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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눈 초대展 후원_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1:00am∼07:00pm
갤러리 눈 서울 종로구 인사동 147번지 미림미술재료백화점 2층 Tel. 02_747_7277 www.110011.co.kr
유랑하는 존재를 위한 집 짓기 ● 정승운의 작업은 어렵다. 읽어내기가 어렵다는 점에서 난해하다기보다는 난이도가 높은 작업이라는 의미다. 여기서 난이도란 물리적 난이도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작업의 지향점이 갖는 난이도를 말한다. 정승운은 질료의 생생한 현존성을, 이것과 거의 대척점에 있는 사라지기 쉽고 파악하기 어려운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어떤 것과 결합시키려고 하는, 불가능한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매우 난이도 높은 작업을 계속 시도해왔다. 형상문자인 한자와는 달리 한글은 물질적인 연결점에서 매우 멀리 떨어진, 그야말로 추상적인 표음문자이다. 쉽게 이미지화될 수 있는 혹은 물질적인 친화성을 좀더 갖고 있는 글자가 아니라 하필이면 한글을 소재로 택했을 때 이 난이도는 예견된 것이었을 것이다. ● 그가 선택한 글자는 '집'자와 '숲'자처럼, 추상적인 의미에서의 공간성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 그래픽적 이미지 자체가 물리적인 의미에서의 공간을 의미하는 글자이다. 이것은 매우 교묘하고 효과적인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 사는 공간으로서의 집, 나무가 사는 공간으로서의 숲은 이런 추상적 의미에서의 공간을 암시하는 동시에 닫혀진 네모 칸과 몇 개의 단순하고 꽉 짜여진 획을 통해 물질적인 차원에서의 공간의 형상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다 그가 사용한 또 다른 글자인 '꿈'을 덧붙일 수 있다. 이 역시 심리적 현실이 살고 있는 공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꿈은 또한 집과 숲 '사이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또 이 세 글자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다. 이 역시 추상적 의미의 유사성인 동시에 물리적 의미의 유사성이다. 작가는 '집'자를 '숲'자로 변형시키거나 '숲'을 '집'으로, 바꾸거나 또 '꿈'을 그 속에서 튀어나오게 하는 등, 글자들 간의 퍼즐놀이 같은 연결을 즐긴다.
보통 한글과 같은 표음문자는 이런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언어는 어디까지나 물리적 대상을 사라지게 한 자리에 대신 순수하게 개념적인 기표를 대신 갖다놓는다. 기표는 존재를 사라지게 하고 존재를 정박점 없이 부유하게 하고 떠돌게 만든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을 상기해본다면, 우리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정박하지 못하는 존재로서 떠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가는 언어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일반적인 의미의 언어사용법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그렇다. 아마도 독일유학의 경험을 통해 그가 뼈저리게 느꼈던 것 중의 하나는 말의 장벽이 아니었을까? 말이 안 될 때 물건을 보여주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언어가 갖는 차이적 속성은 결코 확실한 무엇으로 수렴되지 않으며 말을 쓰는 사람을 끝없는 유랑의 길로 밀어 넣는다. 그가 경험했던 유랑은 물리적인 것이기도 하고(독일과 한국이라는 거리), 정신적인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순수하게 추상적인 한글을 그 물질적 정박점과 만나게 하려는 그의 노력은, 이러한 유랑의 바깥지점을 확보하려는 노력, 즉 더 이상 떠돌거나 부유하지 않는 "존재의 집"을 지으려는 노력이 아닐까?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언어의 불확실성을 그 자연적 근원지로 정박시키고자 하는 욕구는 어쩌면 인간 근원에 도사리고 있는 뿌리내림에 대한 욕구를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어 자체가 가진 불확실성은 사라질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노력은 어쩌면 성공하기가 불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작가는 이 불가능한 노력의 반복을 통해 역설적으로 이러한 노력이 갖는 인간적 의미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런 그의 작업은 조금씩 그 난이도를 높여가면서 진행되었다. '집'과 '숲'이라는 글자를 교묘하게 합쳐놓은 그래픽 작업을 보여주었던 2003년 갤러리 피쉬 전시에서처럼, 그것은 우선 평면에서 그래픽적으로 시도되거나 나무막대를 연결해서 만든 벽 설치 작업으로 형상화되었으며, 평면적인 글자 위의 공간에 입체적으로 통로를 만드는 작업으로도 나타났고(2002년 8-9월의 신사동 가옥 전시), 콘크리트 같은 재료로 된 완전한 3D 작업으로 등장하기도 했으며, 야외설치 작업으로 확장시키는가 하면, 급기야 가느다란 줄을 이용해서 '집'이라는 글자를 '숲'이라는 글자로 변형시키기도 했다(2007년의 소소 갤러리, 서울시립미술관). 이번 갤러리 눈 전시의 메인 작업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난이도를 보여준다. 이 역시 '집'이 '숲'으로 바뀌는 과정을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이번에는 합판을 잘라낸 빈 부분을 글자의 획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말하자면 획을 음각으로 처리한 것이다. 이 작업은 두 글자의 각 획이 정확히 어디 대응할 것인지를 미리 계산하여 합판을 절단해야 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 위치가 치밀하게 계산되어야 한다. 합판을 촘촘히 세우고 옆면을 덧대어 입체적 구조물로 완성한 다음, 글자의 빈 곳을 통해 내부를 들여다보면 조금씩 변해가는 아름다운 굴곡선을 보여준다. 이 텅 빈 공간은 단지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이 서로 만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일종의 전이지대로 작용한다. 그리고 관객의 위치는 이러한 전이지대의 역동성을 만들어내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관객은 신체적 존재로서 작업에 개입하며(돌아다니면서 볼 때마다 모습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또한 정신적 차원에서 개입한다(양각과 음각 간의 연결점을 해석하고 글자와 질료의 연결점을 이해하면서). ● 작가는 스스로 자신의 작업을 조각적이지 않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조각의 의미를 매스로만 한정할 때 그렇다. 본질적으로 공간을 다루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그의 작업은 매우 조각적이다. 마치 한 쪽 편에서 밀면 다른 쪽 편에서 튀어나오는 요술판처럼, 그는 음과 양이 교차하는 역동적인 공간을 만들어낸다. 실이나 합판으로 구성된 작업은 통상적인 의미의 매스가 아닌 것, 즉 부피를 거의 갖지 않은 재료로 매스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콘크리트나 나무로 만든 3D 작업에서 매스는 속의 빈 부분을 글자로 인식해서 읽을 수 있게 하는 배경의 역할을 함으로써 통상적인 매스와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런 식으로 그의 작업에서 육중한 매스는 텅 빈 공간으로 변형되며 공간은 어느새 매스 못지않은 물리적 존재감을 갖게 된다. 이러한 전환행위가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키워드이며, "존재의 집 짓기"라는 그의 작업의 의미를 형상화하는 수단이다. 이러한 전환행위는 특정한 문자를 사용하지 않은 1999년의 2인전 작업(서초 조형예술원)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는데, 여기서 그는 단순히 벽의 모서리를 검은 색으로 칠함으로써 그것이 양각으로 도드라져보이게 하는 착시효과를 주었다. 2000년의 사루비아 다방 개인전에서도 비슷한 점이 발견된다. 육중한 나무기둥이 허공에 정지해있는 마술적인 순간은 관객들에게 존재의 무거움을 상쇄시켜주는 통쾌함을 주었다. 그의 작업이 갖는 이러한 착시효과 놀이 혹은 퍼즐놀이 같은 성격은 한편으로 존재의 집 짓기라는 무거운 과제를 좀 더 유쾌하고 생동감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 조선령
Vol.20071215e | 정승운 설치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