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ss cross

김병걸展 / KIMBYUNGGOL / 金柄杰 / photography.sculpture   2008_1029 ▶ 2008_1104

김병걸_칸의 그림자 Shadow of Kahn _혼합재료 위에 아크릴채색_142×67×125cm_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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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08_1029_수요일_05:00pm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아트 스페이스 GANA ART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6 (관훈동 119번지) 1,2층 Tel. +82.(0)2.734.1333 www.ganaartspace.com

김병걸의 '흔들기(Shake)'의 미학 : 부재를 통한 존재의 강화, 후퇴를 통한 사물의 보완 ● 침묵, 그것이 김병걸의 세계를 조율한다. 하지만 그 침묵은 루이스 칸이 말했던 것처럼 "무엇이 되고자 하는 계량할 수 없는 욕망"으로서의 침묵이다. "침묵은 빛과 어둠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으면서, 모든 생물체의 깊은 곳에 존재하고자 하는 열망이다." 침묵은 원형의 흰 테이블 앞에 앉아있는 루이스 칸(Louis Kahn)에서 뿐 아니라, 잠시 보행을 멈춘 사람과 비행하는 붉은 새에서도 목격된다. 침묵은 '빈 공간'의 언어요 부재의 웅변이다. 그것은 또한 잠재와 시간 너머의 표현이다. 김병걸의 세계는 이 침묵으로 조용히 말한다. 그의 인물들은 부재의 한가운데서 존재한다. 그들의 신체는 파편들의 무수한 이음매라는 반신체적 요인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비행은 정지보다 더 느리다. 보행은 거의 정지에 가깝다. 윤곽은 그 명백함으로부터 신중하게 후퇴한다. 대기는 미동하고, 세계는 증폭된다. 이 후퇴, 미동, 증폭에 의해 존재는 더욱 존재다워지고, 세계는 비로소 보다 '세계다움'으로 다가온다.

김병걸_바다와 모더니스트는 늙지 않는다_사진, 혼합재료 위에 아크릴채색_150×190×30cm_2008
김병걸_어디에도 없는_람다 프린트_63×220cm_2007

1. 파편들 : 존재와 부재, 또는 존재와 존재의 바깥 ● 단번에 우리는 김병걸의 것들을 '조각'으로 인식한다. 인물조각이거나 새 조각, 말의 부조로 인식한다. 우리는 그렇게 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질료와 질량, 형태와 단색조의 질서로 구축된 하나의 총체로 인식하는데 말이다. 게다가 우리는 그것들에 우리가 알고 있는 내러티브를 대입시키려 든다. 그들은 분명 축 늘어진 모더니스트고, 루이스 칸이다. ● 하지만 그들의 정체를 파악할 만한 마땅한 참조들은 누락되어 있다. 그들은 모두 모노크롬이고, 표정이 없으며 제스처는 극히 절제되어 있다. 인물이든 동물이든 자신의 고유한 '차원'을 부인한다. 그(것)들은 "이름이 없다." 각각의 명백한 외양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것들 모두는 마치 동일한 기원으로부터 도래한 듯하다. 사람, 말, 새 같은 종(種)의 구분도 여기서는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종의 구분조차 관통하는, 어떤 신비로운-신비주의적인 것이 아니라-동일성, 또는 교환이 중요한 문제다. 여기서 사람과 새, 새와 말은 모두 동일한 차원, 동일한 지평을 공유한다. 동일하게 묘사가 누락되고, 동일하게 단색조며, 동일하게 파편화된 동일한 피부를 가지고 있다. ● 물론 그(것)들은 길을 가고, 사랑을 나누고, 사유하고,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설수록 그(것)들의 정체적 모호성이 드러난다. 하나의 덩어리로 보여 졌던 것들은 무수한 사각 파면들과 그것들의 질서정연한 이음매들이다. 사각의 파편들, 김병걸의 사람과 말과 새의 표면을 동일하게 뒤덮고 있는 그것들에 의해 각각의 이름은 즉시 무효화된다. 이 이름의 삭제로 우리의 인식기제는 혼돈을 경험한다. 그것들의 정체적 후퇴, 이름 없음, 모노크롬과 침묵, 그리고 무엇보다 파편화된 존재, 또는 존재의 파편화 앞에서 당혹해 한다. 게다가 혐의에 부쳐지는 것은 다만 이름과 정체성뿐만이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의 전체가 아닐 뿐 아니라, 실재조차 아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시각화된 비가시적 차원, 곧 그림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파편들로 만들어진 형상들은 다소 느릿한, 바라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장면으로 이름도 없으며 실재이기를 거부하는 변질된 부재이다."(김병걸) 작가는 그(것)들이 존재를 앞서는, 즉 존재보다 더 존재에 가까운 부재라고 말한다. 작가는 그 이상으로, 즉 부재를 통하지 않고서 존재를 설명하려는 방식들에 대해 회의하고 있다. "사각의 파편들은 결국, 본질에 대한 성찰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내용없음'의 코드이기도 하다." 결국 이 파편은 진실과 허구, 실체와 이미지, 현실과 현실의 이면, 궁극적으로는 존재와 부재 사이의 이분법을 둘러싸고 형성되는 타성에 젖은 형이상학적 방법론들을 문제 삼는다. 이 도전으로 인해 전체와 부분, 단수와 복수의 이분법이 결정적으로 교란된다. 파편들이 전체를 구성하는 만큼, 전체는 언제든 다시 파편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 존재의 기초단위가 되는 이 사각의 파편들은 먼 과거에서 도래한 기억의 요소들일 수도 있다. 'Beginning', 즉 기원, 또는 사물의 시작의 시각적 부호! 이 본래성, 원점, 기원, 그것이 김병걸의 모든 대상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김병걸의 세계는 초현실적이지도, 탈현실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부재로부터 전개되는 존재의 지평이며, 탈 역사로부터 다가오는 역사의 지평이다. 그 시간과 공간은 보이거나 경험될 수 없지만, "예전부터 가까이에 있었던 것들이다." 이 지각될 수 없는 것에 형태를 부여하고, 그것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 작가의 작업인 것이다.

김병걸_Shake-horizon 01_람다 프린트_74.5×200cm_2007
김병걸_Shake-forest 02_람다 프린트_102.5×180cm_2008

2. 존재와 존재의 바깥, 포착과 산화 ● 개별적이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욕망이며, 운명적으로 갈등을 야기 시킨다. 따라서 개인을 넘어서는 것은 오랫동안 철학과 예술의 중요한 동기요 궁극으로 인식되어 왔다. '혼자'라는 것은 실존주의자들의 주제다. 실존이란 홀로됨의 절망, 또는 개별화되어 동떨어진 불안 속에 있는 것을 가르킨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임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존재와 달리(Autrement qu'etre)'를 말했던 것이다. 잘 알려진 모더니즘 건축가인 루이스 칸은 하나의 아이디어가 개인적인 경험을 초월하게 될 때, 비로소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집단적 경험으로 나아간다 했다. 예술가가 자신을 넘어설 때. 비로소 자신의 예술이 모두에게 소속된 것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이 동떨어진 개별성을 넘어섬, 또는 자신을 넘어 모두에게 나아가기가 김병걸의 「마젠타. Magenta」를 읽는 틀이 될 수 있다. 그럴 때 「마젠타. Magenta」는 (신체적 접촉에도 불구하고) 에로티즘이 아니라 존재론적 미학의 지평에서 읽혀져야만 할 텍스트인 것이다. ● 김병걸의 작업은 공간에 은밀하게 부유하고, 정지의 모습으로 흐르고, 부재를 통해 존재하는 것들을 인식하고 붙잡아내는 연습이다. 우리의 인식적 습성이나 한계로 인해 누락되는 언어, 공중에 부유하는 언어들로부터 듣는 것이다. 그것은 기록되지 않은 기록들이고, 발화되지 않은 소리들이다. 이 대기에 부유하는 것들은 태고의 기억이거나 제도화되지 않는 역사의 질료일 수도 있다. 작가는 그것들, 철자법 없는 언어들, '부유하는 시간의 문자들'로 사실 이면의 사실들을 구성한다. ● 하지만, 잡힐 수 있다면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공간이 부재의 모습을 하고 있는 존재로 가득하다면, 그래서 부재로부터 존재의 요인들을 포착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역으로 존재하는 것들에서 부재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것, 존재를 부재로 돌려보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작가가 최근에 시도하는 「Shake-Fire」연작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붙잡혀 있던 것들, 존재 안에 유폐되어 있던 것들, 동떨어져있던 언어들을 '존재의 바깥'으로, 이름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으로, 부재의 공간으로 되돌려 보내기에 해당될 수 있다. 책을 태우는 것은 언어를 존재의 감옥에서 부재의 창공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책의 페이지들이 타들어감에 따라 문자들이 산화되어 대기 속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이 사라짐은 지나치게 우리 개체화된 존재의 관점에서만 기술한 것이라는 측면이 있다. 정확히 하자면, 문자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보다 시원에 가까운 양태, 부재와 암시의 차원으로 들어간 것이다. 일테면 존재의 바깥에서 존재하기인 것이다. 포착하는 대신 포착할 수 있도록 공중으로 산화시키는 작업인 것이다. ● 그러므로 작가의 '태우기'를 존재에 대한 무정부주의적 반란, 문자에 대한 성상 파괴주의적 이해, 문명에 대한 상징적 폭력으로 이해해선 곤란하다. 오히려 그것은 부재를 보완하는 것이요, 이면의 존재를 채우는 행위인 것이다. 존재와 부재, 또는 존재와 존재의 바깥, 이 두 세계는 두 개로 양분되어 있지 않은 사실상 하나의 공간이다.

김병걸_A silent bird_아크릴에 혼합재료_110×40×36cm_2008
김병걸_Red Signal_람다 프린트_76.4×200cm_2008

3. 흔들기(Shake): 윤곽의 후퇴, 대기의 미동, 세계의 증폭 ● 우리의 이성은 자주 정의를 내리려는 함정에 빠진다. 과학은 생명을 정지 상태로 간주하는 탓에 그 일부를 떼어 관찰하는 것으로 충분히 그것에 접근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오류는 우리의 인식이 정지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것이 되곤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은 '흔들리고' 있다. 존재 자체가 이미 움직임이고 변화며, 따라서 그 자체는 정의적 인식의 범주를 벗어나 있다. 하이데거가 지적한 바 있듯, 존재는 이동하고 있고 진보하거나 후퇴하고 있다. 우주는 팽창하고 있으며, 나무는 자라고 있고, 물은 흐르고 있다. 단 한순간도 정지되어 있지 않으며, 한 평의 땅도 운동과 무관하거나 작동이 정지된 상태가 아니다. 돌은 부단히 돌이 되어가고 있거나 흙으로 분해되고 있는 중이다. 물은 위태롭게 액화의 상태에 머물거나 서서히 기화되어 가는 중이다. 그 흐름, 자람, 팽창, 축소는 우리의 정의적인 지식을 교란하고 무력한다. ● 이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그것을 다루는 다른 종류의 지식을 필요로 한다. 정지 속에서 작동을 일깨우는, 명칭 속에서 탈 명칭을 발견하게 하는, 현재 속에서 과거의 입자와 미래의 알갱이들을 포촉하게 하는, 예컨대 오늘의 나무에서 예전의 나무를, 지금 발아래 구르고 있는 돌에서 중세의 성을 쌓았던 바위들과 마주하게 하는 지식을 요구한다. 대체 어떤 지식이 우리로 하여금 오늘날의 화가와 시인에서 르네상스기나 인상주의 시대를 살았던 화가와 시인들의 영혼의 결을 느끼도록 할 것인가? ● 이 질문이 바로 김병걸의 것이다. 그는 우리의 인식이 어느 정도 완화되고, 지각이 교란되고, 과학적 이성이 후퇴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한 세계를 보여주고 싶어 한다. 이를 위한 김병걸의 방식은 존재와 사물의 '흔들기'이다. 그 흔들기에 의해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오던 것들 사이로 그것들의 정의를 교란하는 틈들이 규칙적으로 개입한다. 이 틈의 개입, 이미지의 연장, 흔들기로 인해 작가의 세계는 유동적인 것이 된다. 숲은 훨씬 많은 것들을 머금은 것이 되고, 도시는 더욱 황량한 것이 된다. 윤곽은 후퇴하고 대기는 미동하며, 세계는 증폭된다. ● 그렇더라도, 시각적 효과 자체에 너무 의미가 부여되어서는 안 된다. 그 후퇴, 미동, 증폭이 문제 삼는 것은 정작 우리의 인식기제와 태도 자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의론적 지식을 넘어서는 사물들, 우리가 결코 볼 수 없는 것들을 담고 있는 대기, 지각범주 바깥의 공간에 대한 인식으로 이끄는 것이다. ●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답을 내리는 것은 예술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다행스럽게도' 관람자의 몫일 수밖에 없다. 이는 예술가의 임무가 가볍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좋은 답은 좋은 질문으로부터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질문이 적절하다면 모색의 방향 또한 적절할 것이다. 이 시대의 문제는 잘못된 질문을 제기하는 것에 있다. 아예 질문을 건너뛴 채 허투루 답을 제시하려는 시도들도 부지기수다. 이러한 결과는 자신의 결론으로 타자를 설득하려는 오만한 태도로부터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태도는 예술정신이 지녀야 할 덕목과 가장 거리가 먼 것이다. 혼돈의 시대를 지나는 작가에게 주어진 임무는 자신의 고독과 노동으로 직조된 정제된 질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 심상용

Vol.20081029a | 김병걸展 / KIMBYUNGGOL / 金柄杰 / photography.sculpture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