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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08_1002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주말_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스케이프 GALLERY skape 서울 종로구 가회동 72-1번지 Tel. +82.(0)2.747.4675 www.skape.co.kr
세상을 보여주는 얼굴 ● 무척 '쎄고' 좀 으스스한 여자상이 다양하게 도열해있다. 단독으로 혹은 둘, 셋이 모여서 정적과 고독 속에 침잠한다. 정면을 응시하는 것도 있고 측면을 보여주는 얼굴도 있다. 조금은 무섭기도 하고 괴기하기도 하지만 또한 귀엽기도 하다. 기존에 익숙하게 보았던 인물과는 무척 다르다. 그 얼굴은 분명 누군가의 얼굴로부터 파생되어 나와 작가의 기억에 의해 재구성되고 변형, 해체 혹은 작의적인 훼손으로 변질(?)된 얼굴이다. 작가는 누군가의 얼굴을 보고 자신의 직관에 의해 파악된 그 어떤 느낌을 회임하고 일정한 시간을 기다려 출산하듯 하나의 얼굴을 그렸다. 눈과 입, 눈물과 피, 머리카락만이 부동의 몸에 균열을 일으키며 상처처럼, 아픔처럼 응고되어 있다. 대부분 먹만으로 그려지고 칠해진 화면은 묘한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다. 그 어두운 배경, 바탕을 등지고 크고 둥근 얼굴이 달처럼 부풀어오른다. 동공이 사라지고 온통 검게 칠해진 인형을 닮은 커다란 눈, 사라진 눈썹과 귀, 반듯한 가름마, 잘 빗은 머리, 안면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조리 삼켜 버릴듯 증식을 거듭하며 자라는, 숲처럼 무성한 머리카락, 작은 코와 콧구멍, 그만큼 작은 입술과 더러 벌어진 입술 사이로 보이는 치아, 퉁퉁한 살을 거느린 몸, 모나리자가 입은 주름이 잡힌 드레스를 연상시키는 흰 옷이 그 얼굴과 함께 다가온다.
이콘이나 성화의 익숙한 도상이나 불상의 의습이 떠오른다. 관습적인 종교화의 도상을 빌어 기이한 얼굴을 오버랩 시키고 있다. 그런가하면 아프리카나 네팔의 가면 같기도 하다. 단순화시킨 얼굴에 눈만 구멍처럼 뚫려 까만 응시를 전한다. 인물들은 한결같이 먹으로 채워지고 적셔진 눈을 지녔다. 김정욱은 눈을 통해 자신이 보고 읽은, 감지한 인간을 형상화한다. 기술한다. 더러 마스카라 번진 까만 물이 눈물과 함께 흐르고 '피눈물'같은 것들도 얼룩처럼 스며들어있다. 인간의 얼굴에서 눈은 감정을 드러내는, 감출 수 없는 치명적 부위다. 세상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내보이는 눈, 그래서 너무 많은 시간과 그 시간의 양만큼 눌린 기억과 상처를 간직한 눈을 본다는 것은 좀 슬픈 일이다. 얼굴이 아니라 눈이 결국 이 인물들의 내면이랄까, 마음과 정신, 굴곡 심한 사연과 주름잡힌 상처의 결들을 찰나적으로 보여주다 멈춰있다. 커다란 눈이 먹을 머금고 침침하다. 보는 이들은 그 눈에서 눈을 뗄수 없다. 강렬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보는 이를 마냥 빨아들일 것도 같다.
보는 이들은 그 눈에 함몰된다. 빨려 들어간다. 그것은 깊고 가늠하기 어렵고 신비하고 공포스러운 구멍이다. 자궁같은 눈, 텅빈 구멍 같은 눈이다. 그림 속 얼굴의 시선을 통해 나는 대상이 되었다. 타자와의 만남은 내가 대상이 되거나 아니면 그가 대상이 되는, '시선의 싸움'이다. 바라보는 자는 시선이고, 바라보여지는 자는 눈이다. 이 그림 앞에서 나는 부득불 눈이 된다. 하나의 대상으로 자꾸 얼어붙는다. 얼굴 이미지가 주는 강도 못지 않게 나는 수묵과 모필의 매력을 극대화시키면서도 그것을 자신만의 독자한 그림 안에 조율하는 작가의 힘을 느낀다. 그 힘에서 새롭고 신선한 수묵화의 매력을 환기 받는다. 먹색의 스펙트럼이 대단히 넓고 모필을 유희하는 감촉이 견고하다. 기존의 다소 상투화되거나 습관적인 먹의 쓰임이나 모필의 활용에서 벗어나 수묵이란 재료를 자기가 그리고 표현하고자 하는 '느낌'을 펼쳐내는 쪽으로 몰고 간다. 여기서 수묵이란 재료는 당대의 삶의 감수성이나 그녀가 보고 읽어낸 얼굴, 그 얼굴로부터 번져나가는 또 다른 세계의 비전을 보여주는 쪽으로 환생한다. 그리고 이런 측면이 우리 조상들이 초상을 통해서 표현하고자 했던 정신/전신傳神과 만난다. 김정욱은 사람의 얼굴에서 모든 것을 읽어나간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전생에 무당이나 심령술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녀의 작업실을 나오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이는 도대체 내 얼굴에서 무엇을 감지하고 읽었을까?" ■ 박영택
김정욱의 '잔혹동화' 이후 ● 2006년 개인전 이후, 김정욱이 새롭게 그리기 시작한 인물화에는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얼굴이 화면 꽉 차게 차지하는 이전 그림과 달리, 인물의 상반신이나 전신이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고, 한 인물이 화면 전체를 장악하기보다는, 다수의 인물이 화면 속에 포진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인물에 대한 단서가 많아지고 인물들 사이에 일정한 관계가 형성되면서 화면 안에서 들려오는 이야기가 좀 더 길어진 느낌도 든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인물화는 작가가 90년대 후반 즈음에 주로 그렸던 그림에서도 꽤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인물의 생김새나 전체적인 배치방식 그리고 공간구성의 결과는 영판 다르지만 말이다. ● 예컨대 90년대 말의 그림에는 주변에서 흔히 보는 가구나 소품이 등장하고 인물의 복장이나 헤어스타일도 약간의 변형은 있지만 현실에 있음직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핵심적으로, 이들은 너무 스키니하지만 어쨌든 아직 '사람'인 것이다. 그에 비해 완전히 블랙 아웃된 배경화면에 주로 성장盛裝을 하고 나타나는 요즘의 주인공들은 부풀어 오른 인형의 얼굴과 인조 몸뚱이를 갖고 있다. 이분법적으로 말하는 게 용인된다면, 변형의 효과가 전자에서는 표현적이었다면 후자에서는 흡수적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화면에서 우리 쪽으로 무언가 배출되는 기운이 강했다면 이제는 화면 안으로 빨아들이는 힘이 훨씬 더 쎄졌다는 말이다. 한편, 앞의 화면구성이 실존적 리얼리즘을 확보하고 있다면 뒤의 것은 일상적 판타지를 건드린다고 할 수 있다. 20대의 황폐한 심리상태나 팍팍한 현실의 국면들이 앞의 그림들에서 감지된다면, 이제 뒤의 그림에서는 자폐적인 세계 나름의 질서정연한 독자성이 그 국면들 사이사이에 끼어들어서 반짝거리는 순간들이 자주 포착되기 때문이다.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90년대 후반의 그림들이 구술하는 이야기들은 저마다의 개별적인 사연이 변조된 팩션의 성격이 강하다면, 최근의 것은 일련의 그림 전체가 그 층위가 다른 몇 가지 내러티브로 연결되는 메타 픽션에 기초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막상, 작가는 앞의 그림이나 뒤의 그림이나 모두, '관계'에 대한 것이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결국 어떤 관계이냐가 그 차이의 요체를 이룰 텐데, 요컨대, 앞의 그림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라면, 뒤의 것은, 내가 보기에, 그것(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과 그림 사이의 관계에 대한 사유까지를 촉발한다. 작가가 했던 말 - "인형이 인형만은 아니잖아요."라는 말을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인형은 사람의 모습을 본떠 만든 것이지만, 일단 만들어진 다음에는 사람 곁에 두고 보고 만지고 결국은 사라지게 되는 사이클을 따라, 인형 자체의 존재감과 생명력 심지어 예지력도 같이 순환하게 된다(고 우리는 믿는다). 같은 맥락에서 사람의 입체 초상representation에 해당하는 인형은 재현representation의 세계를 다루는 그림에 대한 일종의 메타포로서도 차용될 수 있다. ● 물론 이 경우, 그림의 재현적 측면은 복제나 유사성이라는 미술사적 의미보다는 다시 쓰거나 말한다re-present는 문화적 실천의 영향력을 더 강조한다. 2006년 이후 김정욱의 그림에서 부각되는 인형의 눈동자나 의상의 드레이프, 강도가 한층 세진 피와 눈물 또는 피눈물, 그리고 피부 위의 크고 작은 상처와 금세라도 부서질 듯한 몸통의 크랙 등은, 그의 재현적 실천이 동화나 순정만화 또는 하이틴로맨스 소설에 대한 또 다른 '잔혹'버전임을 직감하게 한다. 대표적으로 잔혹동화의 비판성은, 실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라기보다는 정신분석적으로 도발적이며, 솔직히,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충격요법에 의한 각성효과를 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욱의 '잔혹'버전은 그림의 각본을 다시 구성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거기서 더 나아가, 화가답게, 그것과 맞물려있는 그림의 구조와 작동 방식까지 함축적으로 재구성하는 쪽으로 업그레이드된다. (중략)
화면 속에 등장한 사람의 레플리카 혹은 신인동성동형의, 이들 복수複數의 인형은 역설적으로 인간 존재의 특이성을 목도하게 한다. 사람이란 좀처럼 단독자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홀로인 자조차도 그 전후좌우엔 항상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가, 드러나 있는 나에게 간섭하고 개입하고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것이 그림자이든 거울이미지이든 아니면 하이드이든 도플갱어이든 혹은 때때로 조상신이든 간에 말이다. 그러므로 빙의憑依는 김정욱의 그림에서 별스러운 것이 아니다. 아니, 김정욱의 그림이야말로 현실세계로의 빙의, 곧 옮겨 붙음이다. 표구방식을 자세히 보라. 그의 그림은 프레임된 것이 아니라 프레임을 덮어씌우면서, 비로소 3차원에 속하게 된다. ● 동화의 결말. 눈이 먼 채 숲속을 헤매던 왕자는 라푼젤의 눈물이 닿으면서 치유된다. 물론 김정욱의 그림에도 피/눈물이 흐른다. 그러나 그의 그림이 단순히 세련된 괴기취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람과 그림, 시각적 재현과 문화적 '번역', 심리적 재생산과 자발적 치유의 다양한 이항관계들을 둘러싸고 전개될 이야기들의 포석을 미리 놓고 있는 것이라면, 차라리 주목해야 되는 것은 그림 속에서 하이라이트 되고 있는 아주 작은 손이다. 피/눈물의 찐득한 액체에 조응하는 이 단단한 '화가의 손'은 점토로 구운 구체관절인형의 그것처럼 섬세하며, 잠깐, 온기마저 느껴진다. ■ 백지숙
Vol.20081003d | 김정욱展 / KIMJUNGWOOK / 金貞旭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