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갤러리 고도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1205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고도 서울 종로구 수송동 12번지 Tel. 02_720_2223 www.gallerygodo.com
그때 거기와 지금 여기가 통합되는 공간 ● 개인으로서의 미술가가 직면하는 도전은 크게 과거의 전통에서, 이웃의 새로운 정보에서, 그리고 미술가 자신의 내적 필요에서 비롯된다. 종이, 붓, 먹만으로 환경을 재현하는 수묵화가는 몸과 마음을 재료에 일치시키는 과거의 교훈과 거장들의 전통을 의식하는 한편, 이웃의 다양한 정보에 대한 동시대적 요구에 직면한다. 정하경은 그의 수업기를 포함하는 1970년대에 이미 비재현적 화면(non-representative plane)을 시도함으로써 이 부담들에 극단적으로 반응한 것으로 비쳤다. 그러던 그가 1980년대 이후 지금껏 전통적 재현의 방식으로 되돌아 간 것으로 얼핏 보일 법한 사실적 산수화를 정밀하게 제작해오고 있다. ● 정하경의 산수는 자연 대상을 진솔하게 재현하기에 한국의 지역적 특성을 각성하는 진경수묵화의 전통을 계승한다고 보는 평가와 함께, 먹의 담백한 물리적 속성을 정제된 마음의 건전함에 일치시키기에 극동의 오래된 정신적 전통을 계승하는 것으로 보는 평가를 동시에 받는다. 나는 그가 재현하는 대상에서 일말의 인식론적 징표와 제작의 공정에 나타나는 "순환과 단편", "행동과 멈춤"과 같은 대립적 특성의 통합 방식에 주목한다. 이는 자연 환경의 객관적 사실과 미술가 자신의 음밀한 내면을 기록하는 회화적 수단을 통해 전통에 반응하고 그러면서도 항상 새로울 수 있는 그의 뚜렷한 회화적 특질(pictorial quality)을 조명해낼 것이란 기대 때문이다.
보이는 대상, 보이지 않는 대상 ● 정하경의 산수화는 미술가가 직접 관찰한 산천의 풍경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것은 기후, 계절뿐만 아니라 지형, 장소와 같은 구체적 정보를 나타낸다. 화면 가운데로 뻗어가는 지세와 그것에 뿌리박고 자라는 수목들의 사정이 간간이 드러나는 오솔길과 강, 그리고 몇 채의 산막이 있는 특정 장소에 관한 정보들을 정확히 전해준다. 그의 화면은 지도를 대신할 정도다. 이러한 사실주의적 외관은 눈으로 확인되는 실증적 경험으로 이 땅의 지역적 특성을 주장한 과거 진경산수화가들의 전통과 연관되어 보이게 한다. 더 나아가 그의 화면은 미술가가 제작한 정확한 지점을 화면 밖 실재하는 공간에까지 암시한다. 화면에 드러나는 장면이 그것을 그리기 위해 화가가 점유한 지점에서 파악된 것이라면 그 지점은 그림이 걸린 화랑 벽면 앞에 보기 위해 서 있는 관람자의 위치와 동일한 것으로 암시된다. 이러한 직접성은 물론 자연 대상에 대한 정하경의 진솔한 기록의 정밀함에서 유래한다. 정하경의 산수화는 보이는 장면의 사실을 능가하는 판독의 조건을 제공한다. 관람자의 직접적 판독 조건은 정하경의 산수화를 과거의 실경산수화와 구별되게 한다. ● 정하경은 녹음이 우거진 산천을 그리기를 꺼려한다. 지세가 형성하는 뼈대를 녹음이 가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산세의 사정이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늦가을을 선호한다고 한다. 이는 풍경의 본질을 탐구하려는 그의 태도를 말한다. 그의 화면에서 수목과 바위, 흐르는 강물과 폭포, 간혹 땅 표면에 노출되는 인공의 흔적인 가옥과 오솔길, 이 모두가 그것을 포괄하는 지형의 분명한 사정들의 부분으로 표현된다. 그의 산수화는 사물의 본질적 형상을 단순한 필획으로 요약할 것(骨筆用法)을 가르치는 전통의 교훈을 실천한 결과이다. 정하경은 자연 환경을 단순히 스케치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그 환경 속에서 제작을 거의 완결한다. 도심에 있는 그의 제작실은 단지 회화의 틀을 결정하거나 낙관하는 곳으로 쓰일 뿐이다. 산천이 곧 그의 제작실인 셈이다. 그려지는 대상이 있는 곳과 제작하는 장소의 일치는 산천을 관찰하고 제작실로 돌아와 화본(pictorial model)과 상념(ideal imagery)에 그것을 조회하여 완성하던 과거의 거장들과 정하경을 구별되게 한다.
정하경의 산수는 계절과 기후뿐만 아니라 아침이라는 특정의 시간을 포착한다. 그의 평면은 밤에서 낮으로 옮아가면서 짧게 조명되는 순간을 기록한다. 이 시간은 의식이 깨어나고 사물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것을 포착하는 화가 역시 잠을 떨치고 산천 속 그 자리에 있어야 그와 같은 장면을 그릴 수 있다. 따라서 그의 회화는 미술가 자신이 깨어 있음을 논증한다. 이처럼 정하경의 회화는 자연의 세세한 장면들뿐만 아니라 미술가 자신을 기록한다. 그의 회화는 눈에 보이는 환경과 함께 "깨어 있는 마음"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동시에 드러낸다. 대상과 나, 자연과 인간, 제작자와 관람자, 그리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이와 같은 상반된 주체의 공존은 그의 회화를 단순한 관람의 대상을 넘어서는 인식론의 매체로 확장되게 한다. 이점에서 나는 그의 산수화가 전통을 갱신한다고 생각한다.
순환의 단편 ● 정하경의 화면에 기록된 하나의 산수는 그에 의해 제작된 다른 산수화의 부분이기도 하고 전체이기도 하다. 그는 한 장소를 여러 번 방문하고 그럴 때 마다 각각 다른 각도의 화면을 제작한다. 나중에 이것들을 한곳에 모으면 완전한 대작이 되기도 한다. 이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각각의 조각으로 담아 하나의 병풍으로 이은 과거의 전통과 유사하다. 이는 또한 각각의 개별 화면이 지닌 독자성을 유지함과 동시에 그것들 간의 연관에 의존하는 버전(version)이나 연작(series)의 개념과 동일하다. 따라서 정하경의 독립된 개별 작품은 버전과 연작으로 확장될 판독을 예고한다. 독립된 단위의 화면이 정지된 순간을 기록한 것이라면 그것들이 조합된 버전과 연작은 장면간의 관련을 통해 시간의 지속을 드러내게 된다. 개별 작품과 이웃하는 작품 간의 차이는 모듈들의 변화를 나타낸다. 이 차이가 결국 완성된 대작을 향한 연속된 판독을 이끄는 점에서 그의 버전과 연작은 정지와 지속간의 충돌이 순환으로 통합되는 경로를 암시한다. 모듈의 변화와 순환은 정하경이 이미 1970년대 비구상 회화를 제작할 때 그의 제작을 이끈 중요한 개념이다. 독립된 추상회화가 연속된 맥락으로 판독되기를 기다리는 것은 회화의 근대적 특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특색이다. 이점이 정하경의 회화를 과거와 구별되게 한다. 다가가기와 멈추기 ● 도심의 생활 중에도 정하경은 항상 산천을 향한 마음을 갖고 있고 그곳에 조만간 갈 계획으로 벅차다고 한다. 묵힌 먹물 병, 몇 자루의 세필과 작은 접시 두 개가 단출하게 든 상자가 항상 그의 곁에 있다. 언제든 자연으로 들어가 제작할 채비가 되어 있다. 자연을 향한 그의 의지는 붓을 쥐고 화면에 덤벼들어 파편적인 작은 자국을 무수히 반복하는 인내를 가능케 한다. 대상에 대한 재현 의지가 현실의 삶을 능가하고 반복의 지루함을 능가한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표현 의지가 종이의 평면을 넘어서지 않는 지점에서 멈춘다. 통상적으로 수묵화는 붓을 쥔 손이 종이에 적극적으로 적용해 들어가는 행동을 진솔하게 남기는 것에 그 생명력이 있는 것으로 본다. 먹이 종이를 향한 공격과 그것을 가능케 하는 화가의 몸짓이 칠(paint)로 기록되는 것에서 수묵화는 여타의 매체와 구별된다. 이러한 회화적 속성(the painterly)이 지닌 표현력은 제작자의 의지를 대신한다. 하지만 정하경은 대상의 모양새를 설명하는 정도에서 멈춘다. 그는 자신의 존재와 의지가 회화의 표면에 남거나 도사리는 징후를 끝내 피한다. 미술가의 이러한 절제는 '종이'라는 물리적 속성과 '여백'이라는 정신적 속성이 한 화면에 동등한 자격으로 공존하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양자 간의 접점이 판독되게 한다. 결국 정하경이 자연에서 추구하는 것은 망막을 자극하는 대상의 외관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그 접점이다. 그의 회화는 수묵의 표현력에도 불구하고 그 의지를 자제함으로써 보이지 않지만 뚜렷이 감지되는 정신적 긴장을 드러낸다.
그때 거기 / 지금 여기 ● 제작 중인 정하경의 화면에는 맑게 우러나는 먹의 촘촘한 붓자국이 집단을 이룬 채 흰 종이 표면 군데군데 포진해서 바탕을 향해 아우성대며 세력을 뻗는다. 마치 고대의 군사들이 드넓은 벌판에서 서로 충돌하기 위해 서서히 퍼져가는 것을 높은 곳에서 보는 듯하고 세균들이 넓은 곳으로 퍼지며 증식해 가는 모습을 현미경으로 보는 듯하다. 먹의 집단들이 충돌하면 산맥이 형성되기도 하고 산이 중첩되기도 한다. 이들 간의 충돌을 흰 바탕이 가로 막으면 그 자리는 강, 안개, 오솔길이 드러난다. 여기에 지루하게 반복되는 미술가의 노동이 여백에 둘러싸이는 과정이 목격된다. 정하경은 산천에 들어가 깨어 있는 의식으로 아침을 묘사한다. 관람자는 미술가에 의해 실행된 노동의 결과물 앞에 묘사된 외관을 통해 보이지 않는 맑은 마음의 조건을 각성한다. 이는 그때 거기에서 실천된 미술가의 노동이 지금 여기에서 각성하는 관람자를 생산하는 셈이다. 대상의 외관에 대한 치밀하고 적극적인 의지와 그 대상에 아무런 것도 더하지 않는 허용의 공존이 결국 관람자에게 자각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하경의 산수화는 그와 같은 인식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화랑공간에 당당히 걸린다.
4대가 혹은 6대가로 불리던 1세대의 근대 산수화가들의 영향력이 강했던 시기에 전통수묵화를 훈련받은 정하경은 자신의 수업기를 마무리 하면서 비구상으로 새로움을 추구한 전위의 이력을 갖고 있다. 그는 이후의 급격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회화를 통해 과거와 이웃 그리고 자신에 대한 반응들을 직접적 판독조건의 제시, 비가시적 영역의 암시, 그리고 모듈의 순환에 대한 회화적 구현을 통해 실경산수화를 지속한 것으로 확인된다. 그 속에서 보이는 외관을 넘어 깨어 있는 마음을 감지하게 하는 매체가 곧 회화임을 그의 제작은 일관되게 논증한다. 이는 급변하는 환경 속에 회화가 여전히 시각매체의 중요한 암시가 되고 있음을 밝힌다. 근대 화가들을 계승하고 산업화시기를 개척해온 수묵화가들에 관한 논의가 필요한 적절한 시기가 지금이라 생각한다. 상당수가 왕성히 제작을 하고 있기에 그들의 제작 공정에 관한 관찰과 그들의 언급에 대한 직접적 기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정된 여건이지만 나는 그 세대의 미술가들 중 뚜렷한 시대적 성취를 이룬 한 화가의 제작을 목격하고 기록하는 행운을 가졌다. ■ 이희영
Vol.20071208g | 정하경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