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61009a | 김주환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1212_수요일_05:00pm
한전프라자 갤러리 서울 서초구 서초동 1355번지 한전아트센터 1층 Tel. 02_2105_8190~2 www.kepco.co.kr/plaza
김주환의 작업은 번뇌와 깨달음의 관계를 '고치'와 '파문'이라는 상징적인 형태를 통해 표현한다. 애벌레가 고치를 만들어 번데기가 되었다가 나비로 거듭나는 현상이라든가, 연못에 파문이 생겼다가 잠잠해지는 모습은 '잠, 꿈, 깸'이라고 하는 깨달음의 변증법을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첫 번째, 고치를 통한 작업 ● 잠은 곧 잠(蚕 =天 아래 虫 , 누에벌레)이다. 애벌레가 번데기의 과정을 거쳐 나비가 되는 과정을 번뇌와 깨달음의 상징으로 보고, 철사로 만든 고치를 통해 표현한다. 잠(蚕 )에 대한 작업들은 철선을 말아 고치를 만들거나, 번데기에서 나비가 되어 빠져나간 벌레(번뇌)의 허물, 비어버린 고치를 자궁의 형상 또는 블랙홀과 같은 이미지로 표현한다. 이것은 융의 컴플렉스 개념을 빌린다면 '요나 컴플렉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나(凹螺)컴플렉스의 조형적 형상화에 관한 작업 ● 요나는 물고기 배속에서 3일을 견딘 후에 다시 살아난 예언자이다. 요나 컴플렉스는 융이 우주적 상징이라고 부른 중요한 컴플렉스이다. 그것은 '이유(離乳)컴플렉스(삼키기)의 한 특이한 경우'로 생각될 수 있으며, 어머니에로 돌아감을 상징한다. 그것은 죽음의 모성이라는 주제와 무덤에서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이미지를 안고 있다. 이러한 요나 컴플렉스의 요나를 그는 凹螺로 표기함으로써 그의 작업의 형태가 담고 있는 의미를 드러내고자 한다. 凹螺란 말 그대로 오목한 나선(螺線)이다. 오목한 나선이 곧 요나이다. 이것은 물고기이며 자궁의 상징이다. 나비가 되어 떠나버린 텅 빈 고치이다.
요나(凹螺)는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블랙홀을 상징한다. 그것은 거대한 수용성, 우주적 자궁이다. 블랙홀의 생성원리는 거대한 응축이라고 한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겨자씨 속에 온 우주가 들었다'라는 표현으로 말한 것이 아닐까. '무한세계가 작은 먼지나 티끌 속에 존재한다.' 하나는 전체 속에 들어있고, 전체는 하나에 녹아 있다.(一中一切 多中一, 一卽一切 多卽一, 一微塵中 含十方)
화엄경에서 말하는 일즉일체(一卽一切)의 '일체'란 스타오가 말하는 일획이요, 한번 그음이다. 그음은 자름이요, 자름은 흩음이다. 흩음은 곧 이름(분별)의 생성을 의미하며 분별된 인간의 인식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일체란 일을 나누는(切) 것이다. 일(一)을 나눔으로써 만물은 生한다. 이러한 생의 과정은 쉼 없이 계속된다. 生生不息이기에 제법은 무상(無常)이다. ● 조각 작업을 한다는 것은 재료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선택함으로써 형상을 만드는 행위이다. 철사를 말아 형태를 만든다는 것, 이것은 일이 일체가 되는 과정이다. 우주는 일(一)이며 일체(一切)이다. 그의 작업에 있어서도 일선(一線)을 나누는 행위를 통해 형상이 만들어 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체는 곧 일이다. 一切卽一, 그의 작업은 일과 일체에 대한 사유에서 다시 출발한다.
두 번째, 물위의 상과 파문을 통한 작업 ● 잠(睡眠)은 곧 물의 표면(水面)이다. '수면과 수면에 비친 영상'이란 이중의 의미를 가지는데 '잠과 꿈'의 의미와 '물과 물위에 비친 상'이라는 의미이다. 수면위에 비친 하늘이라는 영상은 잠 속에 끼어든 꿈(夢)으로서 누에벌레(蚕 )에게 있어 하늘로 날아오르고자 하는 꿈(나비의 꿈)과도 다르지 않다.
구름 낀 연못 빗방울 떨어져 흐린 하늘 ● 구름 낀 연못은 無明에 대한 상징이다. 빗방울이 떨어져 연못에 파문이 생기는 순간은 번뇌의 순간이자, 깨달음의 계기이다.(煩惱卽菩提) 연못에 비친 하늘을 진짜 하늘이라고 믿고 있는 마음에 한 방울의 물이 떨어져 그 상이 흐려지고 그것이 허상임을 깨닫는다. 빗방울이 떨어져 수면위에 파문이 생기는 순간, 하늘과 연못은 분리가 된다. 「흐린 하늘」작업은 연속적 시공간을 압축된 한 순간의 이미지로 포착하여 표현하는 작업이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하늘/ 하늘을 비추고 있는 연못/ 그리고 빗방울이 떨어져 연못 위에 생기는 파문으로 다시 흐려지는 (수면에 비친)하늘. 연못은 하늘을 비춘다. 숲속의 고요한 연못을 보고 있으면 하늘과 연못을 구분하지 못한다. 꿈꾸는 자는 자신이 나비인지 인간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온다. 그리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빗방울 한 방울이 연못위에 떨어진다. 하늘이었던 빗방울이 연못이 된다. 연못 속 하늘이 담고 있는 물방울들. 하늘을 비추는 연못은 곧 연못이 비추는 하늘이다. 겁(劫)나게 청정(淸淨)한 연못만 있을 뿐, 파문은 연못위에 남지 않는다. 百紋不餘一絹
백문불여일견(百紋不餘一絹) ● 백문(百紋)은 우리에게 감각적으로 인지되는 현상들을 의미한다. 문(紋)은 ?무늬'라는 의미와 함께 순간순간의 형상들을 뜻한다. '백문(百紋)'이란 연못에 물방울이 떨어져 생기는 수없이 많은 파문을 말한다. 이것은 또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온갖 번뇌를 상징한다. 불여일견(不餘一絹), 하지만 어떠한 번뇌도 마음에 남아있지 않다. 일견(一絹)은 본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견(絹)이 뜻하는 '비단천'이란 곧 현상이 일어나는 공간을 의미한다. 누에벌레가 만드는 고치의 펼쳐짐이 곧 비단이다. 문(紋)과 견(絹), 이 두 글자는 모두 실사(?)변으로 되어 있다. 연못과 파문이 그 본질은 모두 물이듯이, 천과 천위의 무늬도 모두 실일 뿐이다. ● 원효의 『대승기신론소』의 바람과 물결의 비유는 흐린 하늘의 비유와 비슷하다. 일심 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 단지 무명(바람)이 있어 우리의 마음위에 물결이 일게 한다. 일심이 육도중생으로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일심지원이라는 물위에 일어난, 각자가 무명의 바람으로 일으킨 파랑에 불과할 뿐이다. 결국 육도중생의 차이란 주름의 차이일 뿐이다. 백문불여일견(百紋不餘一絹)에서 불여(不餘)라 하였지만 백문이란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단지 일견(一見 / 一絹 / 一繭) 만 있을 뿐이다.
월인천강(月印千江)과 홍운탁월(紅雲拓月) ● 달을 통한 인식의 문제 탐구/ 손가락이 달을 가리키고 있다 하여 달만 쳐다볼 일은 아니지 않는가?
월인천강은 달이 드러나는 방식이고 홍운탁월은 달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달이 천강에 비친다는 것은 사람들마다 각자의 달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달은 부재를 통해 표현된다. 그려진 달그림 속에 달은 없다. 百聞不如一見. ■
Vol.20071210c | 김주환 조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