양화를 공부하였다. 그녀가 교육을 받고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기의 학계와 화단에서는 수묵화가 한국적인 동양화를 의미했다. 한편으로는 화려한 색을 기피하던 조선의 문화를 한국적인 것으로 해석한 일본에 의해서 한국화의 특징이 왜곡됨으로써 한국화에서 색깔이 배제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수묵화에서 문인의 성격이 강조되면서 종이, 붓과 먹과 같은 그림 재료들에 있어서 그것들의 물질적 특징들은 경시된 반면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되면서 정신성 만 강조되고 고양되었다. 더욱이 1960년대 이후 문자 그대로 초고속으로 진행된 산업화를 통해 물질주의가 팽배해지면서 잃어가게 된 정신적 가치에 대한 향수가 증가하여 1970년대에 들어서는, 예를 들어 "단색조 회화"로 불리던 서양화 화단의 미술가들도 자신의 작품을 정신성의 표현이나 탐구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낳았다. 무엇보다 1986년과 1988년에 서울에서 열린 국제적인 체육행사와 1987년의 "6.29 선언" 이후 도입된 해외여행자율화와 같은 개방정책을 통해서 외국인과 외국 문화와의 접촉이 늘어나자 그것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한국인과 한국 문화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필요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눈에 띤 변화는 한지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특히 이것을 다른 나라의 문화와 우리의 것을 차별화시키는 한국적 재료로 소개하고 홍보하는 행사와 전시가 전략적으로 진행되었다. 1990년에는 "한국한지작가협회"가 결성되었고, 같은 해 말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은 한지를 전시 주제로 채택하여 70여명의 외국 작가들을 초대하여 한지로 작업하게 해 "제1회 서울국제미술제"을 개최했다.

정종미_논개_한지, 모시, 안료, 염료, 콩즙_210×630cm_2008_부분
정종미_논개_한지, 모시, 안료, 염료, 콩즙_210×630cm_2008

정종미는 1994년 뉴욕으로 가 1년간 그곳에 있는 디외 도네 종이 공방에서 수학을 하였다. 그녀가 종이를 더 이상 선을 긋기 위한 바탕재로만 바라보지 않게 되고, 우리나라 전통 회화의 바탕재, 즉 소지(素紙)가 화선지가 아니라 도침(搗砧)(여러 장의 장지를 나무방망이로 말아 다듬질 하는 것. 이를 통해 종이의 두께가 얇아지고 밀도는 높아지며 광택이 나게 되고 채색 효과도 좋아짐.) 한 장지(壯紙)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서는 종이 제작 방식을 배우고 자신이 직접 만든 종이를 사용하게 된 배경에는, 그녀가 첫 개인전을 가졌던 1991년『한국화 물성과 시대정신전』과 같은 제목의 단체전에 참가한 것을 보면, 1980년대 말 이후 국내 화단에서 일어난 종이에 대한 의식 변화와 한국적 정체성에 대한 각성도 크게 작용한 듯하다. ● 그러나 정종미의 종이의 물질성에 대한 관심이 상징적으로 '여성성'과 연결되면서 여성으로서의 작가 자신의 정체성의 탐구와 더 나아가서는 그녀 주변의 여성에 대한 관심을 거쳐 우리나라 "역사 속의 여성"의 발굴로 이어지는 "종이 부인"의 탄생에는 그녀가 머물던 1994년의 뉴욕 미술계의 분위기가 생산적인 토양으로 작용한 것 같다. 1993년 봄 뉴욕의 휘트니 미술관에서 열린 비엔날레는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컨셉으로 이루어졌었다. 주류 제도권 미술관에서 배제되었던 소수민족 출신 미술가들과 젊은 미술가들이 초대되었고, 전시 이슈는 인종주의, 성애, 젠더, 민족적 정체성과 다문화주의였다. 정종미가 디외 도네 종이 공방에서 직접 종이를 제작해 보고 세계 각국의 종이들을 비교도 하며 도서관에 가서는 종이에 관한 서적들을 탐독하면서 우리나라 종이의 차이와 우수성을 발견하던 시기 뉴욕은 민족적, 성적 소수자의 정체성 강조라는 정치적 이슈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중이었다. 종이를 제작하는 길고 힘든 육체노동의 과정과 이를 통해 만들어지는 종이의 다양한 모습과 성질을 체험하면서 작가가 발견한 것은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이 하는 '노동'의 의미였다. "은은히 품은 빛, 숨결같이 고른 표피, 체온을 받아 주는 푸근함. 하지만 다가갈수록 느껴지는 강인함, 질긴 근성."(작가, 1999년 개인전 도록, 동산방) 이러한 종이의 특징들에서 작가는 자기 자신은 물론 그녀의 어머니, 더 나아가서는 미국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는 한국 여성들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정종미는 이러한 신체적 ? 심리적 ? 문화적 체험을 "종이 부인"이라는 예술적 결과물로 승화시켰다.

정종미_명성황후_한지, 비단, 안료, 연료, 금분_210×210cm_2008

정종미의 "종이 부인"은 작가가 직접 만든 종이 위에 표현한 여자 이미지 이상이다. 종이를 도침하여 그림의 바탕을 만들고, 그 안에서 이미지가 태어나게 하기 위해 여러 차례 바르는 안료와 아교도 직접 만들며, 종이와 안료가 결합되어 종이와 '부인'이 하나가 되어 '종이 부인'이 태어나도록 콩즙도 만들어 수차례 올리고 닦는 동안 작가는 부지중에 1960년대 후반 이후 미술사가들에게 중요한 담론의 핵심인 서구의 이원론을 만나게 된다. "종이 부인"이 처음 등장하던 시기인 1995년의「종이 부인」의 여인 이미지는 종이 위에 그려졌다기 보다는 그곳에서 태어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여기에서는 배경과 형상이라는 위계적인 이분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가 브랑쿠지와 함께 좋아하는 조각가인 자코메티의 마른 인물 형상을 연상시키는 정종미의 여자 이미지는 화면을 배경으로 하면서 그것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부인"은 남성의 여성상을 재현하는 형태가 아니라 서양에서 여성적인 것으로 분류된 안료라는 물질이자 색채 자체다. 정종미는 색채가 우리나라 전통 회화에서 수묵화의 우위에 의해 축출되었으므로 그것을 부활시켜 전통을 복원하려했는데, 그 노력 역시 선적인 것을 남성적인 것으로, 반면 색채를 여성적인 것으로 분류하는 서구 미술 속의 이원론을 연상시켜 흥미롭다. ● 그러나 이 시기 정종미가 종이의 물질성을 여성적인 것으로 이해한 것은 여성주의에 대한 학문적 이해를 통해서가 아니라 한국 여성으로서의 삶이라는 작가의 사적인 경험을 통해서이다. 한편 그녀는 귀국 후 '우리 종이에 한국 여성을 담아 보려' 결심하고, 1999년에 이어 2004년 두 번째 "종이 부인전"을 개최할 때 '다음에는 역사 속의 종이부인들을 모실 계획'이라면서 '실제로 역사 속에 존재했던 여성들을 제단에 모시고 다시 한 번 존경과 경배의 자리를 마련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이를 통해서도 그녀가 우리나라의 종이를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것으로 인식하고 그것의 특징을 한국 여인의 성질과 동일시한 태도 역시 여성주의적인 의식보다는 한국인의 정체성의 탐구와 민족주의적 자부심에 더 가까운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이 정종미의 "역사 속의 종이 부인"을 서양의 여성주의자들이 역사 속에서 위대한 여성을 발굴한 것과 구별시키는 요소들이다.

정종미_미인도_한지, 염료, 들기름_160×65cm_2006

II. "역사 속의 종이 부인" ● "유화부인, 허황후, 선덕여왕, 신사임당, 허난설헌, 황진이, 논개, 매창, 명성황후, 유관순, 나혜석". 이들이 정종미가 2004년부터 '존경과 경배의 자리를 마련'하고자 계획했던 "역사 속의 종이 부인"들이다. 서양의 여성주의 미술사에서 역사 속의 '위대한 여성'을 찾아 나선 것은 1970년대 여성주의 1세대의 방식이다. 이 세대 여성주의 미술사가 린다 노흘린은 1971년 1월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가 없는가?"(Art News)라고 질문한 뒤 1976년 LACMA에서「여성미술가 1550-1950」을 개최하면서 남성중심의 역사 기술에서 생략된 여성미술가를 찾아냈다. 왜냐하면 여성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남성 미술사가들이 여성미술가의 작품을 생략한 것은 '그들 자신들의 가치와 믿음을 강화시키고 타자의 경험을 억압하는 메커니즘들 가운데 하나'(Harmony Mammod)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종미가 경배하고자 '역사 속의 부인'을 찾아내는 것은 이것을 가부장적 사회제도와 남성 중심적 역사 기술이라고 해체하는 여성주의적 실천이 아니다. 그녀가 보여주는 '부인들'의 정체성이 다양하고, 또 이들 가운데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상대적으로 여성의 자주권이 강했던 고려 시대의 인물이 없고 그 반대인 조선시대의 여인이 다수인 사실을 통해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이 '부인들'은 남성들의 상상을 초시대적으로 충족시켜주는 여성상들이다. 작가가 이 '부인들'을 기념비적인 스케일로 그리는 것은 주어진 조건에 개인적으로 투쟁했던 각 여인의 삶에 대한 작가의 개인적인 송가이다. 하지만 작가가 각 '부인'의 삶과 연결된 모티브들을 활용함으로써 관객은 각 '부인들'의 삶을 그들이 살았던 사회와 연결시킬 수 있게 된다.

정종미_미인도_모시, 광목, 안료, 염료_162×130cm_2006

고구려의 시조가 된 아들(동명성왕, 재위: BC 37~BC 19)을 낳은 유화부인과 가야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비였던 허황후(33~89)는 각각 '훌륭한' 아들과 남편을 둔 어머니와 부인으로 여성의 생물학적인 역할 때문에 칭송을 받는 여인들이다. 정종미는「유화부인」의 위용을 삼단화 방식을 이용하여 양 날개에 시종들을 동반한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시종들은 전통적인 벽화 기법으로 그려졌다. 그들의 배치와 의상은 물론 안료가 벗겨진 듯한 묘사 방식은 7세기 말~8세기 초에 제작된 일본의「다카마쓰즈카 벽화」를 임모한 듯이 보이게 한다. 이와는 달리 유화부인은 실제로 비단 옷을 '입고' 있어 실체감이 느껴진다. 유화부인과는 달리 성적 역할을 벗어난 업적을 통해서 역사 속에 기록된 선덕여왕(재위 632∼647)에 대한 숭앙은 꽃을 통해서 표현되었다. ● 조선 중기의 여인들인 허난설헌(1563~1589), 신사임당(1504~1551), 황진이와 (이)매창(1573~1610)은 모두 예술가들이다. 하지만 황진이는 그녀의 문학적 재능으로보다는 기생으로서의 성적 매력 때문에 문화 산업의 단골 소재가 되고 있고, 신사임당은 양반가문에 태어나 시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렸으며 훌륭한 아들까지도 둠으로써 이른바 '슈퍼우먼'의 전형으로 회자되고 있다. 정종미의 작품에서 황진이는 꽃과 새가 가득한 무지갯빛 정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관객을 정면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마치 기생의 일상에 속하는 수놓기와 바느질을 암시라도 하는 듯 파스텔 톤의 비단 위에 염료와 종이로 '수놓은 듯한' 정원은 정작 그녀에게는 꿈속의 낙원이나 지나간 젊은 시절처럼 현실이 아닌 듯이 보인다. 반면 화려한 청색과 홍색 조각보 사이에 놓여 있는 매창은 관객을 향해 당당히 걸어오고 있는 듯하다.

정종미_유화부인_한지, 비단, 안료, 염료_469×182cm_2008_부분
정종미_유화부인_한지, 비단, 안료, 염료_469×182cm_2008

정종미의 "부인들" 가운데 그들 자신의 실제의 삶을 가장 직접적으로 시사하는 모습으로 묘사된 인물은 논개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여필종부"를 가르쳤던 조선시대에 몰락한 양반 집안의 딸이 양반의 후처가 되었다가 그 남편이 죽은 후에 선택할 수 있는 길에 대한 질문은 생략한 채 적군의 장수를 '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의 자살을 애국심의 산 표본으로 제시하고 있다. 정종미는 논개를 전체 폭이 6,3m인 푸른 색 화면의 중앙에 중력을 받지 않고 하강하는 커다란 새처럼 표현하였다. 그녀의 죽음은 다른 세계로의 비행처럼 보인다. 강은 푸른 안료로 물들인 모시로 표현되어 있는데, 천의 이음새가 만들어 낸 화면 속을 수평선들은, 푸른 색이 강물을 시사하듯이, 물결을 암시하는 듯하다. 작가의「어부사시사」나「몽유도원도」와 같은 작품에서 추상적 풍경이었던 이러한 단색조 화면은「논개」에서는 강이라는 현실이 되었다. ● 이 작품들에서는 정종미의 "종이 부인" 그림에서 2004년경부터 나타난 새로운 작업 방식이 그녀 고유의 양식으로까지 진전되었다. "나"를 찾는 노력이기도 한 그녀의 한국화의 뿌리 찾기는 벽화와 불화도 그 기원에 포함시킨 한국화의 재료와 색채에 대한 학문적인 탐구로 이어졌다. 2001년에 출간된 『우리 그림의 색과 칠 - 한국화의 재료와 기법』은 그녀의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이러한 재료와 색에 대한 연구는 2000년대에 들어서 그녀가 손수 만든 안료와 아교로 정교하게 물들이고 한천과 콩즙으로 색을 안착시킨 종이만이 아니라 모시와 비단을, 역시 직접 전분으로 만든 접착제로 꼴라주하여 제작한 서정적인 색면 추상화와 같은「어부사시사」와「몽유도원도」 연작들에서 실현되었다. 이러한 작품에서는 여러 차례 반복되는 염색 과정을 거치면서 안료가 물들면서 색이 깊이감을 지니게 된 종이와 천이 여러 층으로 꼴라주됨으로써 화면에서는 착시적인 깊이감이 생겨났다. 2004년 즈음에 제작된「미인도」와 같은 작품들에서는 치마가 모시나 종이로 실제 치마의 주름이나 부풀어 오른 상태를 모방한 저부조로 표현됨으로써 깊이가 착시 효과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표현되었다.

정종미_허난설헌_한지, 모시, 안료, 염료, 콩즙_194×130cm_2008

2004년 경에 제작된 "부인" 그림들이 지닌 3차원성은 부풀어 오른 치마 만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종이와 천을 여러 층 꼴라주해서 표현한 부인들의 장신구들을 통해서도 생겨났다. 이 장신구들은 이것들과 같은 시기에 등장한 여러 색깔의 '조각보'로 만들어진 화면과 함께 정종미의 그림들을 화려하고 다채로워지게 했다. 여러 색깔의 천과 종이로 이루어진 비슷한 크기의 사각형들을 화면에 비교적 규칙적으로 붙인 후 그 위에 다른 종이나 천 위에 그린 여인 얼굴을 오려와 붙이고 그 여인에게, 마치 어린이들의 종이옷 입히기 놀이처럼, 옷을 입히듯이 꼴라주한 작품들은「보자기 부인」으로 불린다. 정종미가 화면을 조각보처럼 만든 것은 그녀가 한국화에서 복원시키고자 했던 색이 조선시대에 회화에서는 사라졌지만 궁중 의복과 민화, 그리고 조각보와 같은 여성의 물건에서 지속된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제작된 정종미의 부인 그림들은 입체적으로 되고 색깔이 화려해 지는 동시에 장식적으로도 되어갔다. 작가는 부인들의 의상의 화려한 문양들을, 특히「명성황후」의 금박 무늬 의상에서 볼 수 있듯이, 무늬가 있는 천을 사용하거나 작가가 실제로 천이나 종이 위에 그려 넣음으로써 표현하였다.「명성황후」의 트레머리와 그곳에 단 장신구들은,「황진이」와「논개」의 노리개와 마찬가지로, 작가가 직접 물들인 종이로 만들어 붙인 것이다. 이를 통해서 정종미의 "종이 부인들"은 1995년경 그들이 종이로부터 태어나던 것과는 달리 작가가 만든 종이옷을 입게 되었다. 이 작품들은 동 ? 서양에서 모두 여성 노동의 산물이자 여성적 예술로 간주된 공예에 가까워졌다. 처음에 흙과 같은 누런 색을 띠고 종이 안에서 조심스럽게 출현하던, 그리고 이목구비도 형체도 불분명하던 "종이 부인"들이 12~3년 후에 화려한 의상을 입고 장신구로 치장하였으며 단호한 표정을 하고 스케일이 기념비적인 화면을 압도하는 "역사 속의 종이 부인"으로 변모하였다. ■ 김정희

Vol.20090206a | 정종미展 / JUNGJONGMEE / 鄭種美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