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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08_1112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09:30am~06:30pm / 일요일_10:00am~05:00pm
이화익 갤러리 LEEHWAIK GALLERY 서울 종로구 율곡로3길 67(송현동 1-1번지) Tel. +82.(0)2.730.7818 www.leehwaikgallery.com
'있음(being)'은 어떻게 그림 속에서 출몰하는가? ● 한밤중에 문득 혼자 잠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의 얼굴과 몸 주위를 감싸고도는 어둠의 기운을 느껴본 적이 있는지? 불빛이 닿지 않아 짙은 군청색으로 웅크리고 있는 듯 보이는 깜깜한 벽과 바깥 어딘가에 켜진 조명등 덕분에 노랗게 번져 있는 유리창에서, 침묵하는 밤의 존재감을 경험한 적이 있는지? 또 혹시 당신은 연말 유명백화점이나 놀이공원, 광장에 흘러넘치듯, 떠다니는 듯, 찌르는 듯 연출된 인공조명 빛(luminaries)을 보면서, 기분을 묘하게 만드는 어지럼증과 살갗으로 육박해오는 것 같은 촉감을 느끼는지? 아마 우리 중 대부분은 그런 느낌을, 그런 감각을 생활에서 몇 번쯤 경험했을 것이다. 하지만 또 우리 중 다수는 그것을 말이나 이미지로 표현한 적이 없고, 표현하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른다. 일단 위에서 예를 든 밤은, 빛은, 현상은 '있음 그 자체'로서, 비인격적이고 익명적이기 때문에 '나(주체)'에 의해 표현될 수 없다. 그리고 '사물(사태)의 있음에 대한 나의 지각'은, 내 눈과 피부로 전해져오는 느낌이 아무리 생생할지라도 부족한 언어나 형상을 빌려 표현하는 한, 완전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이를 전달 가능하게 만드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예술가들이 바로 그런 이들인데, 특히 그 중에서 화가는 형태, 색채, 질감을 통하여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존재 상태를 이미지로 가시화하는 이이다.
자, 여기 당신 앞에 '눈부신 어둠'을 보여주는 그림들이 있다. 정세라의 일련의 그림들이 그렇다. '눈이 부신' 현상은 보이는 대상이 지나치게 밝을 때 발생하는 감각 경험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어둠이 눈부시다'는 표현은 논리적으로 형용 모순이다. 그러나 정세라의 그림들을 보면, 이와 같은 수사적 모순이 비논리적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있을 수 있음을 실감한다. 이 작가가 그린 그림들은 '깊고 푸른 밤-공간의 현혹적 빛'을 전경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밤의 공간'과 '현혹하는 빛'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어둠의 한 속성으로서 밝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결국 하나이다. 섬광이 번쩍이기 위해서는 칠흑 같은 어두움이 필요하고, 존재(存在)가 출현하기 위해서는 부재(不在)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런 맥락에서 '눈부신 어둠'은 가능한 것이고, 정세라의 회화는 '뭔가 독특한 마력의 빛을 가진 밤의 있음'을 실체적으로 포착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에 대한 답을, 그림 속에서 유추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방법 1. 타자의 시간 ● 정세라가 1999년부터 자신의 그림에서 줄곧 다루고 있는 대부분의 대상은, 이렇게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그녀 그림에 대한 환상이 깨질 수도 있겠지만, 대도시 서울의 밤 풍경이다. 편의점의 푸른색 플라스틱 의자가 무미건조하게 도열해 있고, 간판 조명이 휘황하게 불 밝히고 있는 거리, 이제는 굳이 크리스마스 시즌만이 아니라 거의 사시사철 크고 작은 전구들이 빛의 스펙터클을 연출해내는 시내 중심가, 인공으로 조성된 수풀 사이로 노랗고 둥근 가로등 불빛이 낮게 깔려 있는 공원 등이 그녀 그림의 주요 모티브인 것이다. 이런 풍경은 도시 거주자들에게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상 정경이고, 어디 한 군데 이상은 정말 익숙한 장소들이다. ●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평범하고 친숙한 것이 정세라의 그림에서는 매우 독특하고 낯설어 보인다. 심지어 두려움을 자아내기까지 한다. 그려진 사물들은 뭐가 뭔지 정체를 잘 알 수 없으며, 화면 위를 부유하는 듯 보이는 빛은 밝고 따뜻한 정도를 지나쳐 시신경을 자극할 정도로 강렬하다. 그러나 특히 이 그림들을 생경하게 만드는 요인은 따로 있다. 어떤 풍경을 그린 그림에도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 정세라의 그림을 두렵고 이질적으로 만드는 원인이다. ● 가령 「공원에서 In the park」라는 제목이 붙은 몇 점의 그림을 예로 보자. 공원은 일상생활의 차원에서든 일반적인 공간의 의미에서든 '휴식과 여유와 정감의 공간'이다. 즉 사람들이 휴식을 위해 찾는 공간이며, 거기서는 우리가 공적인 일의 의무로부터 해방돼 좋아하는 사람과 또는 자연과 교감하는 곳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 '인공적으로 조성된 공간'의 중심은 인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공간에 절대적으로 인간이 부재한 상황을 그림으로써, 정세라는 주체 바깥, 타자의 시간을 가시화한다. 여기서 '시간'은 물리적 의미에서 '공원에 아무도 찾지 않는 매우 늦은 시각'일 뿐만 아니라 인간 주체의 입장에서 컨트롤할 수 없는 '비인간적인, 사물들의 특정 순간'이다. 낮의 빛 속에서는 경계가 분명했던 바닥과 울타리가 흐물거리며 결합하고, 싱그럽게 이파리를 흔들던 나무들은 붉게 타오르면서 들불이 번지듯 서로의 몸을 삼키며, 분명 가로등임에 틀림없는 광원(光源)에서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로맨틱한 빛이 아니라 눈을 부라린 위협적 빛줄기가 뿜어 나온다. 이 그림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공원의 어떤 친숙한 면모도 발견하기 어렵다. 여기에 정세라의 회화적 방법이 있다. 이를테면 그녀는 우리가 흔히 무엇인가 묘사할 때 그렇듯이 그림의 원천적 대상이 갖고 있는 고유한 질량을 제거하거나 삭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 비인간적인 시각으로 접근하여 일견 비합리적이고 과장돼 보이는 양태로 재현하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 사이에서 일종의 전도체, 번역자, 해석자가 되어 세계라는 타자의 존재 상태를 자신의 몸이 느꼈던 온도, 신경의 수축과 이완, 동공의 축소와 확대에 따라 그림으로 옮겨놓는다. 그것은 풍경의 모방(copy)이 아니라 풍경의 재생산(reproduction)이다.
방법 2. 왜곡된 공간 ● 정세라의 그림에 나타나는 공간은 모두 부풀어 오르고, 구부러지고, 녹아 흐르는 형국이다. 그녀가 외국 여행 중 방문했다는 유럽의 한 성(城) 내부를 그린 그림에서 특히 그러한 특성은 잘 드러난다. 분명 건축 공학에 입각해, 기하학과 물리학의 원리를 적용하여 엄격하게 축조되었을 그 성은, 그림에서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모습으로 새롭게 출현하고 있다. 건물 전체의 하중을 고루 분배하여 상층을 안전하게 떠받쳐야 할 기둥들은, 그림 속에서 과장된 원근법 때문에 불안해 보인다. 게다가 그 기둥들은 마치 면봉처럼 가볍게 묘사돼 있어 견고함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아치는 극단적인 명암 덕분에 간헐적으로만 그 선을 드러내며, 화면 중앙에 위치한 외부 통로 및 계단은 일그러진 형태가 마치 수면 위 그림자의 그것 같다. 「관조자의 방 The obsever's room」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성 그림에서, 작가는 어떤 의도로 공간을 왜곡시켰고, 그렇게 해서 그림의 감상자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단지 작가가 구사한 회화적 표현일 뿐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인간의 일반적인 시선으로 보는 '볼 만한 것(관광지)으로서의 고성(古城)', 그것을 단순히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은 현대 회화에서 너무 퇴행적이거나 진부하지 않은가? 그런 이유로 정세라는 현실의 공간과 풍경을 왜곡하고, 변형하고, 감각적으로 재조립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제목에서 우리가 유추할 수 있듯이 작가는 그림의 모티브가 되는 공간에, 현실적 맥락에 크게 개의치 않고, '어떤 성격,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중세풍의 건물 내부에서 '숙고'와 '관조'의 분위기를 감지했기 때문에, 그녀는 문자 그대로 고성에 '깊고 푸른 어둠'을 부여했고, 그 어두운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 눈이 부실 정도의 빛을 대비시켰다. 그렇게 함으로써 「관조자의 방」은 성격상, 의미상 실제 건축물의 내면을 가시화한 그림이 되는 동시에, 현실에서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의 환영(fantasy)을 생산한 그림이 된 것이다.
사실 우리가 앞서 논했던 정세라의 일련의 대도시 풍경 그림들 또한 공간과 사물을 왜곡 해석한 것들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그 왜곡, 변형이 어떻게 가능한가이다. 답은 작가가 구사하는 회화적 방법과 연결될 것인데, 아마도 그것은 '빛'의 조절 덕분인 것 같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시피 빛은 비물질이다. 일정한 크기도, 부피도, 무게도 갖지 않는 것이다. 빛은, 특히 그것이 인공적으로 조성된 강한 빛일 경우, 이미 특정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들의 표면을 효과적으로 변질시킨다. 예컨대 자연 빛 상태에서는 볼품없고 무가치해 보이는 소소한 물건들이 할로겐 등 밑에서 얼마나 아름답고 존귀해 보이는지 생각해보라. 또 어떤 소설가가 '늙은 여자를 대낮의 밝은 빛 아래 세우지 말라'고 일갈했을 때, 그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했던 뜻이 무엇인지 유추해보라. 그것은 요컨대 인공의 빛 속에서 사물은, 존재는 비로소 미적 대상이 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정세라가 자신의 회화 속에서 구사하는 빛의 질서, 메커니즘 또한 그런 목적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녀의 강렬한 빛의 그림들은 대상을 일반적인 의미에서 아름답게 포장하기보다는 대상이 가진 생경하고 그로테스크한 면모를 화면 위에 출몰시키는 것이다. 내가 이 글의 어디선가 정세라의 그림이 '환영을 생산한다'고 말했을 때, 그 단정적 말의 뜻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이다. 즉 그녀의 그림은 대상에 '미(美)'를 덧씌우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서 '이질성'과 '기괴함'이라는 또 다른 성격을 산출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우리가 이곳에서 매 순간을 살아가는 동안 경험하는 세계의 속성 중 일부이지만, 구체화하고, 또 객관화시키기 어려운 것이며, 이렇게 화가의 그림을 매개체로 해서만 출현하는 것일 것이다. ■ 강수미
Vol.20081112b | 정세라展 / JEONGSERA / 鄭世羅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