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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9_0203_화요일_06:00pm
후원_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09:00am~06:30pm / 주말, 공휴일 휴관
송은갤러리_SONGEUN GALLERY 서울 강남구 대치동 947-7번지 삼탄빌딩 1층 Tel. +82.2.527.6282 www.songeun.or.kr
금혜원의 「질주하는 빛 Speeding Light」 시리즈는 우리가 익숙하게 환기할 수 있으면서도 실상은 응시한 적이 거의 없는 지하철 내부에 대한 르포르타주를 넘어선다. 작가가 터널 속으로 실제로 들어가 "검은 먼지에 섞은 특유의 냄새"와 "찢어질듯 한 소음"을 각오하고 포착한 이 정지 이미지들은 사진의 매체적인 본성에 대한 고전적인 질문과 현대사진이 제기하는 특유의 문제적인 대상들을 함께 노출한다.
지하철의 찰나적 질주가 스펙트럼으로 환원되는 이 일련의 사진들은 스냅쇼트의 전통을 충실히 따른다. 스냅쇼트는 두 개의 속도들이 마주칠 때 정지 이미지로서 인화된다. 움직이는 물체의 속도와 이를 포착하는 셔터의 속도가 그것들이다. 셔터의 속도는 운동의 궤적을 잠시나마 붙잡아 빛의 흔적으로 인화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움직이는 물체의 생명감을 상실한다. 스냅사진은 삶의 연속적인 흐름에 개입하여 순간의 단편을 추출할 수 있지만 그 결과는 언제나 삶의 안티테제이자 생명의 구성적인 이면인 정지, 심연, 죽음으로 이어진다. 그 삶의 실체가 인간의 통제력과 지각의 한계를 넘어선 기계의 시공간적 역동성이라면 운동과 정지, 삶과 죽음의 역설은 심화된다. 금혜원이 작업노트에서 "빠르게 스쳐가는 지하철의 속도"와 "엄청난 소음으로 잠시 잠깐 정지된 터널의 공기" 사이의 균열을 보았다고 말할 때 그는 스냅쇼트의 이 본원적 역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그 역설이 프레임 내 소실점으로 빨려 들어갈 때 관객은 사진적인 체험의 한 극한과 조우한다. 관객은 여기서 지하철이 터널 내 일정한 지점을 관통하던 당시의 현재를 체험하기를 기대한다. 그 기대에 부응하듯 사진사는 전철이 통과하는 순간이라는 사건을 마주하기 위해 "너무나 일찍(too early)" 터널 내의 한 지점에 당도하여 심호흡을 하고 숨을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셔터는 객차의 윤곽과 주파를 담아내기에는 항상 "너무나 늦기(too late)" 마련이다. 금혜원의 사진들은 스냅쇼트의 본원적 존재조건인 "움직이는 실재"의 포착이 "너무 일찍"과 "너무 늦게"라는 이중적 불가능성에 사로잡혀 있음을 입증한다. 이 이중적 불가능성이 티에리 드 듀브(Thierry de Duve)가 말했던 사진적인 체험의 한 극한인 것이다. 빛의 스펙트럼들이 이루는 매혹적이면서도 비인간적인 날카로움은 운동의 수행을 완벽히 담아내는데 항상 실패하는 스냅쇼트의 운명을 환기시킨다. 추상적 색들의 선은 사실상 지하철이 통과한 그 순간의 갑작스러운 소멸이 남긴 외상의 흔적인 셈이다.
외상의 여파 뒤에 렌즈가 목격하는 것은 "숭고한 어둠의 아케이드"와 그 속에 도사린 "비현실적 고요함"이다. 충분히 형상적으로 포착되지 못한 지하철의 사라짐을 보상하듯 터널의 디테일들이 신비롭고도 육중하게 프레임 내부를 채운다. 스냅쇼트가 고집스럽게 고수하고자 했던 순간성의 시제가 이 시점에서 과거 시제로 이행한다. 스펙트럼이 전달했던 상실의 충격은 이러한 시제의 이행과 더불어 그 충격에 대한 애도로 이어진다. 프로이트의 고전적 정의에 따르면 애도는 대상의 상실을 인정하고 그 대상에 대한 애정을 다른 대상으로 되돌리는 작업이다. 충격의 순간을 극복하고 애도의 제스처를 받아들이면서 사진은 현실적 시간에 대한 직접적인 참조를 넘어 일종의 영원성("시간이 정지된 듯"한 느낌)을 지향한다. 금혜원의 사진들이 스냅쇼트이면서도 노출사진(time exposure) 특유의 심도를 유지하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이제 관객은 스냅쇼트의 이중적 불가능성이 남기는 한 극한에서 사진적인 체험의 또 다른 극한으로 이동한다. 스냅쇼트와 노출사진, 사진의 본원적인 매체 특정성을 지탱하는 이 두 극단적 체험들의 공존이 금혜원의 작품들을 참된 사진적 대상으로 인증한다. ● 이러한 설명은 금혜원이 한편으로는 전통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적인 사진 예술가임을 입증한다. 먼저 전통적인 측면. 이 터널 시리즈를 보면서 한편으로 내가 떠올린 작업은 토마스 데만트(Thomas Demand)의 1999년 필름 작업인 「터널」이었다. 데만트의 영화는 겉으로는 다이애나 공주의 자동차 사고가 일어난 그 터널의 트래킹 쇼트들을 보여주지만 실상 이 터널은 인공적으로 건축된 것이다. 이 작품을 통해 데만트는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재현물이 사실상은 관찰자의 의도와 매체 이미지를 포괄하는 복잡한 의미망에 의해 구축되어 있음을 환기시킨다.
이 작품은 현실의 재생산보다는 그러한 재생산을 지배하는 인지적, 기호적인 과정들에 대한 질문이 현대사진의 문제적인 대상임을 일깨운다. 데만트의 작품들이 발산하는 인공적인 모호성 대신 금혜원은 피사체와의 직접적인 대면을 통한 실재적 모호성을 지향한다. 달리는 지하철과 그것의 사라짐 뒤에 항상 잔존하는 터널의 정지된 심연이 공존하면서 일으키는 정지와 운동, 균형과 불균형 사이의 진동, 그것이 실재적 모호성의 중핵이다. 오늘날 사진은 바로 그 진동의 영역으로 관객의 지각을 인도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비가시적인 세계의 측면을 드러내주고, 현대적인 경험을 증폭시킴으로써 예술적 매체의 유효성을 입증한다. 그런 의미에서 금혜원의 사진은 다시 한 번 현대적이다. ■ 김지훈
Vol.20090123c | 금혜원展 / KEUMHYEWON / 琴惠元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