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7_1207_금요일_05:00pm
갤러리 케이 서울 서초구 서초동 1463-10번지 Tel. 02_2055_1410 www.galleryk.org
은골단심(銀谷丹心) ● 내 작업실은 은(銀)이 많이 났다는 파주 장곡리 은골에 있다. 산 꼭대기까지 무덤을 아파트처럼 둘레둘레 업고 있는 용미리 바로 옆이라서 사람들은 무섭겠다고 한다. 사실 밤에는 좀 무섭다. 하지만 세상만사 지나온 살덩어리들이 있다 할 것 없이 모두 백골져 누워있는 것을 보면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닌 바로 나의 여정임을 가까이 느낀다.
할미꽃 아 아 아... / 견딤이란, / 꺼질 듯 꺼질 듯 / 우릿한 이글거림 / 뜻 없고 덧없는 시간의 더께 / 함께 기진하여 고개 숙이고 / 어느덧 세어진 마음밭은 / 보라잿빛 / 아직도 / 내 입술연지는 / 당신과 나눈 입맞춤으로 번져 있습니다.
一山詩帖·5 뼛속에서 / 풀잎 자라고 / 해와 달 뜨고 / 밤낮 / 굿치는 소리 들린다. ■ 김지하의 [一山詩帖·5]에서
도라지꽃 그대! / 그대... / 그대. / 아니 / 아니 / 젖는 / 고개 짓. / 울컥 / 흔들려 / 넘쳐흐르는 / 그대! 그래도 / 그래도 / 아니 비워집니다.
안녕 민들레 우리 / 운명, 우연의 탈을 쓴 그 살찬 손바닥에 / 돌연 뺨을 맞고 / 아무런 인사도 언약도 나눌 새 없이 / 잡고 있던 손 놓쳐 버렸지. / 황망 중에 네 손 다시 잡으려고 / 빈 하늘을 허우적대는 내 손은 / 맞은 뺨보다 더 아리고 참 많이 아팠어. / 우리 / 헤어져 있는 동안 사실 나는 / 그 손이 얼마나 세찼던지. . . / 어져 씰리고, 구르다가, 기다가, 엎어지고, 쑤셔 박히고, / 꼭 이슬받이 되는 줄 알았어. / . . . 그래 그래 그랬어. / 네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 / 달도 별도 지켜보는 눈빛 젖어서 노냥 일렁였지. / 이렇게 만나서 무지무지 반가워. / 우리 / 운명, 우연의 탈을 쓴 그 실한 손가락이 / 더 이상 헤어져 떠돌지 말라고 / 볕 좋은 이 자리에 한데 버무려 놓았나봐. / 민들레 너랑 나랑 이제야 만났으니, / 열 손가락 모두 다 / 눈부시게 빛깔고운 샛노란 꽃반지 끼고 / 두 손 들어 흔들어 보자아- / 해에게 / 달에게 / 별에게. / 너에게 나에게.
봄 봄 봄입니다 봄 / 봄 / 봄입니다.
달맞이꽃 꽃이 피면 같이 웃고 / 별이 뜨면 같이 웃습니다. / 꽃이 지면 같이 울고 / 별이 지면 같이 웁니다. ■ 가요 [봄날은 간다] 중에서
소프라노 칸나 짙푸른 치마 잎에 뛰어드는 여우비 / 오선 햇살 위에 상클 보석가루 뿌리며 / 마구 그려대는 높은음자리표 / 두 옥타브 위쯤 보다 더 고음자리, / 까만 빌로드 날개 물잠자리 자리에 / 선홍빛 하트모양 꽃 이파리들을 / 살그니 늘어놓았더니 / 건 듯 부는 바람에 / 라 라 라 랄 라 아 / 라 라 라 랄 라 아 / 라 라 라 랄라 랄라 랄라 랄라 / 랄랄 라!
이번 목판화로 제작한 작품들은 그동안의 「태백산맥」연작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주로 작업실 주변에서 접하는 식물들과 사계절에 대한 단상이다. 민들레, 달맞이꽃, 진달래, 도라지꽃, 맨드라미, 할미꽃, 개나리, 엉겅퀴, 부들, 억새, 씀바귀, 왕고들배기 등등 식물들을 소재로 동요, 가요, 판소리, 詩, 소설, 신문기사들과 세상사 그리고 개인적인 일상의 느낌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식물에 대한 생각이나 다른 사람의 글들을 직접 조형요소로 화면에 도입하기도 하였다. (화면과 관련된 글과 발췌 사용한 글은 보충설명처럼 책자에 실었다.) ● 나는 목판 중에서도 베니어합판을 사용한다. 넙적한 주걱칼만으로 사선각도로 빗겨그어서 뜯어내는데 한국화 붓의 운필로 바꾸어 말하면 '측필'과 유사한 것으로 얼마만큼 어떻게 뜯어질지 예측할 수 없다. 거칠기 짝이 없는 합판이지만 주걱칼의 날을 아래로 향하게 손에 움켜쥐고 판 위에 휘두르면서 그어대고 뜯어내면, 작은 조각도로 파는 것 보다 훨씬 운용이 자유롭고 큰 화면을 다룰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거친 칼맛에 더하여 목판 소멸법으로 가능한한 채도 높은 원색을 중첩 사용하여, 절제된 어떤 상태나 승화된 맑음을 추구하기 보다는 대중가요 부르듯 희노애구애오욕의 감정들이 그대로 드러나도록 하였다. _ 산 사람의 집과 죽은 사람의 집이 공존하는 은골 마을에서 ■ 안정민
Vol.20071207b | 안정민 판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