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08_1024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아트센터 Gan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평창30길 28 (평창동 97번지) Tel. +82.(0)2.720.1020 www.ganaart.com
오수환의 추상-무작위(無作爲)의 작위(作爲) ● 오수환은 한국 현대 추상회화의 한 흐름을 장식하는 중요한 작가다. 한 예로, 추상의 원로 격인 김병기 화백이 최근 오수환을 "동양과 서양의 접목을 이야기할 때 의당 논의에서 빠질 수 없는 작가"로, 그가 "동양 서법의 획(劃)을 만드는 선의 구성을 통해 너무나 한국적인 서양화를 만들고 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또한, 1990년 이후 미국, 유럽, 일본 등의 외국화랑들에서의 개인전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얻은 오수환은 이제 국제적으로도 한국을 대표하는 순수추상 화가의 한 사람으로 자리 잡고 있다. ● 그동안 오수환의 추상과 관련한 미학적 논의들은 다소 애매모호한 뉘앙스를 품은 채, 대부분 '동양적인' 때문에 한국적이기도 한 형이상학에 그 초점을 맞추어 왔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에 관한 어느 글을 읽어보아도 핵심용어(key word)가 비슷하다. 예를 들어, '노장(老莊)사상', '무위(無爲)', '우연(偶然)' 등이 대표적이다. 거기에다가 부친의 영향 아래 일찍이 서예와 한학을 익힌 그의 성장배경을 염두에 둔다면, 서화일체(書畵一體)의 동양의 전통이 오수환의 추상에 흡수되었으므로 이러한 미학적 논의는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 오수환의 추상은 양식적으로 그린버그식의 모더니즘이 우리 미술계 내에서도 그 절정에 다다랐던 1970년대의 미학적 논의들과 그 맥을 같이 한다. 한편, 유신체제 이후 박정희 정권의 집권전략적인 차원에서의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에 관한 각성은 이러한 미학적 논의들에 힘을 보탰다. 추상의 개념과 형식은 서구의 현대적인 영향이되, 그 모체의 사상과 철학은 서양과 맞물린 반작용으로서의 동양에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나름대로의 독창성을 획득하고자 했다. 이러한 논의들은 일련의 매카니즘(mechanism)으로 확산되어 지금껏 오수환의 추상도 이 범주 내에서 다루어져 왔다.
「곡신(谷神)」시리즈로 대표되는 오수환의 1990년대 중반까지의 작품들은 추상표현주의적인 또는 앙포르멜 류의 밀도감과 순발력, 거기에 무작위의 서체적 점과 선들이 형성한 형태, 낙서, 기호들이 강렬하게 난무하는 표면장력이 강한 추상이었다. 때로는 작가의 신체적 리듬과 조형의 심리적 리듬을 반영하듯, 단아한 자태의 점과 선들이 여백 속에 자신들의 존재를 조용히 드러내며 뽐내기도 한다. 이러한 작품들에는 '단색조'의 평면과 기하학적 '반복'의 리듬이 없었다. 때문에 같은 순수추상이라 하더라도 색면추상이나 미니멀리즘과는 그 성격을 달리했다. 오히려 톰블리(Cy Twombly)나 펭크(A. R. Penck) 또는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등을 합친 것 같은, 그런 형식의 연장선상에서 서체적인 획들이 독창적인 정체성을 드러내는 오수환 나름대로의 작품들이라 말할 수 있다. 또한, 1990년대 후반의 작품들에서 등장하는 굵고 투명한 붓질의 여백과, 추상의 한계를 비웃는 듯한 과감하고 절제된 획들과 색면들은 그동안 쌓아온 작가의 내공을 말해주는 듯 어떤 힘과 깊이의 확신성을 조형으로 느낄 수 있었다. ● 최근 오수환은 뚜렷하게 전체의 화면을 분할하여, 혹은 전체를 색면으로 처리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과거, 배경의 역할로 또는 1990년대 후반의 「적막」시리즈들처럼 선과 점들로부터 대비되는 면이 이분법 체계 내에서 부분적인 색면으로 존재했었다. 그러나 최근의 작품들에서는 점, 선들과의 동등한 가치로서의 색면이 균질하게 전면에 부각되었다. 균질한 색면은 보다 전통적인 오방/오간색의 느낌이 강해, 마치 굿판 앞에선 무당의 옷 색깔 같다고나 할까? 과거, 화면을 난무하던 점과 선들이 행위의 신체적인 힘의 율동을 강약으로 실은 무당의 칼끝 같다면, 신기(神氣)가 오른 무당의 도포자락 같은 무색(巫色)이 지금의 색면이다. 때문에, 금새 눈에 차는 감 칠 맛의 세련된 감각의 색감은 아니지만 무언가 어눌하나 묵직하게 잡아끄는 저력(底力)을 지닌 색감이다.
오수환의 작품은 신명나게 끝난 무당의 한 판 굿거리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신명난 한 판의 굿을 보듯 오수환의 최근 작품들은 이제 서체적인 특징마저도 벗어난 일탈(逸脫)의 자유스러움으로 차있다. 그의 일탈은 논리와 이성의 치열함으로 오랜 시간 쌓이고 쌓여 형성된 서구의 추상과 지금은 그 격을 달리한다. 오히려, 조형의 형식적 완결성을 비웃는 듯 유아적 유희로서의 본능에 충실하다. 그래서인지 "욕망에서 벗어난 착한세계를 표현하는 것이 궁극목표"라고 이야기하는 작가와 필자의 견해는 일맥상통한다. 실제로, 오수환은 세 살이 된 손녀가 보내온 유희의 낙서 같은 드로잉을 그대로 확대하여 자신의 추상작품으로 환원한 경우가 있듯이, 이런 측면에서 그가 표현한 '착한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때 묻지 않은 세속적 욕망 이전의 상태로, 그래서 본능에 충실한 가공하지 않은 카오스의 세계 같은 것? 일체의 인위적인 껍데기를 제거한 뒤 찾아오는, 본연에의 충동으로 신들린 무당이 추는 무질서의 칼춤 같은 것? 아마도 작가는 자신이 그린 서체적인 무작위의 형태와 기호, 낙서 같은 추상의 선들을 염두에 두었다면, 이 얼마나 관념적인 '착한 세계'인가? 무릇, 이러한 세계는 관념으로만 존재할지도 모른다. ● 유아적 유희 본능과도 같은 이러한 무작위(無作爲)의 '착한세계'는 조형적인 표현으로 가능한 것일까? 그것은 오로지 상징과 관념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표현에 따르는 작가의 행위가 무념(無念), 무상(無想), 무위(無爲)의 형이상학이 깃든 우연(偶然)일지라도 그것은 작위(作爲)적 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수환은 무작위적일 것 같아 보이는 점과 선의 형태들을 수 천, 수만 번, 아니 셀 수 없을 정도로 연습한다. 이 사실은 그의 스케치북을 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다. ● 바꾸어 말하면, 작위적으로 무작위를 만들어 간다고나 할까? 겉으로 보기에는 설렁설렁 아이처럼 막 그릴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못하다. 무수한 반복으로 단련된 자신의 손에 대한 확신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거기에는 매번 그릴 때마다 달라야하고 새로워져야 하는 강박관념을 극복해야만 한다. 아마도 작가의 피를 말리는 조형적인 전략일 것이다. 물론, 거기서는 작가의 물리적인 신체적 리듬의 역학관계와, 그에 따른 직관의 심리적인 리듬이 교묘히 형태나 선들로 전도(傳導)된다. 즉, 구체적이면서도 주체적으로 자신을 외부로 드러내는 전략이 숨어있는 셈이다. ● 여기서 오수환이 그려낸 추상의 매력은 그 전도되는 과정에서의 같으나 천차만별한 조형적 교묘함에 있다. 이 교묘함의 세계를 '착한 추상'이라 명명한다면, 노자(老子), 장자(莊子)의 철학을 그의 작품에 대입하는 것보다 훨씬 이치에 맞지 않을까? 그리고, 보다 현실적이지 않은가? ■ 정영목
Vol.20081024e | 오수환展 / OHSUFAN / 吳受桓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