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7_1204_화요일_05:00pm
갤러리정 서울 종로구 내수동 110-36번지 Tel. +82.2.733.1911 www.galleryjung.com
누가 벼랑의 꽃을 옮기는가 ● 사람의 감정은 어떻게 발로되며, 그 실체는 어떠할까. 감정이야말로 소통의 주체이고 또 여기에 진리의 실체가 존재하기 때문에 작가로서는 매우 중요하다. 감정은 마음이 하나의 일을 목격했을 때 일어난다. 이로써 비로소 마음의 운동하는 실태를 증명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맹자는 "그 정을 통해 성의 선을 알 수 있다."(「고자상」)고 하였는데, 곧 마음은 정을 통해 알 수 있고 또 그 정을 통해 성의 속성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마음의 구조와 그 속의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이 실로 합리적이다. 작가는 자신의 내면을 작품으로 표현하지만, 이는 작가 자신만의 내면적 표상에 불과하다. 사실 내면세계는 어디든 존재하며 도처에서 창조된다. 이는 작가의 작품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저 벼랑 위의 꽃들도 제 스스로를 아름답게 창조하고 있지 않은가. 꽃은 사실을 말하며, 그 사실로서도 창조와 소통의 의미는 충분하다. 꽃은 외부의 조건과 어울려 핀다. 여기에 또한 마음의 존재가 없다고 할 수도 없음이다. 그런데 그 세계의 존재는 어디를 근거하여 움직이고, 그 주체는 무엇인가. 다시 말하면 그 소통의 세계에 참된 상은 있는가. 만약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그 진상을 알 수 있는가.
마음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유행체이다. 그러나 유행 자체로서는 마음의 모두라 할 수 없다. 유행을 통해 그 실체를 도출함만이 본연이라 할 수 있다. 마음은 '유행'과 그 유행을 가능케 하는 '소이'의 측면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또 그 둘이 합함으로써 새로이 또 하나의 형태를 드러낸다. 실체 속의 참된 상이다. 하지만 자신의 참됨으로서만 마음의 본연을 완수했다고 볼 수는 없다. 바로 인간 사회의 소통으로서의 마음이다. 여기에서 비로소 진정 마음의 기능을 다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은 움직임을 통해 타자와 소통하며, 그리고 그 소통 속의 본연은 대화와 담론을 통해 드러난다. 진실은 그 속에서 피어난다. 진실은 대화를 통해 논하지 않는다면 이는 형이상학적 공리공담이 되고 만다. 따라서 담론은 개인의 직관을 통해 도출할 수 없다. 직관은 개인의 체험을 말하지 담론은 아니다. 사실 개인의 체험적 직관은 오류가 발생할 개연성이 있다. 직관은 자신의 몸(능력?마음)으로 체험(인식)하기 때문이다. ● 작가는 감정을 통해 외부 사물의 실상을 드러내며, 그리고 그 둘을 화육하는 주체다. 따라서 작가는 개인의 체험 속에서만 스스로 유행하는 자가 아닌 그 체험을 통해 담론을 개최하는 소통의 담대자(擔待者)다. 끊임없는 변화 가운데서 대화를 이끌어내는 연금술사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소통이라는 재료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이차적 창조자라 할 수 있다. 연금술사는 일차적 재료가 없으면 그 담대는 결국 허구가 된다. 일차적 재료를 읽는 담대자는 그 자체로서 공명해야 하지만, 형기의 몸과 혈기의 마음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는 인간으로서는 진정 이러한 공명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변화의 실체는 어디서 포착되는가. "마음은 그야말로 허령의 상태로 텅 비움으로써 외부의 진리를 지각할 수 있고, 이 자리에서 내외는 소통될 수 있다."(『대학혹문』) 개념의 시비를 떠나 필자는 주희의 이 말을 존중한다. 결국 소통의 담대자는 자신이지만, 이미 그 마음에 어떤 선입견도 두지 않은 상태라야 그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이루어지고, 이 사이에서 세계의 진상은 회통될 수 있다는 말이다. 만약 상대의 외물에 대해 먼저 '측은의 마음'을 둔다면 외물과 소통하기 이전 이미 자신의 권력을 타자에게 강요함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소동파는「적벽부」에서 "천지의 변화는 일순간의 정지함도 없지만, 그 불변자를 보는 것은 나와 사물의 다함이 없는 곳에서이다"라고 노래한다. 이는 공자가 "흐르는 물을 보며 찬탄"(『논어, 자한』)한 말에 대한 해석으로, 천지 변화의 실체는 담대하는 주체의 부동심으로 식득 가능하다는 뜻이다. 유한의 생명으로 무한의 세계를 관조하는 것은 인간의 부동심이 아니면 안 된다. 세계는 생각하는 이 순간까지도 유행으로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관조할 수 있는 자는 분명 부동심의 허심자가 아니면 불가하다. 부동심의 허심자는 도도한 역사의 무게 앞에 도리어 허심한다. 이로써 그 무게와 현실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다. 부동심과 허심은 일견 모순 같지만, 그러나 진정 허심을 통해 현실의 유행 속에서의 부동심을 이룩함으로서만 외계의 사물을 편견 없이 본연 그대로 복사할 수 있는 것이다. 동파가 "무리 속에 살지만 세속에 기대지 않고, 홀로 서있지만 두려워하지 않는" 부동으로서의 허심의 대나무를 즐겨 그린 이유이다. 하지만 동파도 그 뜻을 얻기 위해서는 감정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곧 "그 감정을 통해서 그 성을 다할 수 있다 得其情而盡其性"(「墨君堂記」)고 함으로써 곧바로 맹자의 '성을 찾는 담론'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들 현실의 감정을 등지고 홀로 무심히 득의할 수 있겠는가. ● 태극?팔괘는 중국의 역사에 한정시킬 수 없는 동아시아 지성사이다. 지금의 『주역』은, 이전 하의『연산역』과 은의『귀장역』을 이은 것이다. 팔괘와 그 팔괘를 겹친 64괘의 작자는 복희씨이다.(왕필) 이 괘에 주 문왕이 '辭'(해설?문자)를 붙인 이후부터가 지금의『주역』이다. 태극?팔괘는 문자 이전의 세계이다. 문자 이전이므로 여기에는 문자로 전달하지 못하는 많은 현실태를 암시하고 내포한다. 이미 현실로 탄생되면 여기서 상호 모순이 발생한다. 역은 현실세계를 표상하지만, 이 역을 통해 불변의 역을 도출한다. 불변의 역이 바로 태극이고, 태극은 곧 리이며, 사람으로 말하면 성이다. 태극은 반드시 역의 변화와 유행 가운데 존재한다. 그 변화와 유행의 실상이 곧 마음이며, 바로 이곳 마음에서 태극을 도출한다. 그리고 태극 또한 음양의 변화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음양?변화를 표상한 현실태가 팔괘의 '괘'이다. 이 괘의 현실태가 바로 "情"(「계사하」)인 것이다. ● 따라서 작가의 행위로서의 이러한 도상은 문자 이전을 추구하고 있다. 학자는 입언(立言)을 통해 진실을 말하고자 하지만, 작가는 문자 이전을 추구함으로써 사태의 본질에 직접 다다르고자 한다. 때문에 작가는 차라리 '시'를 지향한다. 화가가 시를 쓰는 이유는 시가 입언을 추구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자를 통하면서도 그 속의 본질을 관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질의 관조를 통해 문자 이전을 지향하지만, 그러나 결국 작가의 시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다시 형상으로 되돌아간다. -작가는 현실의 '어머니'를 감정으로 부르고 있다- 이는 무형의 시를 통해 유형을 추구함과 유형의 형상을 통해 무형의 시를 지향하여 "詩畵一律"(동파의 말임)을 드러냄으로써 그 담론의 경계를 보편적 언어로 이끌기 위함이리라. 시?화는 모두 감정의 문제이므로.
언제나 그렇게 흐르는 이 세계 양단의 끝에 작가는 서있다. 그리고 그 양단을 잡고 스스로 외로움에 떨며 본질을 희구한다. 현실의 언제나 그렇게 소통하고 있는 속에서 작가는 외로워하는 것이다. 왜일까. 작가는 흐름 속에서 관조하고, 관조 속에서 홀로 주객 양자의 사이를 담대(擔待)하지만, 현실은 벌써 양 극단을 향해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는 오히려 유행의 양 극단 속으로 깊이 훈습하며 진실을 갈망한다. 우리는 '세계'에 있어 실로 그 중간자는 존재하지 않음을 안다. 그러므로 인간은 외로운 실체다. 작가의 행위로서의 도상은 사실의 형상을 지양(止揚)한다. 따라서 작가의 도상은 그 형상이라는 이미지를 지우기 위한 하나의 몸짓이다. 이미 하나의 의미로 드러난 그 형상은, 바로 그것을 인식하려는 순간 날아가려는 준비를 벌써 끝낸 살아있는 유기체임을 알고 있음이다. 작가는 이렇게 드러난 현실을 애써 잡으려 하지 않는다. 잡는 순간 내 손에는 이미 없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끊임없이 흐르며 굴러가는 세계는 그저 지나갈 뿐이다. 잡으려고 하는 순간 이미 양극의 수렁으로 합류하고 만다. 현실의 단상은 극단을 향해 돌진하고 있음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결코 중얼거리지 않는다. 아니 중얼거릴 틈이 없다. 때문에 그 몸짓은 실존적 몸부림의 연속이다. 이미 태어난 단상은 무수한 에너지의 집적이다. 이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때의 에너지를 안고 있으며, 이미 드러난 이상 최대의 열정을 향해 스스로를 태우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가 행한 괘상(卦象)의 막대기들은 사실은 이미 타오른 열정에 불과하다. 이러한 열정이라는 막대기의 괘상들은 유행하는 거대한 현실속의 소통 자체일 뿐이다. 열정으로 부유하며 소통하는 현실의 세계는 언제나 그처럼 그렇게 냉정(冷情)하다. 이렇게 부유하며 거래하는 현실 앞에 맨몸의 몸짓을 드러낸 작가야말로 어찌 진정 마음으로 추위에 떨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작가 이근우가 붓을 든 자리야말로 바로 이곳이리라. 이러한 소통의 양 극단의 현실은 늘 개탄스러울 정도로 뭉개져 있어서 어쩌면 영원히 진실은 존재하지 않을 듯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는 피할 수 없는 진실이 실존하고 있음을 안다. 왜냐하면 소통의 실재에 있어서의 그 소종래는, 사실은 진실하고 무망한 '실체(곧 성)의 욕구'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세계의 진실은 어디에서 왔겠는가? 없음에서 있음은 나올 수 없다. ● 작가는 현실의 양 극단에 서지 않을 수 없는 필연적 존재지만, 이를 거부하고 그 소이연을 반추할 수 있는 양수의 칼날을 밟고 선 홀로 남겨진 실체이다. 기실 홀로 남겨진 실체로서 자각하는 작가는 또한 홀로 그 존재를 논증해야 한다. 그리고 그 논증은 모두가 합의하고 이해할 수 있는 담론으로서만 가능하다. 만약 이러한 방식의 논증을 거부하고 자신의 직관에 의지하여 깨달음으로만 담론에 임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지속하는 물의 흐름과 같이 권력의 나르시시즘에서 영원히 헤매게 될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회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마 나이면서도 나이지 않은, 동양인이면서도 동양적이지 않는 허구의 헛다리를 짚고 서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우리는 감정이라는 문턱의 시비의 양극단에 알몸으로 서있지 않는가. 작가는 선언하지 않는다. 작가는 외로움을 외로움으로 느낀다. ■ 김동원
Vol.20071208f | 이근우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