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sie's Story

강보라 사진展   2007_1214 ▶ 2007_1220

강보라_Rosie' Story - 어둠속의 비너스_디지털프린트_50.8×40.6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71113h | 강보라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1214_금요일_06:00pm

갤러리 카페 브레송 서울 중구 충무로2가 고려빌딩 B1 Tel. 02_2269_2613~4 cafe.daum.net/gallerybresson

추억을 코스프레 하다 ● 크라피카, 루키아, 쥬클레시아, 치세, 신쿠, 키라키쇼, 바라스이쇼, 로이머스탱, 키쿄우, 샤오랑, 히나이치고, 센, 로드캬멜롯,시아, 미샤......이것은 주문이다. 열광과 동경, 성취의 세계로 들어가는 첫 번째 주문. 이 주문을 외면 어린 청춘들의 황홀경이 열리고 지루하고 고루하며 또 비루하기까지 한 현실을 훌쩍 떠나 자신이 몰입하는 세계의 주인공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새로운 세계에 들어간 자들에게는 때에 따라 두 번째 주문이 요구되기도 하는데, 첫 번째 문을 열고 들어간 자들 대부분은 어렵지 않게 두 번째 주문을 욀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문 프리즘 파워 메이크 업!', '루루팡 루루픽 루루얍!', '피리카 피리라라 포포리나 페페르토!', '웨딩피치 변신!'이 주문 중 하나만 알고 있어도 눈 깜짝할 사이에 놀라운 변신이 가능하다. ● 변신은 화려하고 요란하다. 요샛말로 포스가 느껴지는 멋진 포즈로 이루어진다. 어느 날 아침 불안한 잠에서 깨어났을 때 침대 속에서 철갑의 단단한 등껍질과 불룩한 배, 형편없이 가느다란 수많은 다리를 가진 한 마리의 흉측한 벌레로 변해있는 자신을 발견했던 20세기 그레고르 잠자의 변신처럼 우울하고 섬뜩하고 무기력한 변신이 아니다. 사회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억압받으며 가족들에게조차 소외받는 카프카的인 슬픈 변신이 아니라 당당히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영웅으로의 변신이다. 그들은 힘이 넘치고 애정이 충만해 있으며 발랄하고 의기투합하며 또 성취감에 차있다. 그런데 그들 세계를 지배하는 흑마법계 최강의 주문을 알아두는 일은 필수다. 현실의 곤고함에서 몸을 피해 살짝 옮겨 간 그곳도 결국은 현실세계와 마찬가지로 숱한 아수라와 마법사들, 대마왕이 판치기 때문인데 인간으로 태어난 자들에게 길고 긴 싸움은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인가 보다. 물론 그들에게는 이 운명조차 즐겁고 신나는 놀이일 것 같지만. ● '황혼보다 어두운 자여, 내 몸에 흐르는 피보다 더 붉은 자여, 시간의 흐름 속에 파묻힌 위대한 그대의 이름을 걸고 나 여기서 어둠에 맹세하노라,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모든 어리석은 자들에게 나와 그대의 힘을, 위대한 파멸의 힘을 보여줄 것을!'

강보라_Rosie' Story - 물고기눈_디지털 프린트_76.2×101.6cm_2007
강보라_Rosie' Story - 첫사랑_디지털 프린트_76.2×101.6cm_2007

'수리수리 마수리'로 시작하던 나의 어린 시절 주문은 유행이 지나도 한참 지났다. 세상에 주문도 유행을 타다니, 그것도 참 불가해한 일이지만 '델레트리우, 에너바이트, 오블리비아테, 엑스펠리아르무스, 윙가르디움 레비오우사......'처럼 지성미 넘치는 해리포터의 어려운 주문들까지 줄줄 꿰고 있는 요즘 10대, 20대 청춘들의 머릿속도 참 불가해하긴 마찬가지. 애니메이션과 게임, 영화 속 캐릭터의 의상을 입고 대사와 행동을 따라하면서 직접 특정 캐릭터로 분(扮)하는 이들의 코스튬 플레이(costume play, 코스프레)는 갈수록 창궐하여 최근 일본에서는 코스프레 이벤트가 월 100건이 넘는다고 하고 올 여름엔'당신의 코스프레 생활 응원 매거진'이라는 슬로건 아래 코스플레이어(cosplayer, 코스어)를 위한 격월간 무료잡지까지 창간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주말 도심의 알만한 공원에 가면 어렵지 않게 이들을 만날 수 있다. 삼삼오오 모여 퍼포먼스를 즐기는 이들의 행보는 거침없고 자연스럽다. 그들의 가상세계 바깥에 서있는 내가 도리어 가상의 인물인 것처럼. ● 나 역시 들장미 소녀 캔디나 일요일 아침잠을 깨우던 은하철도 999 등을 빠짐없이 챙겨보고 베르사이유의 장미, 아르미안의 네 딸들 같은 세련되고 우아한 만화 속 여인들을 동경한 적은 있었으나, 현실 속에서 내가 직접 그들이 되어 백주대낮의 거리를 활보해볼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고작 빈 공책에 만화 속 주인공들을 흉내 내 긴 머리를 찰랑찰랑 풀어헤치고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거리는 어여쁜 여자아이들을 낙서삼아 끄적거려 보았을 뿐.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현실이 아닌 또 다른 세계를 꿈꾸긴 하되 그것들을'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로 추억할 뿐이건만 코스어(coser)들은 가상을 현실화함으로써 삶의 원동력을 얻는다. 아, 나는 이미 해피엔딩과 승리를 약속하는 꿈의 세계로 들어가는 의상과 주문을 잊어버린 것이다.

강보라_Rosie' Story - 슬픈오후_디지털 프린트_50.8×40.6cm_2007
강보라_Rosie' Story - 비밀_디지털 프린트_127×101.6cm_2007

강보라의 로지이야기(Rosie Story)는 마치 코스프레처럼 내게 다가온다. 그녀의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짧은 교복이나 제복, 혹은 드레스를 입고 천방지축 뛰어다니다가 갑작스런 공습에 대항하여 마법의 주문을 외며 싸우는 애니메이션과 게임의 주인공들처럼 파워풀한 쾌감을 주지는 않지만, 소녀시절을 지나온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간직하고 있는 비밀스런 꿈과 이야기들을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고 현실 속에 컬러풀하게 재현해준다는 점에서 코스프레 그 자체이다. 과거의 시간을 짜 맞춰 현란하고도 기이한 옷들을 기워낸다는 점에서 코스프레이고, 직접 지어낸 꿈속의 의상들을 입고 그 세계의 주인공이 되어 천연덕스럽게 추억을 퍼포먼스한다는 점에서도 코스프레이다. 로지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여자인 것도, 남자가 등장하는 이야기조차 소녀의 판타지로 그려진 남자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10대~20대의 여자들이 주를 이루며 이들이 종종 남자캐릭터로 분장하는 코스프레가 그렇듯. ● 코스프레이기에 당연한 이야기지만, 로지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현실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는다. 자신의 추억과 의식 속에 있는 가상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또한 가상의 제3의 눈이 지켜보는 가운데 저 홀로 놓여있다. 그 가상의 눈은 추억을 들여다보는 자신 내면의 눈이기도 할 것이며, 지나온 시절 동안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온갖 것들에 대해 상념을 거듭해온 작가가 의식하는 외부 세계의 눈이기도 할 것이다. 내면의 눈이든 외부의 눈이든 '알 수 없는 시선이 지켜보는 가운데 홀로 외딴 방에 놓여진 소녀', 그것은 아직 발현되지 못한 자신과 또 아직 알 수 없는 세상에 대한 궁금증으로 가득 찬 소녀시절을 정의하는 또 하나의 문장일 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얼마나 많은 상념의 방과 비밀의 정원을 지나왔던가. 모딜리아니의 처녀처럼 순백의 옷을 입고 서늘한 근심에 사로잡힌 갸름한 얼굴의 소녀,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12시의 신데렐라처럼 서두르고 있는 긴 머리 소녀,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어지러운 방에 낙담하듯 앉아있는 검은 옷의 소녀 등등. 이들은 작가이자 나다. 또한 세상의 모든 소녀들이다. 로지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모두 다 혼자라는 점에서 굉장한 동질감으로 결속하고 있는 코스프레의 주인공들과는 다르기도 하지만, 알듯 모를 듯한 이 이야기들의 속사정은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오색창연 한 내면의 이야기들로 가득 찬 비밀의 방과 정원을 누구나 홀로 더듬으며 건너왔기에.

강보라_Rosie' Story - 자화상_디지털 프린트_127×101.6cm_2007
강보라_Rosie' Story - 파란동화_디지털 프린트_127×101.6cm_2007

로지 이야기의 주문은 시간이다. 그 시간의 주문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또 누구나 알 것 같기도 하다. 세일러문과 리자짱, 천사소녀 네티의 주문이 다르듯 각자의 추억에 따라 주문은 무한히 변형되고 복사된다. 그러나 추억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주문이 무엇이든 결론은 같다. 그 세계에서 그녀가 대항해 싸워야 할 대상이 세상을 악으로 정복하려는 못돼먹은 마왕이 아니라 도대체 오리무중인 '나'와 세상 그 자체라는 점, 그리고 그 싸움에서 승리하든 패배하든 다시 이 지루하고 고루하고 비루하기까지 한 현실의 세계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점. ● 자, 그럼. 이토록 서글픈 우리들의 운명과 로지 이야기를 위하여 마지막으로 이 한 가지 주문만은 잊지 말고 외워두길. '프리오리 인칸타템!'(지금까지 행한 마법들을 다시 보여주는 핼리포터의 주문) ■ 최현주

Vol.20071214a | 강보라 사진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