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MMY WAS BORN

정연수展 / JEONGYOUNSOO / 鄭瓀修 / painting   2008_0611 ▶ 2008_0617

정연수_방수요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9×98cm_2008

초대일시 / 2008_0611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노암갤러리 NOAM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7(인사동 133번지) Tel. +82.(0)2.720.2235~6 www.noamgallery.com

모성적 환상과 상상계적 페티시로서의 오브제 ● 여성 작가들에게 임신과 출산에 관한 모티프로 작업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은 일이다. 특히 정연수의 작품에 기본적인 모티프를 제공한 메리 켈리의 '산후일지'는 2세대 페미니즘 미술로 기록되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1973년부터 79년에 걸친, 그녀의 아들이 6살에 이르기까지 제작한 이 산후 기록은 다양한 양식의 재현매체-문학적, 과학적, 정신분석학적, 고고학적 관점을 총동원한-를 사용하였다. 아기의 발을 석고로 뜬 모형, 아기의 낙서, 아기의 속옷, 음식 차트, 그리고 자신의 메모 등의 기록물을 통해서, 작가는 모성의 생래적인 측면과 사회적으로 구축된 측면을 대비시키고 있다. 이 작품들은 여성으로서의 자신이 겪고 있는 사회적 불평등, 남성과의 관계에서 불리한 위상의 점유, 가부장적 억압에 관한 쟁점 등 심층의 이데올로기의 구조를 비판하고 고찰하고 있다. 그에 비하면 정연수의 작업은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에 따른 개인의 심리적 상황과 체험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볼 수 있다. 그녀에게 있어 육아의 시기는 엄마의 전능을 발휘할 수 있는 짧은 기간으로, 그로부터 세상에 관한 믿음과, 세상 사람들과의 공유라는 희망을 내면화하는 시기로 자리매김 된다. 그녀는 이러한 육아에 대한 믿음 속에서 갓난아이의 성장기록물을 통해 자신의 아이와 맺은 고유한 결합의 궤적을 그린다. 다시 말해 작가는 출산을 통한 새로운 생명체의 창조의 체험, 환상과 현실이 하나 되는 체험, 낯설지만 낯익어버린 유아용품에 둘러싸인 체험 등 자신의 고유한 체험과 상황을 미적 체험으로 승화시키고자 하였다. 특히 그녀가 집중하고 싶었던 것은 아이의 탄생이 아닌, 엄마의 탄생-이라는 전시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이다. 늘 아이에만 관심이 쏠려있는 기존의 관습적인 태도에 대한 비판이자 역설을 담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애초의 생각과는 달리, 작품에서 주체로서의 엄마의 탄생이라는 새로운 함의가 적절하게 표현되었는지 혹은 어머니로서의 박탈감이나, 여성성과 모성성의 어긋남과 미끄러짐의 과정에 관한 체험이 녹아있는지에 대해서는 미진한 느낌을 지울 수 없어 보인다. 다시 말해, 작가의 작품에 자신의 임신과 출산을 통해서 타자로서 소외되어가는 자신 혹은 식민화되어가고 자신의 육체에 대한 집중, 혹은 낯선 존재로서의 유아를 바라보는 시각 등 잉여의 상상력이 추가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럴 수 있을 때에야 그녀의 작품은 단순한 육아일기에서 벗어나 소외된 여성의 육체, 혹은 의미화의 특정 체계들 내에서 생산된 고정되지 않은 여성성에 대해 숙고하게 한다든지 하는 진정한 타자의 담론의 맥락에서 읽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정연수_첫 배냇저고리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35×65cm_2008
정연수_70호 누빔 내복상의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35×62cm_2008 정연수_70호 누빔 내복하의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2×34cm_2008

페티시로서의 유아용품 ● 정연수가 그려내는 유아용 의복, 수건, 이불, 양말, 손톱가위 등은 아이를 물신화하는 대상들이다. 특히 어머니에게 있어 유아용품은 상상계적 산물로서의 물신 즉 페티시이다. 작가가 유아가 아닌 유아용품에 천착하는 이유는, 그것이 언제나 엄마와 아이의 원초적 사랑의 관계를 확증해줄 보존물로서 남아있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예컨대, 유아는 자라지만 유아복은 더 이상 자라지 않으며, 유아는 그녀를 영원히 행복하게 해주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유아의 대체물들은 그녀의 모성적 환상을 지켜주는 동시에 상징계적 삶을 유지시켜 준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여성의 욕망은 언제나 여성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팔루스에 대한 욕망이며, 이 욕망은 팔루스의 대체물인 아기를 가지고 싶다는 것으로 드러난다. 즉 아이는 팔루스의 대체물이고, 아이를 드러내는 모든 산물은 페티시가 된다. 따라서 페티시스트들은 자기의 사랑 대상 즉 영원히 소망과 환상을 거부할 것 같지 않은 페티시를 가지고 완벽하게 행복하게 지내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전통적인 의미에서 페티시즘은 잃어버린 팔루스의 대체물이지만, 현대정신분석학에서 그것은 의미가 확장되고 진화되어 상상적인 모든 대상이 되며, 특히 라캉적 의미에서는 환유에 해당된다. 여기서 환유는 '헛것'(옆의 것)을 짚는 것이다. 그 '헛것'은 삶을 지속시켜주는 매개체 즉 '오브제 아'(objet a)이다. 따라서 작가에게 유아용품은 상상적 충족의 대상으로써, 헛된 삶을 지속시켜주는 대체물로서 기능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작가에게 유아용품들은 언젠가 말을 배우고, 상징계로 진입할 아이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지연시키는 일종의 '헛것', 즉 '오브제 아'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주지하듯 정연수의 작품은 정신분석학적 사례연구와 민족지학적 현지기록 사이에 존재하는 미술 프로젝트인 메리 켈리의 것과 닮아 있다. 성장해가는 아이는 어머니에게 잃어버린 어떤 것-페티시-이다. 켈리는 이 상실에 초점을 맞춰 아이가 남긴 것들, 기저귀, 유아복, 처음 휘갈긴 낙서, 처음 쓴 글자 등을 어머니의 물신, 즉 어머니의 욕망의 표식으로 제시한다. 동시에 그녀는 이런 흔적 옆에 일화나 이론적 내용을 담은 메모를 내놓는다. 이 메모들은 아이와 어머니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설명을 반박하기도 하고 확증하기도 한다. 이 작업의 결과물은 이른바, '일상생활의 고고학' 즉 젖을 떼고, 말을 시작하고, 학교에 다니고, 글을 쓰는 등의 일상생활이며, 또한 여성을 위한 상징적 질서의 어려움을 다루는 하나의 서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메리 켈리가 그의 아이가 가족, 언어, 학교, 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을,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제도들에 의해 아이를 상실해가는 작가의 반응을 기록한 것과는 달리, 정연수의 작품은 모성적 환상에 근간해 지극히 단순하게 대상에 접근해가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여기서 모성적 환상이란 상상계적 사랑을 지속하고픈 욕망의 반영이다. 그녀에게 모성적 환상이란 현실의 결여를 보상해주는 차원으로 상징계에서의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차원의 것이다.

정연수_천기저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46cm_2008
정연수_목욕타올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7×83cm_2008

다큐멘타리적 회화 ● 정연수는 모성의 물신숭배의 가능성에 대해 탐구한다. 굳이 탐구라고 언급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하나는 그녀가 아기의 성장기록을 담기는 하되, 보다 객관적인 접근을 위해서 아기가 배제된 유아용품을 일종의 다큐멘터리처럼 기록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작가는 유아용품을 그리되, 그 오브제와 캔버스의 사이즈를 1:1이라는 비율로 기록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그녀는 마치 사건 수사의 증거물을 찍듯이, 모든 사물을 가장 자세히 보이도록 정면으로, 그리고 거의 실물과 동일한 크기로 그려낸다. 다큐멘터리는 대상을 제3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즉 다큐멘터리적 시선이란 자신과 대상이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자신까지 포함하여 비판할 수 있는 제3의 시선을 의미하며, 그때에서야 비로소 의미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객관화하고 다큐멘터리처럼 기록하려고 했던 작가의 생각이 그림 속에서 적절하게 표현되었는지, 또한 왜 그러한 방법론이 필요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타당성 있는 접근이 필요하다. 다른 하나는 그녀가 오브제들을 극사실주의적 기법으로 묘사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재현하던 애초의 방법론은 시간이 흐를수록 인상주의적 기법으로 바뀌게 된다. 그것은 붓터치가 예민하고 섬세해지고, 색채는 희미하고 흐려져서 마치 그 대상이 원래 가지고 있던 속성들을 넘어서려는 지점까지 확장되고 있다. 그럼에도 작가는 오브제들을 다루되, 여전히 촉각적으로 사물을 쓰다듬고 있는 페티시즘적 속성을 담보하고 있어서, 자신이 그 오브제와 맺는 관계의 결을 여전히 잘 드러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쨌거나 정연수가 그려내는 오브제들은 작가 특유의 따뜻하고 온유한 시선을 감출 수 없어 보이는 요소들로 점철, 모성적 환상이 유지되고 있다. 유아용품이라는 강력한 매체-엄마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굳이 객관적인 형태를 취한다고 해서 모성이 희석되지는 못하며, 따라서 그녀에게만큼은 절대적으로 객관화된 대상물이 되기 어려워 보인다. 사실, 모성적 평화로움이란 사랑의 방식일 뿐만 아니라 투쟁의 방식이며, 부드러운 것만큼 분개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상스러울 만큼 평화롭고 이상주의적인 그녀의 출산과 육아의 기록은 의미 없는 공허한 기표에 불과할 수도 있는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다. 이것이야말로 그녀의 다음 작품의 과제로 숙고해보아야 할 지점이다.

정연수_75호 우주복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1×61cm_2008
정연수_토순이 기저귀정리함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37cm_2008

메두사의 웃음을 기대하며 ● 라캉에 따르면, 팔루스를 가지지 못한 여성은 상징계의 가장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고, 때문에 여성은 상상계와 더 가까이 있게 된다. 여성이 상징계의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상상계와 더 가까운 자리에 위치한다는 조건은, 여성이 남성보다 더 유연하고 덜 고정되어 있으며 더 불안정하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서 엘렌 씩수는 여성의 무한한 상상력과 환상의 영역을 찾는다. 그녀는 여성이 자신의 섹슈얼리티의 무한함과 복잡성에 관해 작업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육체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 육체란 바로 타자를 품고 있는 육체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여성의 모성체험이란 타자와 자신의 혼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절대적인 사건이다. 이로써 타자와 나의 경계 없음은 여성의 몸으로 기억하는 육화된 언어가 되는 것이다. 더불어 엘렌 씩수는 여성이 더 이상 메두사 신화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강조한다. 이제 여성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웃고 있는 메두사를 직시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메두사 신화에 따르면, 메두사의 머리를 보는 사람은 모두 돌로 변했다고 한다. 메두사의 머리는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며, 또 뱀 그 자체는 수많은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메두사는 자웅동체적 시각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웅동체가 함의하는 상징적 진실이 무엇인지 우리는 선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어쨌거나 돌로 굳어버린다는 것, 그 자리에서 얼어붙는다는 것, 그것은 '못 볼 것을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 '못 볼 것'이라는 것은 지배이데올로기가 금지하는 것, 혹은 숨겨진 차원의 은폐된 진리와 같은 것이다. 무엇보다 시각예술은 메두사처럼 관자를 단 한 번에 얼어붙게 만들 수 있을 때,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응시를 일으킬 때, 비로소 그 미학적 체험이 극대화된다. 따라서 모든 작품은 메두사를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정연수에게도 메두사를 보고 얼어붙듯, 바로 탈은폐-진리가 드러나는 방식으로서의 회화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구된다. ■ 유경희

Vol.20080612e | 정연수展 / JEONGYOUNSOO / 鄭瓀修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