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 House : 붉은 틀

지은이_노순택

지은이_노순택 || 분류_예술 || 판형_240×240 || 면수_224쪽 발행일_2007년 10월 26일 || ISBN: 978-89-92492-21-8 || 가격_40,000원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노순택의 『Red House : 붉은 틀』을 구입할 수 있는 YES24로 갑니다.

노순택 홈페이지 suntag.egloos.com

청어람미디어 서울 마포구 서교동 480-26번지 EK빌딩 3층 Tel. 02_3143_4006

구조의 탐색 ①. 『Red House : 붉은틀』은 오랫동안 분단 문제에 천착해 온 사진가 노순택이 분단 상황에서 비롯된 남북한 특유의 모습을 세 가지의 관점에 따라 분류하여 제시한 작업이다. 반세기가 넘도록 지속되어 온 분단 상황은 분단 극복에 대한 의지와 무관하게 어느덧 자연스런 역사적 조건처럼 주어져 있는 듯하다. 전전세대에게 분단이란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던져진 비극이었지만, 전후세대에게는 세상을 알게 되면서부터 이미 주어져 있는 질서와도 같았다. 분단의 원인과 과정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는 그것이 이미 해방과 더불어 진행되어 온 냉전논리의 자연스런 유산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전전세대의 일상적 삶 속에 분단은 갑작스럽게 침입해 온 단절과도 같았다. 한편 전후세대에게 분단 이전의 상황이란 상상 속에서나 그려낼 수 있는, 혹은 상상력이 제대로 가닿지 못하는 아련한 세계에 불과하다. 날 때부터 그들의 나라는 이미 두 조각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들 모국의 구조였다. 구조란 허물 수 없는 것, 요컨대 허물면 전체가 무너지는 그런 것이다. 모든 것을 새롭게 다시 짜야만 구조는 만들어진다. 그래서 구조란 따르는 것이 편하다. 그렇다면 분단이라는 구조를 편하다고 해서 따라야 하는가. 모든 것이 아주 잘못되어 있어 새로운 질서를 짜나갈 때 수반되는 괴로움을 감당할 만한 가치가 있고, 나아가 새롭게 주어질 구조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만 구조를 바꾸려는 최소한의 꿈을 꿀 수 있다. 하지만 한 번도 분단이 아닌 상황을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또는 분단 이전의 상황이 분단 상황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분단의 구조란 그리 절박하게 벗어던져버려야 할 것이 아니다. 분단극복에 대한 의지는 단지 관념으로만 아련하게 남아있는 셈이다.

노순택_Red House_1장 펼쳐들다-질서의 이면_C 프린트_2005

당위적 요청이 이렇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우선 분단을 유지하는 정치논리와 경제논리를 그 이유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정치논리와 경제논리가 따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 이상 결국 이를 분단 유지의 현실논리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 문제에 대해서 한 사람의 사진가, 또는 관찰자로서의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다른 한편에서 현실논리와는 무관하게 분단극복의 의지가 추상으로 변하는 또 다른 까닭에는 분단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조'에 대한 인식이 있다. 현실논리와 상충되더라도 의지를 실행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것이 지나치게 순진한 믿음이라 할지라도 현실논리를 뛰어넘어 당위를 실천했던 예를 우리는 역사 속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분단을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는 현실논리와 무관하게 분단을 극복할 수 있는 숨은 에너지가 된다. 이 지점에서 깊숙한 정치논리를 떠나있는 예술가의 노동이 빛을 발한다. 분단구조에 대한 남북한 양국의 인식이 어떠한지, 그 인식이 어떻게 분단을 '구조'로 만들고 있는지를 파헤쳐 보여줌으로써 현실논리를 뛰어넘을 수 있는 길을 모색할 수 있는 것이다. ● 작가가 남북한 양국을 분주히 넘나들며 채집한 풍경들은 각각 「북한 속의 북한」, 「북한 속의 남한」, 「남한 속의 북한」이라는 상이한 관점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여기에 작가는 '펼쳐들다', '스며들다', '말려들다'라는 제목을 붙였다. 제목이 가리키는 구체적인 의미를 떠나 현실을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이러한 태도는 현실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혀준다는 점에서 값지다. 분단이 '구조'라면 그것은 모든 것이다. 요컨대 반도 전체의 현실은 송두리째 분단 상황에 얽혀있다. 이를 체감하지 못한다면 그 또한 분단이 구조이기 때문이다.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분석이 필요하고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잘 보이지 않는 모습은 현미경으로 확대해서 보아야 하고 구조에 얽혀 들어가 있는 나를 보기 위해서는 거울에 비쳐보기도 해야 한다. 수많은 다양한 시각과 적절한 관찰 방법이 필요한 것이다.

노순택_Red House_1장 펼쳐들다-질서의 이면_C 프린트_2005

②. 제1장 '펼쳐들다'에서 작가가 주목하는 것은 북한이 보여주는 북한의 모습이다. 그것이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진 북한이며, 심지어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은 그 모습에 제한되어 있기조차 하다. 그것 말고는 달리 그 사회를 알 수 있는 길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상 그 모습이란 북한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그 모습은 이상한 자기규정이다. 현실이란 우둔한 것이어서 알려지지 않은 현실은 현실로서의 자격을 갖지 못한다. 똑같은 하나의 현실도 알려지는 방법에 따라 전혀 다른 현실로 둔갑하듯 현실은 단일한 규정에 속박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현실은 어떻게든 한 가지의 규정된 방식을 통해 발생하지만 알려진 현실이란 늘 여럿이다. 북한사회의 모습에는 매우 다양한 이면들이 있을 것이다. 체험하지 않고서는, 혹은 살아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이면의 모습이란 알려지지 않은 현실이어서, 우리에게는 현실의 지위를 갖지 못한다. 반면 몰랐던 이면의 모습도 알려진다면 언제든지 현실로 둔갑할 수 있다. ● 작가는 획일적으로 주어진 북한의 모습에서 이면을 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가능한 한 다양한 이면을 보고 들추어내어 현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싶은 것이다. 보여주는 것밖에는 볼 수 없다는 물리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꼼꼼히, 주의 깊게 관찰하다 보면 이면은 저절로 드러난다. 아무리 단순하고 무의미해 보인다 하더라도 수많은 다른 가능성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아 오직 그 방법으로만 발생한 현실이란 그 자체로 경이로운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실은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남한의 방문자들에게 관례적으로 보여주는 북한 당국의 행사들은 규모의 웅장함이나 행위의 일사불란함에서 관객들의 시선을 압도한다. 수만 명씩이나 되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하나의 목적을 위해 몇 시간씩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이란 아무데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자유에 익숙해있는 남한 사람들에게 거대한 공동체의 단일한 움직임은 쉽게 이해되기 어렵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라는 생각이 불쑥 떠오르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에게 그 모습은 그리 낯설지 않다. 초중고 학창시절에 유사한 체험을 한 탓이다. 지금도 여전히 이와 유사한 집단주의가 우리에게 남아있다. 목적도 다르고 규모도 다르지만 본질은 같은, 질서를 강요하고 따르지 않으면 물리적 제약이 수반되는 그런 집단주의 말이다.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공동의 선이나 공통감, 공통의 진리 등이 개개인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된다면 그야말로 그 사회는 지복한 사회가 될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러한 공통의 논리는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없다. 개인은 집단과, 혹은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집단이 제아무리 숭고한 가치를 내걸더라도 모두가 그 가치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집단은 강요하고 개인은 버틴다. 개인이 집단의 권위 앞에서 버틸 수 없을 만큼 집단의 힘이 강한 사회를 우리는 전체주의 사회라 부른다. 우리에게 알려진 북한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전체만 있고 개인은 없는, 혹은 개인을 용납하지 않는 그 사회의 특징이 집단체조나 카드색션과 같은 행사장면에 잘 나타나 있다. 하지만 전체란 역시 개인들의 집합이어서 전체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다양한 개인들이 보인다. 억압하고 힘으로 누른다고 해서 개인이 전체에 통합될 수는 없는 것이다. 작가가 집단 속에서 발견한 것도 바로 그것이다. 화려하게 펼쳐지는 행사 장면의 구석구석에는 전체와 무관한 개인들이 있다. 그들은 행사의 규칙에 따라 기계적으로 몸을 움직이지만 머릿속은 딴 생각이다. 그래서 동작이 틀리는 이도 있고 줄도 맞지 않아 옆으로 비켜나가는 경우도 있다. 그러한 파격이 전체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임에는 분명하지만 그것 없이는 사람이 하는 행사라 할 수 없다.

노순택_Red House_2장 스며들다-배타와 흡인_흑백사진_2005

③. 제2장 '스며들다'는 북한을 방문한 남한 사람들과 북한 구석구석에 형성되어 있는 남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양국간 교류의 물꼬가 트이면서 남한 사람들의 북한 방문은 제한적으로나마 허용되고 있다. 북한을 처음 방문한 이들의 눈에 비친 북한의 모습은 소문으로만 들었던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 땅이 또 하나의 조국이라는 당위적 인식에도 불구하고 실제 눈에 비친 그 땅은 낯설 수밖에 없다. 그만큼 다르게 살아온 탓이다. 게다가 그 땅은 낯설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이국보다도 멀고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나라다. 비자 없이 삼 개월씩 체류할 수 있는 유럽이나, 인터뷰만 하면 여행비자로 쉽게 왕래할 수 있는 미국, 일본에 비하면 북녘은 아직도 여전히 금단의 땅이다. 언제 다시 방문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북한을 방문하는 이들은 한결 같이 사진 찍기에 열심이다. 작가가 주목하는 모습이 바로 북한을 촬영하는, 그리고 금단의 땅이었던 그 장소에 서있는 자신들을 촬영하는 남한 사람들이다. 흔치않은 기회를 맞아 북한을 방문한 작가가 주변에서 흔히 보아 온 남한 사람들의 모습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들이 사진을 촬영하는 행위 속에 북한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각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진은 작가에게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의 일종이다. 그들이 관심을 갖고 보는 것, 요컨대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은 기념촬영을 하는 태도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 여행사진은 보통 두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우선 여행사진이 하나의 장르로 유형화되어 가는 1860년대부터 그것은 줄곧 이국취향과 연결되어 있었다. 지리학자나 민속학자들처럼 사진을 자료로 활용고자 했던 경우를 제외하면 보통의 여행자들에게 사진은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였다. 이국취향이란 나의 감각에 익숙한 대상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경향을 뜻한다. 그래서 내게 익숙한 세계와 차이가 큰 세계일수록 이국취향의 정서에 충실히 부합한다. 저 너머의 조국이 이국정서를 불러일으키게 된 것은 기이하다 못해 비애감까지 불러일으킨다. 물론 도회지 사람이 제주도에 가서 느끼는 이국정서라는 것도 있지만 정서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 곳은 갈 수 없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제한된 방문기간 동안 여행자들이 사진에 담아내는 모습이란 대동소이할 것이다. 방문지역이 한정되어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낯선 곳에서 눈을 잡아끄는 대상들은 대개 비슷비슷한 지역의 상징이 주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리를 방문하는 여행자들은 그토록 수많은 에펠탑사진이 있어도 스스로 그 앞에서 기념촬영을 해야 하고 런던에서는 타워브리지 앞에서 포즈를 취하게 마련이다. 그것이 여행사진의 두 번째 목적이다. 내가 그 곳에 갔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와 더불어 내 눈으로 직접 그것을 보았음을 입증할 수 있도록 사물을 수집하는 행위가 병행되어야 한다. 그것 없이 여행은 완성되지 못한다. ● 평양의 순안공항에서는 모두가 김일성 전 주석의 사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해야 한다. 그 사진이 남한사람들에게는 북한의 상징인 것이다. 모두가 제각각 다른 위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어도 배경의 뒤쪽 어딘가에는 그의 사진을 담아 기념촬영을 한다. 그래야 비로소 제대로 평양을 갔다 왔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 광장이 그렇고 주체탑이 그렇다. 한편 평양 시내나 금강산을 관광할 때는 어김없이 안내원인지 감시원인지 혹은 둘다인지 알 수없는 이들이 따른다. 여행자들에게는 이들 역시 폐쇄적인 전체주의 사회의 상징이지만 때로는 기념사진을 찍어주는 아량을 베풀기도 한다. 적국의 수령이었던 이의 사진이나 적국의 상징물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포즈를 취하고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이들의 모습은 예전 같으면 상상하기 어렵다. 실제로 바로 남쪽에서 그와 유사한 행위를 하려면 죄 값을 치러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노순택_Red House_2장 스며들다-배타와 흡인_흑백사진_2005

④. 제3장 '말려들다'가 보여주고자 하는 모습에도 그러한 남한의 현실이 포함되어 있다. '남한 속의 북한'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작가는 이 장에서 북한에 대한 남한의 인식이 어떻게 표출되고 있는가의 문제에 주목한다. 90년대 이념의 이완기, 혹은 퇴조기를 거치면서 70-80년대를 관통해 온 가장 첨예한 문제의식은 차츰 현실논리의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는 듯하다. 분단이 구조이자 현실인 이상 그것을 현실논리로 풀어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현실의 배후에 은폐되어 있는 문제들조차 현실논리로 풀 수는 없다. 현실논리로 풀어야 할 문제는 현실정치에 맡겨두어야 하겠지만 도무지 그 논리가 손도 댈 수 없는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끊임없이 문제를 들추어내고 인식의 전환을 꾀하는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이념 차이에 대한 극단적 반감 같은 문제는 현실논리로 해결할 수 없다. 자본으로 회유할 수도, 힘으로 누를 수도 없는 것이다. 거기에서 비롯된 갖가지 파생사태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시간만이 해결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시간은 무용지물이다. 70-80년대의 작가들이 시대 전체의 화두로 삼았던 분단문제는 이제 더 이상 그만한 비중을 갖고 제기되지 않는다. 상황은 본질적으로 전혀 달라지지 않았고, 일반의 인식 또한 마찬가지인데도 말이다. 지쳤거나 권태로워졌거나 잊혀져가는 중임을 반증한다. 물리적인 구조란 쉽게 바꿀 수 없는 것이지만 한번 매스를 들이대면 금방 바뀐다. 반면 인식의 병은 물리적인 구조가 바뀌더라도 쉽게 치유할 수 없다. 인식이 구조를 만드는지, 구조가 인식을 만드는지 단정하긴 어려우나 쌍방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둘 다 바꾸려는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분단의 구조를 바꾸려면 분단에 대한 인식도 같이 바꾸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진단이 필요하다. 작가가 「남한 속의 북한」에서 하고 있는 작업이 그러한 진단의 일환이다.

노순택_Red House_3장 말려들다-전복된 자기모순_흑백사진_2005

통일전망대가 언제부터 낭만적인 데이트 장소로 변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개의 연인들은 그 곳에서 분단의 비애를 느끼기보다 달콤한 밀월을 꿈꾼다. 이를 구조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비극도 상업화시키는 것이 자본주의의 질서이며 그 속에는 타인의 고통을 팔아먹고 사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꿈에도 그리던 금강산'이나 '우리의 영산 백두산', '북한 주민의 생활모습'도 500원씩에 팔려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첨예한 문제는 이러한 순응주의가 아니라 다른 이념을 가진 이들에 대한 극단적인 적대감이다. 한때는 이념을 과학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었고, 신념으로, 혹은 세계관으로 삼았던 이들도 있었다. 그래서 이 땅에는 두 개의 과학과 두 개의 신념과 두 개의 세계관만 있었다. 명철한 학자들조차 제대로 본질을 규명해내지 못하는 이념을 이 땅의 사람들은 종교처럼 받아들여 타인의 그것을 배척했다. 두 개의 이념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다른 생각도 용납되지 않았기에 타인의 이념을 악으로 규정하고 축출시켜야만 내가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조금 과장하자면 이념의 배척을 생존의 질서처럼 부풀려 생각했다고 할 수 있겠다. 해방정국과 전쟁 상황에서는 실제로 그것이 생존과 직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념의 대립 각이 무디어가는 과정에서도 남북의 권력자들은 그 기억을 연장시켜 '구조'의 유지에만 몰두했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념이란 허깨비 같은 것인데도 말이다. 그리하여 아직도 옛 기억에만 충실한 남쪽 사람들 중에는 다른 이념을 가진 동포를 적으로 설정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고, 권력의 하수인이 되어 그들 이념의 대리인으로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작가가 작업노트에 적고 있는 청년기의 기억들이나 사진을 통해 보여주는 남한사회의 현실이 이념대립의 확대재생산과 반복에 관한 것이다. 보수단체들의 남북교류 반대집회는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더라도 시대착오적이지만 맹신이란 본래 시야를 좁히는 법이다. 그래서 자기 식으로만 세상을 보며, 역지사지는 그들의 사전에 없다. 별다른 생각 없이 그들 행사에 참견했다가 테러당한 시민의 쓰러진 모습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전쟁의 희생자들의 모습과 닮았다. 하기야 종군한 동포들의 태반도 별 생각 없이, 이념과 무관하게, 어쩌다가 끌려들어간 이들이었다. 전쟁박물관에는 제 동포와의 살육전을 승리로 이끈 이들이 영웅의 형상으로 서있고, 영문도 모른 채 전장으로 떠밀려나왔던 북쪽의 동포들은 사악한 적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정의로운 영웅이나 사악한 적군 모두가 자신도 모르게 그리 된 이들이다. 그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란 책 속에나 있는 단어였던 것이다. 그나마 자유의지대로 자신의 조국을 택할 수 있었던 전쟁포로들 중에는 어디로도 갈 수 없어 제3국행을 택했던 이들도 많았다. 구멍 뚫린 벽 뒤에서 얼굴을 내밀고 전쟁포로의 포즈를 취한 아이의 모습, 그것은 사실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반도사람들 모두의 가련한 초상이다.

노순택_Red House_3장 말려들다-전복된 자기모순_흑백사진_2005

분단문제를 다루었던 70-80년대의 작가들은 매우 진지한 자세로 분단과 관련된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했다. 한편 90년대 이후의 상황에는 큰 변화가 있다. 분단이라는 구조는 변하지 않았지만 그 구조에 대한 작가들의 인식은 예전만큼 절박하지 않은 것이다. 느긋하게 유장한 호흡을 갖고 기다려야 하는 것은 맞지만 분단 구조에 대한 탐색마저 늦추어서는 안 된다. 괴롭고 힘든 상황에도 적응해 나가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분단이라는 구조는 적응해나갈 상황이 아니라 극복해야 할 상황이라는 점에는 모두가 동감하나 정작 극복을 위한 노력은 선뜻 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 와중에서 분단이라는 현실은 조금씩 잊혀지고, 그 현실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무디어간다. 분단의 구조에 대한 환기가 필요한 때가 바로 그 시점이며, 노순택의 작업은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 박평종

책 구성_120점의 사진과 20여편의 에세이 1장 펼쳐들다_질서의 이면 North Korea in North Korea 2장 스며들다_배타와 흡인 Give & Take 3장 말려들다_전복된 자기모순 North Korea in South Korea

노순택 ● 대학에서 정치학을, 대학원에서 사진학을 공부하다 멈췄다. 주요작업은 전쟁과 분단에 관한, 이미지 수집과 말걸기다. 한국전쟁의 흔적뿐만 아니라, 거기서 파생되어 나온 현재의 사건과 정황을 눈여겨보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회적 폭력의 문제가 어떤 양상으로 반세기 전의 전쟁과 관계 맺고 있는지를 들춰보려는 것이다. 개인전 「Red House:붉은틀, 2007」, 「얄읏한 공 2006」, 「분단의향기, 2004」와 다수의 국내외 단체전에 참여했다. ■ 청어람미디어

Vol.20071205h | Red House : 붉은 틀 / 지은이_노순택 / 청어람미디어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