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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9_0128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주말_11:00am~06:00pm
미술공간현 ARTSPACE HYUN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6번지 창조빌딩 B1 Tel. +82.2.732.5556 www.artspace-hyun.co.kr
나무의 내부에 새긴 일상 ● 인간의 몸을 기꺼이 받아주고 편안히 지탱시켜 주는 도구들은 모두 안정감 있는 네 개의 다리를 지녔다. 침대, 책상, 의자나 식탁이 그렇고 의자나 자동차 역시 그렇다. 우리들은 그것들과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넙적하고 평평한 사각형의 상판에 네 개의 다리가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는 형국이다. 옛 사람들은 그러한 가구조차 음과 양의 조화로 파악했는데 그러니까 상판은 하늘(양)이고 이를 떠받치는 네 개의 다리는 땅에 붙어있는 짐승의 다리와 동일시해서 음(땅)으로 여겼다. 음과 양이 다부지게 꽉 조여 있는 충일한 상태를 보여준다. 우리가 흔히 '개다리소반'이라고 부르는 상 역시 개의 다리를 형상화해서 만든 것이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옛 책상, 의자, 밥상 등의 다리가 모두 짐승의 다리에서 그 모양을 따왔음을 알 수 있다. 자기 몸을 일으켜 세워 직립하는 일은 땅에 붙어서 하늘을 이고 있는 형태이다. 인간의 몸을 지닌 이들 역시 두 발로 땅을 딛고 정수리에 하늘을 얹혀놓고 있다.
백연수가 통나무의 내부로 파고 들어가 대충 깎아 만든 형상은 네 다리를 지닌 동물이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나무덩어리다. 그 형태가 문득 의자나 탁자를 연상시켰다. 그것은 특정한 동물의 형상을 재현한 것은 아니고 보편적인 네 발 달린 동물의 이미지를 가볍게 연상시킨다. 혹은 일상의 사물들도 떠올려준다. 그 연상은 보는 이의 욕구에 의해 가변적이다. 특정한 동물의 모습을 떠올릴 수 도 있고 아니면 그저 나무라는 물질, 하나의 덩어리로 볼 수 도 있다. 아니면 의자나 벤치를 기대할 수도 있다. 사실 그 모두에 해당한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조각은 그것이 재현한 이미지이기 이전에 물질에 불과하다는 것은 로댕 이후 현대조각의 문제이고 따라서 이후 조각은 물질과 이미지 사이에서 말을 건네는 일이 되었다. 백연수가 만든, 연출한 동물이미지/나무의 물성은 전시장 바닥 이곳저곳에 흩어져있다. 마치 풀밭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유제류 들처럼 말이다. 전시장에 들어온 긴장된 시선들은 편안하고 자유롭게 풀어져있는 온순한 초식동물(?)을 내려다보면서 순간 이완된다. 그것들은 또한 공원이나 숲 속에 놓인 작은 의자나 나무의 잘려지고 남은 밑 둥을 연상시켜준다. 그것은 쉼표처럼, 휴식처럼 자리한다. 관자들은 그 사이를 배회한다. 현실적 삶의 공간인 바닥을 내려다본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일상의 공간이기도 하다. 아울러 직립된 인간의 정면성에 호소하는 시선이 아니라 내려다보는 시선을 제공해준다.
백연수의 조각은 특정한 이미지를 보여주기 이전에 나무라는 물질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다양한 나무의 내부로 들어가 그 속살을 벌려놓았다. 그 속은 땅과 물과 햇빛, 그리고 공기가 만들어낸 견고하고 은밀한 나무의 안이다. 우리는 어떤 단단한 물질의 내부로 들어갔을 때 느끼는 모종의 쾌감을 기억한다. 우리는 그렇게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한다. 나무의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는 표현행위 이전에 본능적인 소통이나 대상에 대한 간절한 탐닉과도 관계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부는 없다. 모든 내부는 외부로 직결되고 그렇게 확인된 내부는 표면으로 나앉을 뿐이다. 더 들어가면 내부는 사라져버린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적당한 거리, 깊이에서 내부를 보여준다. 그 안은 전기톱과 끌에 의해 비로소 밖으로 나왔다. 작가는 나무가 지닌 본래의 상태, 결과 색상, 속살과 자국, 시간이 지나면서 금이 가고 터져나가는 것까지도 그대로 작품 안으로 수렴시킨다. 시간의 흐름이 나무의 피부, 물질과 함께 한다. 나무는 자신의 살로 그 시간을 증거 한다. 비록 잘려진 나무지만 그것은 외부와 지속해서 관련을 맺고 있는 중이다. 식물로서의 삶이 아직 마감되지는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그 식물성의 존재가 동물성의 육체를 그려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돌과 나무는 이미지의 근원과 관련된다. 소멸되는 존재를 영속적인 재료에 새겨 오래 살아남게 하려는 것이 이미지였고 따라서 그 영속적인 재료로서, 말랑거리는 인간의 유한한 살을 대신해 시간에 저항하는 견고한 재료인 나무와 돌이 쓰였음을 기억해보라.
전통적인 목 조각의 정형화된 방법론에서 벗어나 과감하게 쳐내고 거칠게 추출해낸 자취는 나무의 무겁고 단단하고 느리며 다소 답답한 느낌을 증발시킨다. 나무의 덩어리 감을 유지하면서도 그것은 따뜻하고 가볍게 사물의 외형에 기생한다. 동물이미지나 혹은 일상의 소품과 사물들이 그것이다. 2004년도 전시제목은 『동물과 살다』였고 2005년도 전시는 『Animals on Animals』였는데 근작은 『Animals are HOME』이다. 이러한 전시제목은 그간의 작가의 관심의 이동을 정확하게 보여주며 작품의 변형과정을 솔직하게 증거 한다. 유난히 동물을 좋아하는 자신의 기호와 관심이 동물의 이미지를 목 조각으로 재현하게 했는데 동시에 그 안에는 목 조각으로 어떻게 동물을 형상화할까, 기존의 목 조각과 다른 조각적 방법론을 무엇일까, 나무란 물질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보여줄까, 조각과 회화, 설치의 영역을 하나로 통합하면 어떻게 될까 등의 질문과 모색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그 위로 살림과 육아, 그리고 작업을 병행해야 한다는 현실적 상황이 다시 눈처럼 내려앉아 있다. 그래서 근작은 더 이상 동물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작업으로만 국한하지 않고 현재 자신의 상황을 그대로 솔직하게 표현하고 반영하는 선에서 이루어진다. 이를 대표하는 작품이 바로 'My working table'이다. 좌대와 작업실 책상, 싱크대가 구분 없이 맞물려있는 사각형의 테이블에는 작업구상을 그려놓은 스케치북과 노트, 결혼 앨범 그리고 크레용으로 스케치를 해놓은, 이제 곧 깎아 나갈 작은 나무 조각과 토막 난 등 푸른 생선, 홍당무, 그리고 아이의 장난감 등이 한데 어우러져있다. 그것은 현재 작가의 삶, 일상을 풍경처럼 보여준다. ● 아마도 작가는 현실 안에서 이 같은 작업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삶의 위안과 위로, 활력을 부여하고 있는 듯하다. 자신에게 납득이 가고 자기에게 의미 있는 작업을 하고자 하는 중요한 덕목을 보여준다는 생각이다. 이를 포함하는 대부분의 작업은 유머러스하고 친근하며 시각적인 즐거움을 안긴다. 무심하고 자유롭게 쳐나가며 다듬어놓은 자취가 일상적인 사물을 매력처럼 안겨주고 그 위에 얹혀 진 색채들은 나무의 물성을 실재하는 사물의 피부로 전이시킨다. 감각적이고 가볍게! 팬시 한 감각, 대중문화와의 친연적인 감수성, 기존 목 조각의 관례에서 벗어난 발랄한 상상력과 직관적인 몰입으로 드러난 나무의 물성해석, 그리고 회화적인 표현과 설치적 연출 등이 어우러진 작가의 작업은 나무란 존재가 어떻게 한 작가의 일상과 접목되어 그녀를 대신해 마음과 삶의 풍경을 연출하는 매개가 되고 있는가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 박영택
Animals are HOME ● 이번 작업의 주제는 '동물과 나, 그리고 집'이다. 실제로 우리 집에는 동물이 살지 않는다. 몇 년 전 가족 같은 개 한 마리를 떠나보낸 후 집안에서는 더 이상 동물을 키우지 않는다. 그러나 항상 동물로 가득한 집을 꿈꾼다. 나는 네발로 서있는 동물의 이미지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 동물의 형태에 대한 집착은 개와 함께 가족처럼 살았던 10여 년의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 같다. 언제나 집에 가면 네발 달린 동물이 있었고 집안 어딘가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 집이 나에게 있어 밀접한 의미로 다가오게 된 계기는 결혼이다. 이전에는 단지 잠을 자고 쉬는 곳에서 이제는 나를 주체적으로 만드는 요소이면서 내 삶의 중심에 놓인 곳으로 그 의미가 크게 다가왔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작업 안에서도 집이 보이게 되었다. 나는 나와 동물, 그리고 우리가 머무는 집을 전시장으로 옮겨놓는다.
작업을 위한 테이블이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작업구상을 위한 테이블이다. 작업을 위해 나무 조각을 올려놓고 드로잉 북을 펼쳐놓고 있지만 나무토막 위에 크레파스로 끄적거린 드로잉뿐 종이 위에 그려진 드로잉도 도구도 없다. 책상 위에 어지럽게 펼쳐진 나의 일상속의 사물들은 실제 작업에서 나무로 깎이고 묘사되어 있는 반면 작품을 위한 나무 조각은 실제 작업에서 나무 조각 자체로 보여 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했다. ● 또 다른 작업은 빨래를 널기 위한 건조대이다. 평소에 가죽과 털을 좋아하여 모아둔 재료들을 이용하여 큰 동물 가죽을 만들었다. 어느 날 빨래건조대에 걸려있는 옷들이 거대한 동물의 형상으로 보여 졌던 기억을 작업에 담아보았다. 이런 방식으로 집안 구석구석 사물 안에 나와 동물, 그리고 나의 삶을 담는다. 때로는 벽에 걸려있는 캔버스가 되기도 하고 나무가 무성한 화분, 혹은 거울이 되어 실제로 집에 놓인 나의 작품으로 보여 지기도 한다.
작업에 임하는 자세는 주어진 환경에 따라 바뀐다. 주변의 조건이 만족스럽게 느껴 질 때는 오히려 나태하고 느슨한 마음자세가 되어버려 머릿속도 꽉 막혀버린다. 항상 부족하고 아쉽고 안타까운 상황에서 오히려 정신은 맑아지고 마음은 편안해 진다. 마음이 편안해 지면 작업은 나름대로 정리가 되고 울렁거리는 설레임으로 가득하다. 비록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이야기라고 해도 마음속 무언가를 드러내어 표현하는 방법을 스스로 알아간다는 것이 행복하다... 지난 몇 년 동안 작업을 하고 싶은 욕구와 사회와 가정 안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의무와 삶 사이에서 상당한 혼란을 겪었던 것 같다. 작업 속에 이러한 혼란과 갈등이 보여 지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진부한 페미니스트로 오해받고 싶지는 않다. 다만 상당히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고 불려지는 나에게는 부족하고 아쉽고 안타까울 수밖에 없는 내 삶 속에서 활력을 찾고 작업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보여 지길 바랄 뿐이다. ■ 백연수
Vol.20090106e | 백연수展 / PAIKYEONSOO / 白然琇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