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예술가의 뮤즈展

고산금_천성림_이지현_이소영_샤오제 시에展   2007_1201 ▶ 2008_0106

책, 예술가의 뮤즈展_갤러리 윌리엄 모리스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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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1201_토요일_03:00pm

한길사 창립 31주년 기념 기획展

갤러리 윌리엄 모리스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1652-136번지 예술마을 헤이리 Tel. 031_949_9305 www.heyribookhouse.co.kr

예술 작품 속에 배어든 책의 아름다운 그림자 ● '책'이라는 단어가 연상시키는 무형, 유형의 개념은 참으로 다양하다. 사전에 따르면 책은 문자와 형상을 통해 사상ㆍ감정ㆍ지식 등의 '내용'을 전달하는 인쇄물의 '형식'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책은 그 안에 담긴 내용과 동일시되어 인식된다. 어떤 책을 아느냐는 물음은 책의 겉모양이나 제목을 안다는 의미를 넘어 내용을 읽고 이해했는지를 묻는 물음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책을 만드는 이들에게 책의 내용만큼 중요한 것은 바로 형식이다. 책의 형식은 상품의 겉모양이기 이전에 저자의 호흡, 손길, 영혼을 담는 몸과 같은 것이다. 어떤 글씨체로 얼마나 줄 간격을 둬야 글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으며 맥락을 잘 전달할 수 있을까? 몇 그램의 종이를 사용해야 무겁지 않고 한 장 한 장 쉽고 부드럽게 넘어가는 책을 만들 수 있을까? 책을 만드는 이들의 고민은 책이 단지 내용이거나, 내용을 담는 그릇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최적의 요소들이 모인 하나의 완결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렇게 만들어진 책은 독자, 특히 예술가들에게 어떻게 다가갈까? 예술과 책은 어느 지점에서 만나고 있을까? 이러한 궁금증이 이번 전시 기획의 시발점이다. '책, 예술가의 뮤즈'전은 단순히 작품 속의 책을 보여주는 전시가 아니다. 이 전시는 책이 예술적 영감의 원천으로 혹은 아예 재료 자체로 쓰인 다양한 경향을 살펴봄으로써 현대 예술의 흐름 속에서 책이 지니는 내면, 외면적 의미를 가늠해보고자 한다.

고산금_노르웨이 숲(무라카미하루키 소설)_구슬, 스테인리스 스틸_100×100cm_2007

Chapter 1. 문자ㆍ텍스트ㆍ책 ● 책은 문자와 디자인으로 구성된 종합 예술품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책의 기반이 되는 것은 글, 즉 내용이다. 하지만 문자ㆍ텍스트는 책이라는 형식 안에 있을 때 의미가 있다. 1장에서는 사회적 약속과 법칙에 의해 탄생한 하나의 기호인 문자가 그 법칙이 적용되는 의미의 망을 벗어나 새로운 조형적 예술 작품으로 탄생, 또 다른 시각적 의미를 담는 예술 작품의 창조적 재료나 원천이 되는 경우를 살펴본다. ● 작가 고산금의 작품은 책의 레이아웃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책의 구절이나 노래가사를 모조 진주알이나 스테인레스 스틸 구슬로 사각 판넬에 재현한다. 글의 의미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띄어쓰기와 문단을 그대로 살려 문자 하나에 진주알 하나가 대응되도록, 책의 페이지나 구절을 재현한다. 반짝이는 재료의 독특한 물성, 규칙적으로 배열된 구슬이 만들어낸 빈 형태에서 시각적인 경쾌함이 느껴진다. 그가 참조한 책의 내용을 안다 해도 이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가 만든 새로운 페이지는 독해의 의지를 무화시키며 문자와 텍스트의 완전한 이해, 혹은 제대로 된 해석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물음을 던진다. 태생적으로 오역의 한계를 지니고 태어난 문자와 텍스트들이 만드는 틈에 주목하며 그는 타인과의 의사소통이나 관계가 찰나적이고 단편적인 것으로 끝나버리는 현대에 씁쓸한 메시지를 던진다. 작가 고산금은 판면의 배열을 만드는 것을 넘어 또 다른 형태를 창조하기도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참조한 작품 '노르웨이 숲'이 그러하다. 정확히 2배수만큼 폭이 늘어나며 나선을 그리는 스테인레스 스틸 구슬은 한없이 안으로 말려 들어가거나 밖으로 팽창하는 무한대를 보여준다.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여주인공이 들려주는 말을 재현한 이 작품은 끊임없이 순환하는 삶에 대한 작가의 내적 성찰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천성림_Untitled(catastrophe)_종이에 과슈, 마카_111×141cm_2006~7

빨갛고 노란 격자무늬가 캔버스를 가득 채우고 있다. 선과 면, 색으로 이루어진 도형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알파벳이나 한글의 자음, 모음을 연상시킨다. 뜻을 이루기 전의 상태, 텍스트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들을 반복, 나열하여 하나의 시각적 형태가 탄생했다. 여섯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재미작가 성천(Seong Chun, 한국명: 천성림)은 자신이 읽은 글 중 기억에 남는 구절을 종이에 인쇄한 후 얇게 잘라 그 조각으로 뜨개질을 한다. 종이에 인쇄된 텍스트는 책의 구절이거나 작가의 해석이 담긴 내용 혹은 작가가 임의적으로 구성을 바꾼 구절이다. 텍스트 종이가 씨실과 날실이 되어 한 올 한 올 엮여 하나의 작품이 되는 과정은 흡사 단어 하나하나가 문장을 이루고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의 작품 또한 문자나 텍스트가 던지는 의미와는 무관하다. 종이에 깨알같이 씌어 있는 문자들은 직조의 과정에서 나타남과 사라짐을 반복하며 독해와 의미 부여의 대상에서 벗어난다. 설사 뜻을 아는 단어를 발견했다 할지라도 그것 또한 작가에 의해 한 번 걸러진 것으로 원본의 뜻은 이미 지워졌다. 작가 천성림은 글의 '본래 뜻'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며 결국 모든 텍스트는 읽는 자의 경험과 환경에 따라 그 해석이 달라질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이지현_007DE011 wordbookE_책 뜯기_45×28×8cm_2007

이지현은 책 뜯기(Pluck off) 작업을 한다. 그의 작품은 누가 봐도 책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하지만 책장부터 표지까지 모두 뜯겨져 있는 책은 무슨 책인지, 그 속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색이 바래지던 책을 특별한 사물로 기억하는 이지현은 책이 시대와 개인의 정체성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1960~70년대 자신과 함께했던 교과서, 소설책 등이 과거 자신의 정체성을 대변했다면 지금은 또 다른 책이 자신의 사고와 감성에 새롭게 영향을 미친다고 여긴다. 그는 제일 먼저 학생이라는 정체성을 자신에게 부과했던 교과서를 뜯으면서 과거의 이지현을 기억하고 또한 지운다. 이 작업을 통해 과거로부터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현재의 자아로 이동하는 것이다. 책의 형태는 남아 있으나 특정 내용과 의미가 제거된 이지현의 뜯겨진 책은 누구의 특정한 책이 아니라 한 시대를 기억하는 하나의 보편적인 책으로 자리 매김 한다. ● 텍스트·글·책에서 시작했지만 텍스트의 의미를 지우고 비운 고산금, 천성림, 이지현의 작업은 공교롭게도 다시 책을 떠올리게 한다. 엄청난 집중력과 고된 수공의 노력이 필요한 이들의 작품은 고민과 퇴고, 수정과 교정을 거듭하는 책 장인의 손길을 연상시키면서 동시에 내용을 천천히 곱씹으며 책장을 넘기는 독자의 손길 또한 연상시킨다. 단어·문자·텍스트의 한계, 그것이 지칭하는 것 외의 수많은 의미의 틈에 주목하는 이들의 작품은 보는 이에게 모호함과 궁금증을 자아낸다. 시각적으로 아름답고 촉각적으로 특별한 이들의 작품은 책을 이루는 요소에 대한 고찰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좀 더 나은 소통과 깊이 있는 사고가 가능한 책의 가치를 동시에 일깨운다.

샤오제 시에_Chinese Library No. 35_캔버스에 유채_121.9×168.9cm_2007

Chapter 2. 미지의 시간으로 ● 문자와 디자인이라는 외연적 요소를 넘어, 완성된 한 권의 책은 새로운 삶을 사는 존재물이다. 앞서 세 작가의 작품은 책의 기본 구성 요소인 문자·텍스트에서 시작해 책 자체가 지니는 의미를 고찰하도록 우리를 유도했다. 2장에서는 내용이 아니라 책의 상징적·역사적 의미를 주목해 보고자 한다. ●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중국 출신 회화작가 샤오제 시에(Xiaoze Xie)는 쌓여 있는 책이나 신문 등을 캔버스에 사실적으로 재현한다. 쌓여 있다는 것은 지층과 같이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다. 차곡차곡 쌓여 있거나 나란히 정렬되어 있는 도서관의 고서들은 샤오제 시에의 시선과 손길에 의해 현재와 기적적으로 조우한다. 모마 도서관의 책을 그린「MoMA Library」, 중국 고서를 그린「Chinese Library」, 쌓여 있는 신문의 옆모습을 그린「January-June 2006」,「May-June 2005」, 중국 고서화가 불에 타는 모습을 재현한「Ancient Book Series」, 어두운 배경 속에 니체나 마르크스의 책을 촬영한 사진 작업「Modern Book Series」등 그는 시대의 사건을 기록하고 역사의 흐름을 기억하는 책이나 신문 등을 화폭에 되살려낸다. 낡고 너덜너덜해진 갈색 빛의 책은 마치 조용히 숨을 쉬고 있는 듯하며, 도서관의 고서들은 내용이 소거된 채 미니멀한 아름다움을 발한다. 하지만 형태의 아름다움이나, 낡은 책이 불러일으키는 애잔함 등이 그의 작품을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는 아니다. 샤오제 시에는 책이 단지 내용으로가 아니라 주변 상황과 종합하여 역사적 사실과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임을 말한다. 지금 이 순간도 여전히 현재의 사건을 기록하고 시간을 간직하는 책은 꿋꿋이 역사의 무게와 세월의 무상함을 견디며 살아남을 것이다. 책이 지난 시간에 대한, 그리고 현재에 대한 책임을 인간과 같이 짊어지고 있음을 그의 작품은 조용히 말한다.

이소영_끊임없이 열리는 또는 닫히는_디지털 프린트_140×352cm_2007

작가 이소영의 작품은 미지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는 신비로운 숲과 같다. 수없이 중첩된, 문처럼 보이는 사각형들이 가득하며 바람에 날리는 커튼, 누군가 방금 앉았던 의자, 책 한 권 등 일상의 사물들이 보인다. '끊임없이 열리는 또는 닫히는', '북쪽만 있는 숲' 등의 작품에 보이는 책이나 문자는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암시한다. 책은 고독한 개인이 언제 어디서건 간편하게 여행을 떠날 수 있는 하나의 탈출구이며 또 다른 세계로 열린 문 혹은 창과 같은 것이다. 독자는 책장을 여는 순간 예상하지 못한 생각의 길, 감성의 흐름을 만나며 실재하는 곳이든, 미지의 영역이든 미처, 혹은 아직 가보지 못한 곳으로 이끌린다. 공간을 촬영한 이미지를 수없이 중첩시켜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작가 개인만이 경험하고 기억하는 주관적 공간을 재현하는 이소영은 자신 또한 책을 통해 현실과 상상의 세계, 그 경계를 수도 없이 넘나들었다고 고백한다. 이소영의 작품은 책이야말로 각자의 경험과 느낌에 따라 각기 다른 인상과 여운을 남기는 주관적 공간의 대표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 '책, 예술가의 뮤즈'전에 선보이는 작품들은 책이 단지 내용을 전달하는 매개체가 아니라 역사와 개인의 삶과 함께하는 존재물임을 시각적으로 확인시켜준다. 관객은 이들의 작품에 스민 책의 그림자를 통해 책과 새롭게 만난다. 숭고한 정신의 담지자, 위대한 철학자의 조언자, 사색하는 자의 다정한 벗인 책은 예술가들의 손길로 또 다른 생을 부여받으며, 관객들의 삶과 어우러져 더욱 풍성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빚어낼 것이다. ■ 노은정

Vol.20071202f | 책, 예술가의 뮤즈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