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08_0813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인사아트센터 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41-1 4층 Tel. +82.(0)2.736.1020 www.insaartcenter.com
포스트 파라다이스: 욕망의 아름다운 거짓말 ● 유토피아는 인간의 욕망이 집합된 가상의 세계다. 인간은 그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희망과 좌절로 살아간다. 현대성 속에는 이런 유토피아에 대한 갈망이 녹아져 있음을 많은 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매일 증식되어 쏟아져 나오는 허튼 약속들 - 광고 혹은 유사한 정치적 발언과 비전 - 에 노출되어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또한 우리는 그런 세계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과학에서 찾는다. 얼마 전까지 우리가 숭배를 자청했던 황우석 박사와 그의 유전자 실험이 바로 우리의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이 가능하다는 또 다른 환상을 심어주었다. 솔직해 지자. 우리는 얼마나 더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까? 더 먹기 위하여 인간은 지금 자연을 이제껏 볼 수 없었던 폭력으로 갈취하고 있지 않은가. 이 폭식성이 바로 자본주의이고, 자본주의는 유토피아의 희망을 빌미로 제 살을 키워가고 있다. 그 결말은 어찌 될 것인가? 우리는 곧 보게 될 지도 모르겠다. 꿈꾸었던 유토피아가 디시토피아가 되는 것을 말이다.
류지선은 그런 막연한 공포를 감추고 있는 자본주의의 포장술을 적당하게 자신의 작법으로 활용한다. 먹음직한 과일들, 비싼 휴가비를 지불해야 볼 풍경들 그리고 눈이 시린 완전 무공해의 하늘 그리고 싱싱한 식물들이 그의 그림 속에는 아주 아주 야하게 펼쳐진다. 매끈한 표면질감과 색상의 불량스럽기까지 한 선명함은 마치 포장지 그림이나 이전의 극장 간판의 사기성이 다분한 사실주의를 고스란히 옮겨온 듯하다. 이 가벼운 존재론적 가벼움은 물론 의도된 것이다. 현대의 많은 작가들이 일부러 유치한 화법을 구사하며, 유희적이며 자기성애적 도취감에 빠져있는 것과는 다르다. 류지선은 보기보다는 진지한 구석을 갖추고 있는 건강한 작가다. 그는 단지 현대의 유행어를 잠시 빌려 쓰고 있을 뿐, 내적으로는 비판론자적 기질을 가졌다. 그의 작법은 바로 현 세태에 가볍게 동승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발언에 호소력을 싣고자 노력한 결과이다.
작가의 입은 먹거리에 대한 단순한 고민에서 시작했다고 토로한다. 이미 상용화되어있는 유전자 조작 식품들에 관한 것이었다. 필자 또한 쇠고기 문제로 가려지긴 했지만, 그것에 비해 절대 위험수위가 낮지 않은 유전자가 조작된 수입곡류에 대해 걱정한 터였다. 이상증식 유전자 조작 같은 느낌이 드는 그런 사물의 모습을 디즈니랜드와 비견될 그런 환각주의로 그려내고자 의도했었다고 말한다. 물론 역설적으로 그렇다. 한숨을 쉬며, 작가는 인간의 욕망과 필요가 만들어낸 인공적 자연의 형태가 그렇게 매력적으로 시각을 사로잡는 것에 놀라움을 표한다. 일례로 가자미 유전자를 가진 토마토를 들었다. 토마토는 그래서 아주 싱싱하고 단단한 껍질을 갖게 되었고, 운반이나 판매를 위한 좋은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데 결국 맛이 없어서 실패로 돌아갔다는 말을 했다. 실패가 다행인 것은 참 드문 일이다 라고 필자는 생각했다. ● 그의 그리기는 구상적인 재현에 합성기법을 더했다. 그러나 그것이 조형적 차원에서만 고안된 것은 아니다. 언급했듯이 현대의 과학기술은 얼마든지 다른 종들을 결합할 능력을 갖추었고, 그는 그것을 회화로 재연하고자 했다. 작품은 주로 식물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생생하고 동시에 희화적인 정물(?)을 보여준다. 작가의 소재 선택은 의외로 단순하다. "탐스럽다는 느낌이 드는 식물 열매이면 되고, 즐겨 찾는 먹거리이거나 소유욕을 불러일으킬 매개만 된다면" 하는 것이 선택의 원인이었다. 사과의 줄기에서 포도나 다른 과일이 맺히고, 선인장에서 사과가 열리는 그런 식이며, 또한 그 열매의 종류도 한 번에 갖가지이다. 고유한 모체에서 기형적 열매가 맺는 변이가 결정적인 모티브이다. 이것이 환상적인 초현실이라고? 천만에! 그런 가능성은 벌써 우리 곁에 와 있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들은 단지 예시나 암시가 아니라 현실일 수 있고, 무서운 반사상이 될 수 있다. 그런 결합은 단지 조형적인 문제에서 사회적인 비판으로 옮겨진다. 하나의 사과에서 수백 개의 더 많은 사과를 얻으려는 줄기찬 인간의 욕망이 예쁘게 녹아있는 저 이미지들은 섭리를 거스르는 인간의 인공적인 조합이 불러올 부작용에 대해서도 방백의 화법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사과는 작가에게 역사적 비유로서 그 의미론적 무게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기독교에서 원죄를 대변하는 선악과의 사과가 그렇다. 형상 너머에 있는, 즉 가시화된 풍요로움 너머에 도사리는 종말론적 현상으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뒤의 배경을 자세히 보면 빙하가 녹아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유토피아의 부작용이 가져올 미래(디스토피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배경의 등장하는 설산은 온난화를 예견한다. 이렇게 그림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읽혀진다.
이종결합은 사실 과학에서 보다 예술의 상상력에서 먼저 이루어졌다. 16세기 초 보쉬에서부터 시작된 이러한 이종결합은 20세기에 들어와 assemblage라는 새로운 조합기술에 의해 비논리적이며 이성적인 차원을 뛰어넘는 이미지들을 생산하였다. 그런 면에서 작가 류지선은 그런 전통 속에 작업을 수행하지만, 그는 그렇게 만들어진 이종결합체를 이질적으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의 이종 결합된 정물들은 오펜하임을 비롯한 이전의 작가들의 것이 지닌 기괴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직설법적인 표현을 지양하고, 기묘하게 그 대상을 탐욕의 대상처럼 만들어 놓는다. 즉 허구의 위험성을 허구의 아름다움으로 가릴 줄 안다는 뜻이며, 이것은 고차원적인 간접화법이 된다. 그러므로 개개의 모티브들의 의미론적 결합보다는 오히려 유전공학적으로 가능할 수 있는 실질적 결과들에 대하여, 오히려 허구를 추켜세우며 그것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그림들은 하나하나가 의미를 갖기 보다는 모여서 앙상블을 이루고, 의미도 결합된다. 즉 그림 내적 외적으로 전시상태를 만들어가며 종합되어진다. ● 더욱 큰 논제는 그림이 지닌 윤리적 성격이다. 지금까지의 설명으로만 보면, 작가의 그림은 환경보호의 캠페인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분명히 그런 사회, 정치적 차원의 윤리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그 태도는 진실하다. 그러나 이 태도는 (현대)미술의 본질 상 작품이 윤리교과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일반론에 부딪히게 된다. 예를 들면, 80년대 민중미술이 발언을 과도하게 드러나는 바람에 미적 완결성이나 미학적 가치가 떨어졌다고 보는 것과 유사한 비교논의다. 그러나 류지선은 그런 오류를 자신 특유의 유머로 빠져나간다. 특정한 시각적 재미야말로 그가 추구하는 또 다른 조형적 설득력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태도로 발언과 조형적 완성이라는 균형추 사이에 중심을 잡으려고 한다. 사실 필자는 그것을 되도록 늦게 찾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작가가 균형에 이르는 그 과정이 매우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두 가지 맥락이 균형 있게 나타날 수 있을까? 이전 작가는 자신의 석사논문 "현실비판의 다원적 표현에 관한 연구"에서 그런 고심을 노출하였다. 잠정적인 결과로 작가는 그림을 그림으로 보기로 하였다. 이것은 이전 이야기에 주력했던, 다시 말해 발언의 서사구조로 부터 거리를 유지하고, 보다 감각적이고 미학적인 작업을 치중하려고 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와 동시에 작가는 이미지의 (즉)물성에 대한 고민들로 생각의 시간을 보내는 것 같다. 즉, 어떤 형식과 방법론을 가지고 그려질 이미지의 즉물적 표현을 고조시킬까 하는 것이 그의 주된 걱정거리가 된 듯하다. 그러나 궁극적인 문제는 형식에 관한 것이 아니라, 결국 그의 발언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 매개체에 관한 것이었다. ● 다른 문제는 작가가 상관하는 것이 원본 없이 존재하는 이미지들을 더욱 원본처럼 혹은 마치 진실한 표본처럼 드러낼 수 있는 가이다. 가상의 형상(=이미지)를 진짜처럼 드러낼 것인가 아니면 그것이 가짜임을 더욱 진실하게 보여줄 것인가가 작가가 선택해야 될 방향성이 되고 있다. 끊임없이 유토피아를 (재)생산하는 현대시각문화에서 이 '원본 없는 복제', 즉 시물라크르 현상은 원본에 대한 논리적 혹은 합법적 연관성을 상실한 이 시대에 남아있는, 더 현실적으로는 인간의 소유욕에 상응하여 수치를 높이고 있으며, 허구의 구조를 형성한다. 부재는 허구를 정당화하는 필요조건이다. 이 논리 속을 작가는 파고들었다. 작가는 허구의 미감을 돋보이게 만들어 역설적으로 유토피아의 부재를 증명한다. 현재는 허구에 대한 비평적 조형의지가 필요한 시기이며, 류지선은 그것을 공감한 작가 중에 하나이다.
류지선은 이제 12번째 개인전을 치른다. 그는 그 사이에 다양한 작풍과 형식을 실험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강조되어야 할 점은 그가 현실과 사회에 대한 발언욕구가 강한 작가라는 점이며, 또한 그런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의 논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미적인 형식과 내용간의 균제가 있는 작품을 만들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점이 작가의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도 인간의 욕망 그리고 사회적 욕망이 주제를 이루고 있고, 그 결과로 나타날 사회적 현상을 상징적이지만 탁월한 간접화법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 상징성이 너무나 수사적인 면에 치우치지 않았으며, 가벼운 유머를 내포하고 있어서 나름대로 그림을 보는 즐거움도 얻어낼 수 있으리라 본다. ■ 김정락
Vol.20080815c | 류지선展 / RYUJISUN / 柳智善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