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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주말, 공휴일 휴관
갤러리북 GALLERY NK 서울 중구 순화동 7번지 중앙일보빌딩 로비1층 Tel. +82.(0)2.751.9634 www.galleryNK.com
스쳐지나간 수많은 것들과의 재회 ● 텅 빈 화면이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기 위해 작가는 수많은 붓의 흔적을 화면에 기록하기 마련이다. 화면에 중층적으로 쌓인 붓의 기록은 '작품'의 필연적 요소이지만, 대부분의 관객은 그 하나하나 보다는 총체적 모습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화면에 바구니에 사과가 있는 그림이 있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과를 '그린' 그림이라고 말하지, 사과를 '어떻게 그린' 그림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어떻게 그린'의 문제는 회화 기법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더 나아가 작가가 대상을 대하는 태도, 작업 과정에 발생할 수 있는 동적 요인, 붓의 기록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상호 대립과 절충의 지점이다. 그렇다면 회화에서 주요한 것은 무엇을 그렸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그린'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현실적인 비현실 / 비현실적인 현실 ● 일단 사윤택의 작업을 표면적으로 접근해보면,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움직임을 내포한 대상들, 즉 자동차, 테니스 경기, 다이빙, 테니스 공, 사람 등이다. 이것들은 사윤택의 작업에서 흔들리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두 번째는 이들의 배경이 되는 움직이지 않는 대상들이다. 즉, 자연, 하늘, 테니스 코트, 나무, 건물 등이다. 이것들은 움직이는 대상의 움직임을 극대화하기 위해 고정된 형태로 작품의 배경으로 사용되고 있다. 전자와 후자는 '움직임/고정', '불안/안정'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상이하다. 그리고 전자는 낯설게 보인다. 그렇다면 낯설게 보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전자를 구체화 해보자. 테니스공이 공중을 날아다는 것, 사람의 몸이 이동하는 것, 다이빙 하는 사람이 궤적을 그리며 떨어지는 것, 날아오는 공을 피하는 것. 사윤택은 이러한 상황의 흔적을 2차원의 정지된 평면에 담아낸다. 공은 저 어딘가에서 부터 사람에게 날아오고 있으며, 사람은 그것을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움직인다. 다이빙 하는 사람은 여러 단계를 거치며 물에 다가가고 있다. 정지된 화면에 움직임을 담아내기 위해 사윤택은 대상의 흔적을 묘사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그간 보지 못했던 흉물에 가까운 사람의 얼굴이 등장하기도 한다. 마치 TV화면을 캡처한 순간의 이미지처럼 말이다. ● 그런데 만약 이것이 우리 일상에서 마주한 장면이라면 낯설게 보였을까? 이러한 상황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마주할 수 있는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되는 것들이다. 움직이는 순간이 낯설어 보이는 것은 그간 우리가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그것이 비현실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기에 이것은 낯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삶에 더욱 가까운 것이다. 그렇다면 화면에서 안정적으로 보이는 후자는 어떠한가? 화면에서 안정적으로 안착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우리 삶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낯선 것이다. 흔들리지 않는 나무, 움직이지 않는 구름 등이 그러하다. 영화 속에 무표정한 배우들이 대거 등장한다면 이상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온통 무표정의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비현실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실제에 가까운 전자가 더 낯설어 보이는 것일까? 스쳐가는 모든 것들의 의미를 묻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가 실제에 가까운 것이지만, 사윤택은 스쳐지나가는 그곳에서 우리 삶의 실제를 포착한다. 그는 평범한 일상의 순간에서 현실의 실제 모습을 중첩시켜 재회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총체적 모습을 구성하는 필연적 요소이지만, 그간 배제된 것들의 재인식이다. 사윤택은 이 지점에서 극히 평범한 자신의 일상을 반추하고 있다. 이러한 사윤택의 일상에 대한 태도는 긍정적이다. 단지, 아쉬운 것은 이러한 시각을 바탕으로 일상 너머의 세계에 대해서는 아직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간과했던 것들과의 재회는 이뤄졌지만, 그 이후는 없다. 이것은 사윤택이 앞으로 나아가야할 지점으로 보인다. ■ 이대범
Chaos 혹은 Cosmos ● 개인적으로 사윤택의 그림을 간간이나마 보아온 것이 벌써 십년이 가깝지 않은가 싶다. 이전 그림들에 대한 내 기억 가운데 뚜렷한 것은, 그가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근간으로 하는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관심과 표현을 지속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즉, 자신의 주제와 관심으로 그려지는 그림 속에 위와 같은 문제들을 한두 가지, 혹은 몇 가지씩 꾸준히 제기하고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그림 그리기가 회화의 근본문제들과 관련을 맺도록 하는 동시에, 스스로의 작업이 그것들을 극복하는 과정이 되도록 하는 신중함과 진지함이 담겨 있다는 말이다. 나아가 그것은 자신의 작업이 동시대적인 새로운 해석이자 제시가 되도록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 그 가운데는 근대 이전 대가들을 비롯하여 현대미술을 연 19세기 서양화가들의 그림을 인용하는 방법도 두드러졌었다. 나는 그것을 '그가 회화의 역사적 성과를 단지 습득하는데 그치지 않고 같은 화가로서 과거에 새로이 열렸던 지평의 의미를 체득하고자 했던 것'으로 이해했었다. 다시 이야기하거니와 그것은, 자기 회화의 뿌리를 전통에 두고 전통을 이해함으로써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그림을 그리겠다는, 어찌 보면 마땅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주 야심 찬 생각이라 할 것이다. 결국 그 또한 한 사람의 화가로서 자신의 회화가 서야 할 기반과 방향의 근본을 명확하고 탄탄하게 잡아야 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그의 그림에서는 언뜻 보아도, 외계나 사물에 대한 인지(혹은 인식), 화면공간과 재현, 일루젼과 같은 보다 고전적인 주제로부터, 주체로서의 화가와 대상으로서의 소재, 그린다는 행위, 회화의 본질, 시간 등 보다 근·현대적인 문제들에 이르는 탐색과 해석이 담겨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본다면 그는 태도도 올곧을 뿐 아니라, 욕심도 적지 않은 작가임이 분명하다. 이미 시간적 간극이 생겨버렸지만 더군다나 요즘 같은 세태에 쉽지 않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그림도 변화를 보이게 되는데, 그것이 근자의 그림들이다. 가장 큰 변화는 시간과 공간에 관한 관심이다. 그것도 우리가 사는 일상적인 시공간이 아닌 전혀 뜻하지 않은 시간과 공간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그의 그림이다. 하지만, 앞으로 이야기 하겠지만, 회화가 이루어온 역사적 성과에 대한 오마쥬, 혹은 육화(肉化)를 위한 시도는 한편으로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 그의 그림에는 테니스공이 흔히 등장한다. 그러한 그림에서는 갑작스레 어디에선가 날아온 공을 맞거나, 날아온 공에 당황하여 대응하는 순간이 화면의 중심적인 사건이 되는 것이다. 사건의 배경으로는 대체로 주변 풍경이 그려지게 된다. 한데, 사건의 주인공의 모습은 다중노출 사진처럼 두개 혹은 그 이상의 동작이 겹쳐지며, 공 또한 이리저리 튕겨 움직인 흔적들이 화면 속에 공존한다. 이는 짐작대로 여러 개의 시간이 한 화면에 중첩된 표현이다. 그러니까 그는 한 화면에 여러 개의 시간을 함께 담는 것이다. ● 이에 대해 그는 "충격이 가해지는 순간 열리는 새로운 시공간"이라고 말한다. 그림 속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은근히 써둔 'The Open Time'이 그것이다. 다시 말하면, 공을 맞거나 갑작스런 사건이 발생한 순간 주인공이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이 열리면서(또는 틀어지면서, 깨지면서...) 다른 시공간들과 겹치거나 교차하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와 미래의 교차일 수도 있고, 물리학에서 말하듯 평행한 여러 세계가 겹쳐 다른 층위의 세계에 존재하는 나를 만나는 것일 수도 있다. ● 다른 그림들도 마찬가지이다. 다이빙을 하는 사람과 낙하산을 탄 사람이 교차하는 순간,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사람이 휘익 지나치는 순간, 고급 자동차가 단속카메라를 눈치 채고 급히 브레이크를 밟는 순간, 그리고 광고 중인 TV를 리모콘으로 끄는 순간, 상대의 공을 쫒던 테니스 선수가 그 공을 놓지는 순간도 모두 일순 여러 개의 공간과 시간이 열렸다가 다시 닫히는 극히 짧은 시간이다. 자연스럽게 연결된 듯 보이는 배경들도 차원의 모서리에 끼어 동서남북 창마다 아프리카 사막, 북극 빙원, 아마존 밀림, 그리고 뉴욕 도심이 동시에 열려 있는 집처럼 제각기 다른 시간과 차원의 공간들이 교묘히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하늘에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로 상징되는 태초의 시공간과 현재의 시공간이 교차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그림과 사고는, 125개의 우주에 존재하는 125명의 나를 제거하고 우주의 절대지배자가 되려는 이연걸이 출연한 「더 원The One」이나, 또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나를 만나는 「큐브 2」, 단기기억상실증 환자의 이야기를 다룬 「메멘토」, 어린 시절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끊임없이 과거로 회귀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은 「나비효과」와 같은 영화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영화와 소설들은 주체와 객체, 시간의 전위, 혹은 평행한 여러 개의 세계와 관련된 물리학의 가설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그의 그림은 근대철학과 물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세계관이나 세계에 대한 이해로부터 벗어나 있다. 따라서 매우 동시대적인 유효성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 이전 그림에서도 그는 시간의 축적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었다. 회화란 사진을 찍듯 일순간에 포착되는 것이 아니라, 화가가 오랜 시간 대상을 파악하고 묘사함으로써 완성된다. 따라서 볼 수는 없지만 그림에는 긴 시간이 축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윤택은 자신의 그림에서 이러한 시간의 축적을 표현하고자 하였다(거기에는 물론 다른 의도도 포함되어 있겠지만, 그림을 그리는 자신과 그리고 있는 그림이 함께 묘사되는 그림이 한 예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원근법을 사용하지 않고 육체노동이 가까운 조각이나, 시간이 흐르면 사라지는 음악,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시에 비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도 표현하는 우월한 예술이 회화라고 했다지만, 그러한 회화조차도 시간(의 경과)을 표현할 수는 없었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회화를 포함하여 조형예술이 시간을 담을 수 있는 수단을 가지게 된 것은 (활동)사진의 발명 이후였다. 흐르는 시간을 한 화면에 표현하고자 했던 미래주의도 머이브리지 이래의 연속 사진술 발명에 힘입은 것이고, 작가의 행위와 시간의 축적이라는 액션페인팅도 그 축적은 개념상의 문제였을 뿐이다.
회화가 시간을 표현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것이 영화와 비디오가 생겨난 오늘날 회화의 한계를 드러내는 결정적인 이유의 하나가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이기 때문일까. 사윤택은 연속된 흐름이나 중첩으로서의 시간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의 중첩과 교차라는 방식으로 다중(多重)의 시공간을 동시에 표현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굳이 다중의 시공간을 한 화면에 담아내고자 하는 것일까? 우선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시간을 표현할 수 없는 회화의 한계를 극복하고 시간을 수용하는 방법 찾는 그의 전략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는 그가 회화의 역사적 성과를 지속적으로 체현함으로써 그 바탕 위에 서고자 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수긍할만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회화를 만들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 한데, 한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는, 그가 조합해 놓은 한 화면 속의 사건들과 대상들은 제각기 그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사건들의 조합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순간적으로 벌어지는 사건의 배경이 되고 있는 건물들, 인물들과 그들의 행위들은 그의 기억 속에 깊이 박혀 문득문득 의식 속으로 튀어 오르는 잊기 어려운 사건의 기억들이거나 잠재된 욕망의 기호들이기도 하다. 매우 예민한 자의식을 가졌다고 할 그에게, 실패나 좌절, 혹은 잊고 싶은 기억들은 단속적으로 의식의 수면 위로 튀어 올라 그를 불편하게 하고 있을 수도 있다. 또한 욕망과 이상은 끊임없이 그의 안에서 대결을 펼치며 그의 평정을 흔들고 있을 수도 있다. 그때 그의 의식은 때때로 혼돈 속에 있으며, 그것은 비현실적, 혹은 초현실적 분출구를 통한 해소하는 방식을 취하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그것의 형상화가 그의 그림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지나친 비약이 되겠지만, 그의 그림이 무의식이나 억압된 의식, 카오스, 혹은 파토스적인 요소들과 많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크게 틀리지 않은 말이라고 생각된다. 그 둘 가운데 무엇이 우선하며, 무엇이 보다 큰 비중을 갖느냐는 부차적인 문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물음과 유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 '생겨먹은' 작가이고, 그래서 그는 아마도 그렇게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일 것이다. 물론 지금도 그는 '매력적으로 보이는' 그림에 대해서, 농담반 진담반 하는 말처럼, 속으로는 맘고생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 다만 나에게 의미 있는 일은 우선, 그가 자신의 그림이 긴 역사 동안 많은 화가들이 고민해온 '회화'의 적자(嫡子)가 될 수 있도록 고민하며 애쓰는 작가라는 점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그가 그것을 바탕으로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평초 같은 세상에 몸을 맡긴 경박한 '그리기'가 횡행하는 요사이, (역사로서의) '회화'에 대한 천작, 그것은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그의 그림도 '팝'으로 읽히는 세상이니까... 그의 그림은 어렵다. 어렵다기보다는 해석하기 곤란하고, 난처하다. '도대체 그 그림 구석구석에 무슨 엉뚱한 생각을 담고 있을까'로부터 시작하여, 괘난 헛힘이나 들이고 우습게 될까봐서... 아마도 그것이 내가 그의 그림 이야기를 주저주저했던 이유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할 이야기는 많은데, 어차피 한 번에 풀 수는 없는 노릇일 터이다. 두고두고 그와 이야기하면서 양파처럼 꺼풀을 벗길 일이 남았으니 즐겁다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박정구
Vol.20090109e | 사윤택展 / SAYUNTAEK / 史潤澤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