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08_1015_수요일_06:00pm
본 전시는 서울문화재단 젊은 예술가지원(Nart 2008) 선정 사업입니다.
관람시간 / 10:30am~06:30pm
노암갤러리 NOAM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7(인사동 133번지) Tel. +82.(0)2.720.2235~6 www.noamgallery.com
'경계에 서있는 풍경' ● 동양의 산수화가 당대의 우주자연, 삶의 공간에 대한 이해와 해명, 물음에 대한 도상화였으며 동시에 하나의 이상향으로서의 유토피아·도원경을 제시하는 그림이었다면 그것은 오늘날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아 보인다. 공간이 바뀌었고 삶의 조건 역시 달라졌기 때문이다. 더 이상 선인들처럼 산수 속에서 살며 그 산수·자연을 흠모하고 그곳으로 귀의하려는 욕구 대신에 도시 공간 속에서 적극적인 생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한다. 자연을 대신해 도시가 실질적인 삶의 조건이 되었고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제 도시에 낙원을 실현하고자 하며 그 욕망은 좀 더 '업그레이드' 되면서 갈수록 명품화와 고급화로 치닫고 있다. 여기에는 매스미디어와 광고, 이미지 전략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런 의미에서 도시는 결국 이미지다. 이미지이기에 그것은 허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또한 여전히 자연은 도시의 대척점에 위치하면서 도시인들의 황폐하고 스산한 마음을 위로하고 진정한 삶의 여유로움을 제공해 줄 수는 있지만 자연 자체가 대안이 되지는 못한다. 이미 우리의 삶은 도시에 길들여져 있고 그 도시는 더욱 팽창하고 번성해가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도시가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곳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 돌이켜보면 모든 산수화·풍경화에는 당시 사람들이 품고 있던 유토피아에 대한 믿음들이 서려있다. 도시공간 역시 현실 공간에 지상의 유토피아를 실현하려는 욕망 아래 가설되었다. 그러나 자연을 대신해 그 도시가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의 유토피아를 실현해준다고 믿기는 어려워졌다. 따라서 도시풍경을 그리는 작가들에게 그 도시는 좌절된 유토피아의 꿈, 허구적인 가짜 낙원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나형민은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의 도시풍경을 그린다. 그곳은 한국사회의 보편적인 풍경, 일상적인 도시풍경이다. 그 풍경은 또한 특정한 장소의 재현이라기보다는 작가의 관념 속에 자리한 도시, 현실풍경이미지다. 그는 "도시란 무엇인가, 우리를 둘러싸고 이 현실풍경은 어떤 것일까"를 그림 속에서 질문한다. 마치 산수화가 우주자연의 이치를 규명하고 그 공간을 지배하는 법칙에 대해 사유하는 그림으로서 기능했다면 그에게 도시풍경화는 자신의 삶의 이루어지는 이곳에 대한 해명의 성격이 강해 보인다. 그는 자신이 거주하는 현재의 공간, 풍경을 내려다본다. 관찰한다. 마치 영화 '베를린천사의 시'의 첫 장면에서 천사가 도시를 내려다보듯, 고담시를 내려다보는 배트맨처럼 말이다. 혹은 번화한 파리를 거닐던 벤야민이나 아니면 도원경을 꿈꾸며 산수를 소요하고 와유하던 옛 선비들의 동선을 연상시킨다. 그는 산수 대신 이곳의 현재 풍경을 다룬다. 그곳을 소요하고 그로인해 떠오른 단상과 느낌을 이미지화한다. 그것은 생각의 도상화이자 느낌의 구조화다. 그는 이런 저런 풍경의 편린을 모아 자신이 보고 느꼈던 도시·현실풍경에 대한 하나의 텍스트를 기술·'일러스트'한다. ● 그런데 그가 기술하는 이 도시, 현실풍경은 다소 비관적이다. 도시는 가짜 환상으로 모조된 곳이다. 도시는 수많은 이미지, 기호들로 뒤덮여있다. 그 이미지들은 일종의 유토피아를 시각적으로 확인시켜준다. 그러나 그 유토피아는 동시에 어디에도 없는 '유토피아'에 다름 아니다. 도시는 영속성보다는 일시성의 연속이다. 그 시각적 컨텍스트는 연속적인 전체가 아닌 다양한 조각으로 이루어진 콜라주로 파악된다. 혼돈과 일시성, 전체성을 함축하는 관료적 도시모델(통일된 전체)에 의한 지속적인 파괴와 자본가의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자율성에 의해 생성되는 비이성적이고 파편화 된 곳, 그곳이 바로 이 도시공간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왜 도시에 기거하고 있고 도시의 삶을 공경하는 것일까?..실체적인 도시의 모습이 아닌 이상화된 도시 이미지를 동경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도시의 가치가 '효용가치'가 아니라 인간의 욕구를 채워주는 상징적 기호와 이미지에 의해 가치가 결정되는 '교환가치'로서 도시의 상이 결정되기 때문이다...우리를 둘러싼 도시의 가상적 기호와 이미지들은 도시의 실상을 실체로부터 분리시키고, 그것들을 스크린 표면 위에 이상적으로 재포장함으로써 도시의 현실을 간과하게 만든다. 즉, 오늘날 도시 이미지는 산수화의 관념화, 이상화와는 달리, 리얼리티 자체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사실보다 더 사실적으로 잘 구성하기도 함으로써 실제적인 도시를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시는 보다 더 현실적인 '하이퍼리얼리티가 되어 현대인들에게 보다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그러므로 도시는 가고 싶고, 보고 싶고, 기거하고 실은, 즐기고 싶은 향유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그럼으로써 기의와 기표로서의 산수화 산수화의 전통적인 기호 의식은 붕괴되고 그 자리를 현대 도시의 이미지가 대체함으로써 산수화가 제시하였던 도원경의 역할을 도시의 가상성이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나형민)
그림 속에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도시풍경이 둥실 떠있다. 구름이 뭉개뭉개 피어오르고 더러 새들이 날아간다. 덧없이 사라져가는 순간의 모습 같기도 하고 여유롭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작가는 구체적인, 특정한 장소를 그렸다기보다는 도시를 대변하는 혹은 현재의 이곳 풍경을 상징적 이미지로 연출하고 있다. 그 풍경은 하늘을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달처럼, 비행접시처럼 떠있고 부양되어 있다. 수평으로 자리한 그 풍경은 지극히 건조하고 담담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렇게 떠있는 모습이 다소 위태롭기도 하고 불안하고 찰나적인, 안타까운 생의 거주공간을 연상시킨다. 그런가하면 수평으로 자리한 적조한 풍경은 공허하면서도 출구 없는 도시풍경, 현실풍경을 암시한다. 그러나 현실과 환상이 기이하게 경계를 맞대고 있는 이 풍경은 단지 도시에 대한 비관적 인식으로만 기울거나 도시가 제공하는 유토피아에 함몰되는 데서 벗어나 그 사이, 경계에서 진동한다. ● 우리가 거주하는 일상적인 도시풍경 혹은 한적한 어느 풍경을 잡아내고 있는 이 그림은 황토빛으로 적셔져있다. 모필을 공들여 발라나간 흔적은 황토색 물감을 수묵처럼 다루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모노톤으로 조율된 현실풍경은 강렬하게 빛나는 파란 하늘과 어울리는 듯 하면서도 꽤나 이질적으로 위치해있다.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이나 말이다.
빽빽한 건물과 간판, 박제처럼 자리한 나무가 몇 그루 서있는 적조한 풍경에는 인적이 부재하다. 사람이 지워진 풍경은 순간 비현실감을 안긴다. 비근한 도시의 골목길과 계단, 주택단지, 그리고 빌딩과 간판들이 가득한 풍경은 조합된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사람들이 다 떠나가 버린 바닷가에 폐허처럼 방치된 허름한 건물도 등장한다. 그 건물은 '출입구'라 쓰여진 문구를 각기 달고 도열해있거나 '무지개언덕'이라 쓰여진 간판을 명패처럼 달고 있다. 그 문구가 도시 혹은 공간에 대해 사람들이 욕망하는 실체를 직접적으로 발설한다. 도시는 그런 문구와 이미지로 가득하다. 전국의 모든 도시의 입구에는 '가장 살기 좋은 도시'란 문구를 기념비적으로 달고 직립해있다. 수사(레토릭)가 현실을 대체하고 허구가 실체를 뒤덮는다. 도시는 그런 의미에서 거대한 이미지다. 도시는 너무 많은 이미지들과 볼거리들로 흘러넘친다. 아울러 무수한 활동들이 전개되고 지칠 줄 모르는 욕망과 소비와 증식이 자가 발전적으로 생성되어 간다. 규범도 질서도 취향도 없는 이 '정체성 불명'의 정체가 현재 도시의 초상 같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 사는 이들은 자연스레 도시란 공간의 모습을 제대로 보고 싶다는 욕망이 인다. 도시를 거닐며 이곳을 새삼 다시 본다. 그래서 작가는 도시를 어슬렁거린다. 그는 하염없이 종이를 소비하면서 도시가 버린 스펙타클을 주워 모은다. 도시의 모습에서 자신의 욕망과 감각, 상실과 아픔을 본다. 자신의 상처를 만난다. 발터 벤야민의 말대로, 그는 '넝마주이'다. 그러나 바로 그 넝마와 같은 것들 속에 무언가가 있다. 그것에 도시의 성질, 인간들의 본성, 우리의 시선 등이 어지러이 얽혀있다. 그렇게 얽힌 실타래를 그림으로 하나씩 풀어내고자 한다. 대도시라는 새로운 공간은 그 자체는 벤야민의 지적처럼 하나의 커다란 "도서관"이며, 더 나아가 현실을 반영하는 하나의 커다란 "거울 도시"와 같은 역할을 한다. 작가는 도시가 결국은 커다란 판타지 이미지에 머물고 있음을 깨닫는다. 진정한 유토피아는 이 지상도시에 가설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대신 그는 그림 안에서 우리가 미처 체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공간에 대한, 어떤 경계를 넘나드는 환영, 예술적 체험을 안기는 한편 현대인들에게 공간의 정체성에 대한 환기를 불러일으키고자 한다.
그의 그림은 일종의 다큐멘터리적이고 분석적인 힘을 갖고 있다. 그 이미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도시와 실제 몸으로 겪고 있는 도시 사이의 간극을 알고자 하는 욕구의 산물이다. 그가 본 서울(나아가 한국의 모든 공간)의 초상, 그렇게 발견하고 체득하고 응시해서 재현한 이 그림에 들어와 박힌 공간은 우리로 하여금 익숙하고 낯익은 공간을 새삼 낯설게 바라보게 한다. 그 거리 사이로 이상한 의문과 기이한 생경함이 서식한다. 다시 내 삶을 되돌아보고 그 삶을 추동시키고 흡입해내는 공간을, 공간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을 그리고 그 공간의 이면까지도 '다시 보게' 한다. 그림의 힘은 그 자리에서 소리 없이 부풀어 오른다. ■ 박영택
Vol.20081015c | 나형민展 / NAHYOUNGMIN / 羅亨敏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