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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1219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벨벳 서울 종로구 팔판동 39번지 Tel. 02_736_7023 www.velvet.or.kr
두 문화에 실려-박향숙과 아리사카 유카리 ● 사람과 마찬가지로, 문화 역시 타자와 접촉하고 마주하지 않고선 절대로 자기 자신을 확인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확인이 늘 유화적이면서도 조화적으로 행해질 리 없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후지야마 게이샤적인 일본의 이미지에서 외부세계로부터 밀려드는 문화적 강요가 느껴지는 게고, 문화적 고유성을 새삼 강조하게도 되는가 싶다. 최악의 경우, 문화적 항쟁 혹은 전쟁 같은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다행히도 예술에 관해서만은 이런 아수라장을 목격한 적이 거의 없다. 그렇기는커녕, 새롭고 어딘가 모르게 이질적인 문화와의 접촉에서는 새로운 연인과 함께할 때 느껴 보는 가슴 설렘마저 느껴지게 한다.
문화와 문화의 만남, 혹은 공존에서 도대체 무엇이 생겨나는 것일까. 나는 그 아름다운 사례를 내가 교원으로 적을 두고 있는 다마미술대학의 박사과정 아틀리에에서 마주친 적이 있다. 내 연구실 바로 위에 있는 그 작은 아틀리에에서 작품제작에 전념하고 있던 이들이 한국에서 온 유학생 박향숙과 일본인 아리사카 유카리였다. 나는 가끔 저녁녘 무렵, 조금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그 아틀리에에 올라가 그네들과 차를 마셔가며 그네들이 제작중인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든가 세상 이야기를 함께 주고받곤 했다.
이런 저런 중에,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두 사람의 작품이 서로 닮았다는 사실을 눈치 채게 되었고 나는 거기에서 문화적 대화를 직관하게 되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이가 위인 아리사카의 거의 단색조의 희미하면서도 밝은 비-의식적인 비전에 이끌려, 아동화와도 같은 재미난 형상들로 가득 찬 박향숙의 화면에서 심원한 의식들이 흘러나오는가 하면, 대지에 뿌리를 내린 듯한 활력들로 가득 찬 박향숙의 올 오버한 작품들이 왠지 모르게 아리사카에게는 이지적인 세계에 존재하는 정기와도 같은 힘을 건네주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서로의 방식으로 필시 혼자 힘으로는 절대 도달하지 못할, 회화의 기층이라고도 할 법한 그 무엇을 서로 주고받고 있는 듯하였다. 그것은 마치 곡예단의 외발 자전거(unicycle) 에 비해 두발 자전거(bicycle) 가 갖고 있는 안정된 가능성과도 같아 보였다. 문화와 문화는 서로 접근하여 교착하고 대화함으로써, 보다 풍요로운 확장과 무게를 획득한다. 그리고 거의 우발적으로 생겨나는 이러한 사태를 아리사카 유카리는 타고난 천부의 재치로 '이문화주의 (bi-culturalism)'란 말로 이름붙인 게다. ■ 모토에 쿠니오
두 문화의 시선 ● 아리사카 유카리의 몽환적인 이미지는 언어의 이면과 침묵의 부피를 보여준다. 얼핏 추상같지만 자세히 보면 어디서인지 모를 형태가 그려지기도 한다. 반추상 혹은 반구상이라고 하기에도 석연찮은 그의 그림은 구상과 추상, 이성과 감각의 어느 영역에도 닿지 않는 모호함의 양상을 보여준다. 이 모호함 속에 언어의 성질, 개념의 깊이, 심리의 색채, 의지의 박약 등 말할 수 없음의 분신들이 스멀스멀 피어난다.
반면 박향숙의 이미지와 색채는 밟고 자유롭다. 중첩된 화면을 스크래치 하여 유토피아로서 각인된 어릴 적 풍경을 듬성듬성 끄집어낸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보이는 대로 읽어나가면 된다. 한없이 좋았던 공동체적 기억, 교회 종소리, 동네 슈퍼마켓과 놀이터, 공터 등이 마흔의 작가에겐 유토피아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화면을 구성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심리의 두께가 깊다는 점은 두 작가의 공통점이다. 두 개라는 대립항이 가져다주는 다양한 인식적, 미학적 충돌을 전시를 통해 즐기기 바란다. ■ 정형탁
Vol.20071221b | Bicultural vision-박향숙 & 아리사카 유카리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