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8_0402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평일_10:00am~07:00pm / 주말_11:00am~06:00pm
미술공간현 ARTSPACE HYUN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6번지 창조빌딩 B1 Tel. +82.2.732.5556 www.artspace-hyun.co.kr
이지영-인물원 풍경 ● 오밀조밀함과 촘촘함으로 형성된 지도는 자신의 거주하는 공간에 대한 임상학적인 접근과 관찰의 도해이다. 그것은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장소를 그린 풍경화이면서도 미시적 세계의 낯설음이 공존하고 시각에 의해 판독되는 풍경이면서도 그 위에 심리적이며 기억과 몽상적인 황홀한, 기이한 시선이 얹혀져있다. 복수의 눈들이 포착하고 그려낸 풍경화다. 원근법과 실경으로 그려낸 것이 아니라 마음의 지도화이자 고지도의 시방식 혹은 비일상적 환각이 만든 풍경/반풍경이다. 대부분 부감으로 본 시선 아래 사로잡힌 공간, 영역은 자신의 집과 마당, 동물원과 정원, 옥상 그리고 그 길로 다니면서 익숙하게 접하는 구조물 등이다. 대개 작가의 일상적 동선에서 만난 장면이다. 그 장면을 이미지화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살고 있고 늘상 보고 접하고 자주 가는 공간은 펼쳐놓은 지도처럼 보인다. 그 지도에는 깨알 같은 문장과 그만큼 작은 대상들이 옥수수 알처럼 박혀있다. 먹과 연필, 아크릴릭을 섞어 그리고 쓴 것들은 일종의 공간탐사의 보고서 같다. 작가에 의하면 그것은 '공간 구조와 그것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작가노트)에서 나온 것이다. 해석되고 읽혀진 공간은 결국 장소성에 대한 관심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낯설고 어색한, 다소 기이한 공간은 우리의 일상적 공간이다. 그러나 그 일상의 공간, 풍경은 어딘지 불편하고 어색하고 낯설다. 왜 그럴까? 그것은 단순히 공간구조의 문제만은 아니다. 공간은 여러 힘에 의해 조율되고 강제되어 편재된다. 공간은 삶을 규정하고 우리들 감성을 각인하고 기억을 유지하거나 훼손하고 육체와 감수성을 휘고 주무른다. 작가들은 그 공간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질문을 던진다. 동시대 작가들의 공통적인 관심이 바로 '공간'(일상과 현실)에 맺혀있다. 공간은 세계이기도 하다. 작가는 일상 속에 흩어져 있는 무수한 공간들을 다소 이상하게 바라보면서 그것을 그림으로 옮긴다. 너무나 당연시되어 버린 어색한 풍경! 그렇게 해서 그려진, 선택된 공간은 자신의 거주 공간, 집이고 일상의 풍경이다. 우선 거의 평생을 살아오고 있는 그 집에 대한 인상과 기억이 실처럼 풀려나온다.
「붉은 집에 대한 기억」은 유년에서 현재까지 살아온 집의 기억들을 풀처럼 나무처럼 그려낸 그림이다. 원형으로 갇힌 집은 마당과 나무, 그리고 작은 놀이기구를 지녔다. 오밀조밀한 살림살이와 집을 둘러싼 자연이 공존한다. 내밀한 관련성이 정겹다. 안락하게 밀폐된 마당 있는 집은 자신의 삶의 기억을 온전히 저장하고 있는 곳이자 수시로 몸을 바꾸는 주변 환경 및 역시 몇 차례 탈바꿈한 집의 자취가 함께 공존한다. 자신은 그 한정된 공간에서 반복된 삶을 산다. 문득 자신이 동물원에 갇힌 짐승과도 같다는 생각도 든다.
"재미있는 사실은 내가 종종 동물원이라는 공간에서 알 수 없는 위안을 받는 다는 것이다. 갇힌 공간에서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는 코끼리와 작업실에서 똑같은 글씨와 그림을 반복하고 있는 '나'가 아무래도 동일시되는 모양이다."
「아버지의 붉은 정원」은 퇴직 후 아버지가 집 옥상에 텃밭을 가꾸고 온갖 식물과 채소를 가꾸는 상황을 극화했다. 작은 집 옥상에 풀들이 마구 넘쳐난다. 매력적인 상상력은 옥상을 뒤덮고 메우고 그로부터 멀리 달아난다. 아버지의 유일한 공간은 옥상정원이고 그것은 외부세계에서 유폐된 늙어가는 아버지를 상징한다. 이제 오로지 옥상정원만이 아버지에게 허용된 생의 공간인 사실이 조금은 쓸쓸하고 더러 우아하고 조금은 서럽다. 옥상정원과 함께 소일하는 아버지의 남루한 생애!
집 공간에 대한 사유는 주변으로 확장된다. 집 동네인 까치산, 인공폭포, 동물원, 공원 등으로 보폭이 이동된다. 그 장소성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구경거리이자 인공과 자연이 괴이하게 연결되어 있고 모든 것은 적막하고 공허하다. 그것이 개발이란 미명으로 혹은 도시미관과 자연 친화와 볼거리를 효과적으로 제공한다는 누군가의 믿음과 신념에 의해 만들어진 집단적 구조물이라는 사실은 다소 공포스럽다. 그 인공물들은 마치 사람들을 동물원에 가두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모두 인조의 '인물원'에 갇혀있다. ● 그림은 상대적으로 여백이 두드러지게 자리하고 있고 대상들은 매우 작게 그려져 있다. 따라서 보는 이들은 몸을 구부려 그림 속으로 자신을 밀고 들어가야 한다. 그 옆에는 낙관이나 시문처럼 작은 글자들이 도열해있다. 반복해서 동일한 문자를 편집증적으로 쓰고 있는 작업은 공간을 메워나가는 일이자 문자와 그림 사이를 헷갈리게 유희하고 문자들이 소리그림으로 자리하면서 보는/읽은 그림으로 대체한다. 연필로 공들여 써나간 이 메움은 공간을 채우고 여백을 횡단하고 더러 촘촘히 흐르고 떨면서 리드미컬하게 시선에 곡절을 준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져 갇혀진 공간에서 사는 삶에 대한 은유가 문자의 압도 속에 채워진다. 또한 그것은 판독성을 가리고 지우면서 점처럼 그림의 한 요소처럼 등장한다. 반면 시선을 집중시키는 붉은 색상이 칠해진 구역은 연필과 먹 선으로 그려진 부위와 충돌한다. 따라서 시각적, 감각적 대비를 보여준다. 그것은 너무 아름다우면서도 그 아름다움이 문득 공포스러움과 연관된다. 낯설고 황폐한 아름다움의 역설이다.
우리들 삶의 공간은 그렇게 자연과 인공이 충돌하고 인위와 천연의 것들이 마구 잡이로 혼재되고 뒤엉켜있다. 작가는 그 공간을 지도화하고 개념화하는 상상력을 보여준다. 일종의 팬시한 감수성은 미시성과 하나로 엉킨 상태에서 재미나게, 흥미롭게 그려진다. 자신을 둘러싼 삶의 공간을 앙증맞고 감각적인 작은 그림과 문자그림으로 풀어내면서 이를 그리기와 쓰기의 한 몸으로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그에 의해 공중에서 내려다 본 이 희한한, 재미난 시선으로 그려진 장난 같은 그림들이 화면 위에서 개미처럼 바글거린다. 그것들이 스스로 살아나 희롱한다. ■ 박영택
유독 내가 집착적이게 찾아다닌 한 곳이 있다. 그곳은 바로 동물원(動物園)이다. 하지만 내가 동물에 흥겨운 시선을 두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곳의 공간 구조와 그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관심을 갖는다. 자연적임을 가장한, 사실 더욱더 인공적인 공간과, 그곳에 갇혀 있는 동물을 보며 자연을 배운다는 그들이 내가 보기엔 더더욱 무언가에 갇혀 있다는 느낌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결국 인공적인 틀 안에서 뱅뱅 돌고 있는 동물이 아닌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다. ● 나의 그림은 이것과 유사한, 인위적으로 만들어져 갇혀진 공간 이야기의 나열이다. 우리의 일상 안에 평범하게 흩어져 있고, 언제인가 부터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어버린 풍경을 나는 다시 조금은 생경하게 보아주길 원한다. 우리는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조작된 엄청난 대형 '인물원(人物園)'에 갇혀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으니 말이다. ● 재미있는 사실은 내가 종종 동물원이라는 공간에서 알 수 없는 위안을 받는다는 것이다. 갇힌 공간 안에서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는 코끼리와, 작업실에서 똑같은 글씨와 그림을 반복하고 있는 '나'가 아무래도 동일시되는 모양이다. ■ 이지영
Vol.20080315f | 이지영展 / LEEJIYOUNG / 李智英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