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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1128_수요일_05:00pm
학고재아트센터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0-5번지 Tel. +82.(0)2.739.4937 www.hakgojae.com
부재한 진실, 21세기 비망록_김석 조각의 상황과 조형론 ● 조각가 김석은 20세기를 건너와 21세기 인류에게로 항해를 지속한 '욕망'의 표피들을 그려내고 있다. 그가 취한 방식은 작품들이 어떤 상황을 스스로 창조하는 것이다. 상황은 때로 유사 용어인 '정황'으로 바뀌기도 한다. 즉 그의 작품들은 독립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개입의 모반을 꿈꾸는 유혹자이다. 하여 낱 개 작품들은 그 자체로 상황의 서사를 구축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 자신만의 비평을 요구한다. ● 필자는 마치 유령처럼 떠도는 이 작품들의 상황을 기술하고 거기서 해제의 통역을 뽑아 올릴까 한다. 이번 김석 작품에서 상황의 기술 없이 작품을 해제한다는 것은 미학의 뼈만 추스려 이장하려는 무모한 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상황을 위해 극적 구성을 차용하기로 한다. 무대 : 빈 공간이다. 비상구 등만 있는 상영 직전의 극장분위기라 할 수 있을까? 기형도의 죽음이 극장에서 발견되었듯이 텅 빈 공간이지만, 알 수 없는, 묵시록적 분위기가 깔려 있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가변 설치형 무대가 등장한다. ● 배우 : 배우는 없다. 가변 설치형 무대가 등장할 때마다 관람객이 등장하고, 그 관람객은 배우가 된다. 배우는 확정적이지 않다. ● 장면 : 장면은 정해진 것이 따로 없다. 모든 것은 우연과 필연사이에서 떠돈다. 모순처럼 보이는 것들이 때로 완전한 정합의 논리로 이어지고, 다시 역설의 불합리성을 파생시킨다. 배우가 없을 때와 있을 때의 차이처럼 각 장면은 부유하고 흐른다.
찬란한 프로파간다의 모순된 증명들 ● 상황 : 한 사람이 붉은 커버를 씌운 마이크 앞에 서 있다. 그는 무어라 중얼거린다.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연설을 하기도 한다. 때로 그는 세일즈맨이 되어 '언변'을 판매한다. 그가 누구이던 간에 마이크 앞에 서 있는 이유만으로 그는 그 '무엇'이 될 수 있다. 목사, 정치가, 약사, 변호사, 그리고 평범한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그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 '무엇'에 의해 발가벗겨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마이크의 선은 사람 크기 정도의 사인보드로 연결되어 있다. 사인보드의 화면은 남성의 샅을 앞에서 클로즈업한 것이다. 남근이 있어야 할 자리에 가늘고 긴 음통의 스피커가 솟아 있다. 발기한 성기를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이것은 박민규의 소설이 타전했던 것처럼 "좆까라 마이싱이다!"를 외치는 듯하다. 붉은 음통과 녹색의 나팔, 그리고 노란 우퍼로 이뤄진 이 '좆'의 타전은 곧장 자신에게로 파고든다. 즉, 마이크에 쏟아 낸 소리가 자신을 향해 욕지거리 쓰레기로 확장되는 것이다. ● 통역 : 이 작품은 아서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을 연상케 한다. 여기서 세일즈맨은 가족을 위해 마지막으로 자신의 목숨을 판다. 김석은 '나'로부터 시작된 욕망의 변주들이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모순된 증명'임을 밝히려 한다. 그러나 보편적 의미로서 '남근주의'의 표상 따위로 전락하지 않는 이 작품의 특성은 일종의 자기 환원성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프로파간다의 속성은 엄밀하게 말해 명료하지 않으며, 상대적이다. 대체로 '선전'이라 번역되는 이 용어의 "실체는 단일·불변의 개념이 아니다"라는 말에서 회의적이다. 그러므로 김석이 형용구로 내세운 '찬란한'이란 미사여구도 그리 찬란하지 않다.
찬란한 나르시시스트의 모순된 증명들 ● 상황 : 사인보드 하나가 서 있다. 사인보드의 사인은 김석 자신이다. 그는 스피커로 치환된 둥글고 검은 뿔테 안경을 썼고,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종의 '비웃음' 쯤으로 해석될 수 있는 치장된 표정을 짓고 있다. 혀를 길게 내밀고 있는 그의 얼굴은 사회와 사회 바깥의 경계에 머물고 있는 비주류의 인종을 가장한 듯 보인다. 무방비 상태의 얼굴이라 할까, 아니면 자연회귀 그도 아니면 이것은 스스로를 구속한 나르시시스트의 얼굴이라 할 수 있을 터이다. ● 관객이 이 앞을 지나가면 갑자기 뚫린 구멍(입)에서 무엇이 불쑥 튀어 나온다. 혀다. 털 달린 혀가 드르륵 소리를 내며 마치 몸을 휘감기라도 할 것처럼 날름거린다. 스피커로 바꾸어 놓은 눈은 이 작품의 키워드다. 그로테스크한 정황에 처했을 때 만화적 이미지로 차용되는 나선형의 동그라미는 이 경우 스피커의 우퍼가 대체한다. 눈은 음파의 고저에 의해 '떨림'의 파동을 반복적으로 발신한다. ● 통역 : 나르시시스트의 운명은 외부(세계)가 아닌 내부(자아)에서 결정된다. 내가 '나'에게로 보내는 '미(美)'의 화살은 나를 잠식시키거나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차원의 세계로 이동시켜 버린다. 죽음이 완전한 소멸을 가리키지 않듯이 죽음 이후의 세계로 진입하는 문을 열어두는 것이다. 예술가의 운명은 그 자신이 '미'의 창조자라는데 있다. 발신자와 수신자의 동일성이 갖는 모순성 때문에 이 작품의 언어는 해독 불가능한 상태로 꼬여 버린다. 한마디로 고장 난 장남감처럼 끊임없이 "우 헤헤헤 헤" 거리며 멜랑꼬리(Melancholy)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단 얘기다. 이 작품에서도 동일한 형용구 '찬란한'이 쓰였다. 그것과 '모순된 증명'사이에는 모호한 긴장감이 형성된다. 우리가 모호하다고 느끼는 것은 매스꺼움과 같은 역류의 감정이다.
어느 휴머니스트의 은밀한 웃음 ● 상황 : 검은 대리서 좌대 위에 작가의 두상이 있다. 누런 황금빛이 은은하게 번져 나오는 이 인물상은 고대 철학자의 두상처럼 근엄한 표정을 지은 채 침묵에 잠겨 있다. 머리칼을 완전히 밀어버린 매끈한 두상에서 수도승의 구도를 엿볼 수도 있을 터이다. 이 두상의 특징은 눈과 코, 귀, 입의 디테일을 섬세하게 새겼다는 점이다. 주지하듯 이 구멍들은 보고, 냄새 맡고, 듣고, 말하는 기능을 가졌다. 다시 말해 세상과 통하는 넷(net)의 주인들인 셈이다. ● 관객은 두상을 저 앞에 두고 손잡이를 당긴다. 머리 위에 눈두덩이 만한 쇠구슬이 순간 둔탁하면서도 명료한 '땡~' 소리를 내며 공간을 울린다. 이때 우리는 이 두상의 입이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한다. 입은 다른 입을 덧대어 꿰매어 놓았다.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는 입의 표정과 이빨이 머리통을 울리는 파열음과 함께 깔깔거리는 듯하다. ● 통역 : 관객은 줄을 잡아 당겨 놓는 행위를 통해 이 작품의 알리바이를 완성시킨다. 전시의 형식이 대부분 관객을 관자(觀者)의 태도로 내모는 것을 상기할 때 이 작품은 관람객이 단순한 방관자이기를 용납하지 않는다. 인터랙티브 하다고 할 수도 없다. 작가와 마찬가지로 관객은 이 작품의 부분적 창조자이자 동조자이며, 때로 도망자이다. 손잡이를 잡는 순간 우리는 작가가 파 놓은 알리바이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손잡이를 놓고 돌아서는 순간 우리는 그것으로부터의 도망자라 할 수 있다. 자, 당신은 이 웃음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도망칠 수 있는가!
존경에 경의를 표하다 ● 상황 : 조나단 브로프스키의 작품을 연상케 하는 이 작품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 태도를 갖는다. 인체의 옆면 아웃라인을 단순화 해 쇠판으로 절단하고 골반부위와 어깨부분에 이음매를 두었다. 사람이 지나가면 모터가 작동해 허리를 숙인다. ● 통역 : 조나단 브로프스키의 작품과는 형식적 유사성일 뿐 내용은 전혀 다르다. 이 작품의 의미는 앞서 보여준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모종의 역설적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작품 제목에서 이미 드러내고 있듯이 '존경에 경의'를 표한다는 모순어법은 누가 누구를 존경하는 가에 대한 이중질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는 경의를 표하는 주체가 조각으로 등장한다는데 있다. 인류는 역사의 영웅을 신격화하는 수많은 모뉴멘트를 제작해 왔다. 죽음이후 실체가 없는 존경의 주체는 조각이 대신해 온 것이다. 조각가 김석은 오히려 조각이 인간을 향해 경의를 표하게 함으로써 물신화 된 세상의 욕망을 조롱한다.
가벼운 생각에 잠재된 어떤 형이상학의 소리 ● 상황 : 아크릴 상자(육면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아래에 하나는 위에. 아래 상자만 초록색이다. 상자의 사방 면에는 구멍이 뚫려 있고, 그 안에 스피커가 있다. 포개진 두 개의 상자 위에 LP판 턴테이블이 있다. 다시, 원형의 LP판 위에 투명한 재질로 만든 인물 두상이 있다. 전원이 들어오면, 판은 돌아가고 스피커에선 야릇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긴 시간 동안 스피커는 웃음소리와 (팝)음악을 반복적으로 들려준다. 웃음소리 사이에서 비틀즈 노래는 감성의 주파수를 넘나들며 매우 원초적인 느낌을 갖게 한다. ● 통역 : 여기에 등장하는 오브제들은 시간성과 관계가 있다. 오래된 턴테이블과 LP판은 20세기를 지탱했던 소리의 구조물이다. 소리가 구조물에 의해 재생된다는 사실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뿐만 아니라 정교한 구조물일수록 원음에 가까워진다는 스피커의 합리주의적 구조체는 여전히 그 진리를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판의 속성을 진화시켜 온 인류는 이제 낡은 플라스틱의 음파를 버린 지 오래다. 스피커는 스피커를 향한다. 그래서 소리는 소리를 향한다. 소리 위에 떠서 빙빙 돌아가는 텅 빈 투명 인물은 20세기의 음파 속을 떠돈다. 정확히 그 시대가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소리의 동그라미를 따라 어디론가 흘러가게 될 것이다.
인간 같은 동물, 동물 같은 인간Ⅰ-나의 가족 ● 상황 : 네 명의 인간과 개 한 마리가 등장한다. 폴리에스테르로 제작된 이 작품들의 표면은 매끈하고 하얗다. 또한 손을 마주잡은 채 서서 웃고 있다. 물론 개는 웃지 않는다. 어린 아이에서 어른까지 연령은 다르나 똑 같은 키를 하고 있다. 다섯 동물들은 등을 맞댄 채 밖을 향해 서있다. 이 작품의 연작인 「인간 같은 동물, 동물 같은 인간Ⅱ-내 친구」는 다섯 동물에서 아이와 개만을 등장시킨 것이다. 아이와 개는 마주보며 손을 맞잡고 있다. ● 통역 : 이 시대는 과거와 달리 대가족의 의미가 거의 없다. 출산율이 세계 최저 수준이라는 통계 수치는 가족해체의 시사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노골적으로 묻는다. "누가 동물이며 인간인가?" 그런데, 이 질문을 앞서가는 생각은 인간인 동물이 동물인 개와 혈연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황당함이다. 조각가 김석은 21세기 가족의 편리성에 의해 '동물'의 주체성이 오래된 미래 속으로 습합해 갈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부재한 진실들Ⅰ-감싼 것과 감싸여 진 것 ● 상황 : 그리스 조각 「원반던지기」의 형상을 차용한 이 작품은 양복 정장을 차려입은 현 시대 중년 남성이다. 그는 두툼한 다이어리를 원반처럼 들고 던지기 직전의 동세를 취하고 있다. 인체 사이즈보다 크게 제작되어 그 자체로 하나의 물신이 된 듯하다. 즉, 기념조형물처럼 전시장에 들어섰단 얘기다. 황금빛이 도는 청동 재질로 인해 작품은 무척 생경한 느낌을 준다. 작가는 이 작품을 투명비닐로 포장했다. ● 통역 : 작품은 포장에 의해 의미를 상실한다. 비닐은 안과 밖을 투과시켜 조각상의 실체를 가둬버린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청동 조각상은 단지 비닐 안의 거대한 물신일 뿐이다. 이것은 진리 혹은 진실에 대한 탐문일 수 있다. 무엇이 진실이냐고 묻는 공안(公案)의 목탁소리처럼 이 화두는 너무나 명쾌하다. 그러나 우리 삶은 늘 거짓으로 가장되어 있거나 혹은 환영에 찬 사물에서 진리를 찾지 않던가. '감싸다'의 동사형은 완료형일 때 훨씬 강력한 은폐물이 된다.
부재한 진실들'의 연작(Ⅱ~Ⅴ) ● 상황 & 통역 : '부재한 진실들'의 연작(Ⅱ~Ⅴ)은 시각적 사실에 대한 '지시형' 비틀기다. "이것은 sign입니다"이라고 말하지만, 이 작품은 교회 십자가를 원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명백한 시뮬라크르다. 자기 동일성 없는 이 복제의 구조물은 그러나 다시 보면 온갖 간판들의 집합체다. 교회의 십자가라는 것도 사실 하나의 간판일 뿐이며, 표식이지 않은가. 관념의 한 부분을 유희하듯 흔드는 작가의 전략은 '부재한 진실들'에서 읽히는 주요 코드라 할 수 있다. ● 각양각색의 옷 조각을 모아 다시 옷을 만들어 놓은 "이것은 옷입니다"는 욕망의 극점에 서 있는 옷(껍질)의 속성을 희화화한다. 깨달음의 근접지에서 해탈 웃음을 짓는 무소유의 해탈승들이 단벌옷 넝마를 입었다는 사실은 이 옷의 희화성을 더 확장시킨다. 뿐만 아니라 이 옷에선 어느 순간 남근이 불쑥 튀어 오른다. ● "이것은 스테인리스 스틸입니다"는 여성의 가슴이 주렁주렁 매달린 스테인리스 조각 작품이다. 욕망의 기호는 시각적 사실의 이미지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마그리트의 작품 「이것은 파이프다」와 같이 '부재한 진실'의 리얼리티는 작품의 사물성에 있다. 이 경우 작가는 조각의 재료에 집착한다. 그런데 마지막 작품인 "이것은 숭배, 숭고, 사물입니다"는 구두에 관한 진실은 몇 가지 상징어로 쪼갠다. 숭배와 숭고, 사물이라 명명한 이 구도의 정체는 김석이 세상을 향해 던지는 마지막 화두다. ● 모든 것은 리얼리티에서 시작해 리얼리티로 환원한다. 구두의 리얼리티는 공산품이라는 오브제에 있지 않고, 그것을 신었던 한 인간의 삶에 있다. 발바닥의 형상에 의해 뒤 굽이 닳아졌다거나 걷기의 수만큼 껍질에 주름이 잡혔다는 것이 리얼리티다. 그 시간성의 지층만큼 구두는 숭고한 사물로 탈바꿈한다. 하여 사물이면서 숭고한, 그리고 숭배의 원천이 되는 조형물(조각)이 탄생하는 것이다. ● 이 상황극의 결말과 암전은 고요하다. 길게 패이드 아웃되는 조명아래서 구두 소리가 여운처럼 지속된다. 다시 모든 것이 고요해 졌을 때, 현실이 새벽처럼 찾아든다. 지금 여기, 네온이 빛나는 21세기 서울지형의 어느 번화가, 그 옆 골목길. ■ 김종길
Vol.20071128b | 김석展 / KIMSUK / 金錫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