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형택 조각展   2007_1117 ▶ 2007_1127

장형택_어디쯤 가고 있을까?_현무암, 강철, 청동_132×210×80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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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1117_월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관훈갤러리 신관1층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Tel. 02_733_6469 www.kwanhoongallery.com

예속과 자유의 서사시 ● 장형택의 작업은 대개 「업(Karma)」이라든가 「현대인의 감춰진 노비문서를 찾아서」라는 명제를 갖는다. 작가가 설정한 작품명에 의존하자면 그의 작품은 윤회하는 생에 대한 성찰을 담은 일련의 작업과 현대인의 억압된 상황을 고발적으로 담은 작품들로 구분할 수 있다. 윤회관에 따르자면 이들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개념이기에 두 개의 카테고리를 설정하여 인간의 생을 원인인 '업(業)'과 그 결과 구속된 '노비(奴婢)'라는 상태로 규정함을 본다. 젊은 작가가 생의 순환에 대한 내용을 다루는 것도 그러하지만 현대인의 한계를 '노비'라는 전근대적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도 결코 평이하지는 않다. 작품 제목의 진지함 만큼이나 그의 작업은 시류를 경계라도 하는 듯 노동지향적이고, 집적형이다. 그의 작품 태도는 적어도 존재의 무게를 떨쳐 나가기 위한 가벼운 농담같은 류와는 거리가 있다는 말이다. 그가 인간의 역사와 생에 대한 경외심을 잃지 않은 우리 시대 몇 안되는 젊은 작가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런 이유에서다. 생에 대한 경의 ● 장형택의 작품 앞에서는 마치 베토벤의 장중한 교향곡이 울려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마도 베토벤이 추구한 주제와 그의 작품에서 인지되는 주제의 유사성에도 기인하겠지만 작품을 '하는' 방식에서도 기인할 것이다. 음악에서 다양하고 풍부한 선율을 만들어 내어 다채로운 음의 세계를 보여주는 슈베르트나 모차르트와 달리 베토벤은 하나의 멜로디를 찾아내면 반복하여 다듬고 변화시키고 또 다시 반복하였다. 무궁무진한 악상을 소유한 슈베르트에 비하면 베토벤은 떠오른 악상을 다듬고 또 다듬는 각고의 노력을 통해 하나의 교향곡을 완성하는 인물이었다. 조금 심하게 표현하자면 마음을 들뜨게 하는 슈베르트의 화려한 피아노 소리는 떠오르는 재기의 기록, 피아니스트의 혹사된 손가락 덕분에 생산된 음의 향연이다. 반면 마음을 감동으로 이끄는 베토벤의 장중한 음악은 작곡가의 중첩된 악상의 재구성을 통해 완성된 것이다. 그 치밀한 생각의 과정에는 모든 음과 연주자의 조화를 배려하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 드러나 있다. 베토벤의 음악을 생의 찬미로 인정하는 것은 바로 몇 안되는 소절의 여러 변형으로도 마음을 움직이는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이 마치 모든 생명이 씨앗에서 출발하는 것과 같은 이치를 암묵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고귀함은 단순함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베토벤의 작품이 단조롭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가 붙잡은 소중한 악상을 장인(匠人)과 같은 태도로 갈고 또 갈아 다듬은 때문이다. ● 장형택의 작품은 화려한 음의 향연으로 이루어진 슈베르트의 교향곡이 아니라 베토벤의 진중함과 닮아 있고, 하나의 악상이 반복되어 변형되고 강조되는 점도 닮아 있다. 그의 작품은 가벼운 소나타가 아니라 장중한 교향곡의 형태를 띠고 있는 동시에 악상을 갈고 또 다듬는 것과 같은 장인적 기질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전통에 대한 존중, 무한한 숙련을 위한 과정이라는 장인의 미덕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 작가의 작품이 베토벤의 교향곡 같은 숭고성을 담보한 것은 방법적으로 숙련된 손맛에 취하여 결코 기교를 넘지 않는 데 있기 때문이다. 내용적으로는 인간 생의 숙명에 대한 경건한 접근로를 벗어나지 않는 데 있다. 예술의 목적에 대한 정의는 예술가 수만큼이나 다양할 수 있겠지만, 인간 생(生)의 비밀에 대한 해석은 인간이 신봉하는 종교의 수를 조금 상회할 정도일 것이다. 동, 서양 공히 인간의 탄생에 대해 또 회전하는 생에 대한 목적에 대해서는 각기 표현은 다를지라도 그 의미는 '영적 진화'라는 데로 좁혀지는 것을 본다. 절대 이성에 대한 신화가 사그라진 현대, 눈앞에 존재하는 물질과 형태에 대한 진지한 물음은 곧잘 미술에서 진행되는 것을 보며 생존을 위한 투쟁과 단순한 놀이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또한 하게 된다. 생명의 욕구로서와 인간의 놀이로서의 예술의욕이 결코 다른 것은 아닐 것이다. ● 장형택의 '진지한' 작품이 고뇌로 일그러지지 않은 것은 이 작가가 자신의 노동을 즐기고 교묘함을 실현하려는 장인의 그것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업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마치 자신의 업보처럼 돌을 갈고 다듬고 전혀 다른 성질의 물질인 금속을 접합시키는 수월치 않은 작업과정을 거친다. 물질과 물질의 봉합은 내게는 상처의 치유 과정을 연상시키는데 이는 또한 장인적인 노동을 통해 획득한 자유로운 작업의 상태와 일맥상통한다. 즉 자유를 구하기 위하여 장인적이며 예속적인 작업과정을 감내해야 하고, 그 결과 예속을 확인함으로써 자유를 갈구하는 현실을 직시하는 반어법적인 작업이라는 것이다. 그의 세계는 앞서 지적한 대로 크게 「현대인의 감춰진 노비문서를 찾아서」와 「업」으로 구분할 수 있고 이는 다시 형태적으로 동물의 두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경우와 자연석과 가공석이 반추상적인 형태로 나타는 경우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장형택_업-집으로_임페리얼 스톤, 청동_150×218×65cm_2007

현대인의 감춰진 노비문서를 찾아서 ● 최근작 「현대인의 감춰진 노비문서를 찾아서 2007-1」는 그 특유의 서사성이 나레이션적 구조를 띤 작품이다. 밝은 회색의 지대석 위에 어둡고 짙은 색의 돌을 대석으로 받쳤는데, 표면에 작은 흠집을 내어 마치 밤하늘의 눈처럼 보인다. 이 위에 거대한 책을 펼쳐놓았는데 책이 펼쳐진 한쪽 아래에는 작은 단을 마련하여 그 위에 흰색의 돌로 신발 한 켤레를 조각하여 놓았다. 책의 펼쳐진 한쪽 면에서는 말머리가 밖을 향하여 질주하듯이 갈기가 바람을 가르고 재갈을 물린 가죽끈이 나부끼고 있다. 말머리는 사선으로 절단된 선을 지니고 있는데 말머리는 마치 책에서 솟아난 듯 표면 장력이 표현되어 있다. 반대쪽에는 코뚜레를 낀 소머리가 솟아나서 역시 밖을 향하고 있다. 소머리는 마치 물 위를 헤엄치는 듯 책 표면에 소머리를 중심으로 둥근 파장이 생겨 번져가고 있다. 이 책의 벌어진 틈 사이에는 책갈피로 사용하는 듯한 길고도 검은 돌에 "In Search of Hidden Slavery Documents in Modern Times" 즉 '현대인의 감춰진 노비문서를 찾아서'라는 영문구가 새겨져 있다. 그 끝에는 날카로운 갈고리에 자동차의 번호판을 연상시키는 "1242"가 새겨진 조금 부숴진 직사각형의 판이 매달려 있다. ● 작가 스스로 작품의 형태와 기법, 재료에 대해 "노비문서는 청석과 브론즈를 사용한 작품으로 현대사회에 억압된 인간을 형상화하고 있다. 절단된 말, 소의 형태에서 과거 우리 삶의 상처를, 그리고 이질적인 재료의 혼용에서 그러한 상처를 유발하는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지대석이나 기단의 사각형 돌은 현실적인 규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말머리가 사선으로 절단된 채 접합된 것은 생의 상처를 의미하고, 소머리를 죄는 코뚜레가 여실히 드러난 것은 자유를 찾을 수 없는 현실의 억압을 의미한다. ● 그렇다면 책갈피에 새겨진 글씨가 영문인 것은? 우리 시대의 현학적 표현 내지는 과거가 아닌 시제를 강하게 인식시키는 기제일 것이다. 과거를 기억하는 텍스트가 한문이라면, 영어는 현재 내지 미래일 것이다. 우리 시대 영어를 교육받지 못한 세대나 사회계층이 겪어야 할 또다른 족쇄임을 인지한다면. '본토인 같은' 영어의 습득이 우리 사회에서 부의 상층계급을 형성하는 징조에 임박한 지금, 영어의 텍스트가 의미하는 것은 어쩌면 핏줄이 지녔던 사회적 신분의 힘을 교육이라는 틀을 쓴 또다른 신분의 핏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 한편 「현대인인 갖고 있는 노비문서를 찾아서」(2007)는 2005년과 2006년에 제작한 같은 명제의 작품이 진화 내지는 결합한 형태의 작품이다. 네모난 대리석 위에 화강암 자연석이 쪼개진 상태로 고정되어 있고 한쪽 끝은 검은색 돌로 접합되어 있다. 마치 아가리를 벌린 듯한 자연석의 벌어진 틈새에는 흰색 대리석의 둥근 구형이 삽입되어 있어 진주조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자연석의 벌어진 틈새는 검은 색이 입혀졌는데 대석과 닿은 끝에서 검정색의 말이 나와 대석의 돌에 스스르 박혀있는 듯하다. 그리고 옆으로는 예의 기다란 청석에 "In Search of Contemporary Slavery Documents..."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작가는 이 영문을 "현대인이 갖고 있는 노비문서를 찾아서"라는 명제로 사용하였다. ● 앞서 「현대인의 감춰진 노비문서를 찾아서」와 「현대인이 갖고 있는 노비문서를 찾아서」는 비슷한 명제이지만 분명 다른 내용이다. 감춰진 것을 찾아내는 것과 갖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사회적으로도 명백히 다른 뉘앙스를 지닌다. 과거 조선시대의 신분제가 양반과 상민, 천민 등이 존재했다고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우리들은 그러한 신분제가 존재했었는지 의심스럽다. 주변에서 발간되는 모든 족보는 모두 양반이요, 말해지는 이웃이나 친구의 선조 모두 양반인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과거 조상들 중 천민이었거나 노비였던 이는 만나보기 어렵다. 현대인에게도 자신의 현재와는 전혀 관계없는 선조가 과거로 존재하며 숨기고 싶은 과거, 부정하고픈 선조로 자리하고 있음을 본다. 그러고 보니 살아 생전 노비들이 감당했던 삶의 무게와 노동보다 그들이 슬퍼할 일이 후손이 자신들을 부정하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 노비들이 지녔던 멍에가 노동과 현존의 문제였다면, 현대인의 멍에는 자기 정체성, 자존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 어찌 되었든 텍스트 속에, 역사 속에 존재하는 '노비'라는 개념을 차용하여 작가는 현대인의 '멍에'를 현상화하였다. 그 현상화에서 숨어 있는 것은 책이라는 또는 문서라는 문자의 형태에서 끄집어올렸고, 존재하는 또는 지니고 있는 것은 마치 조개와 같은 형상의 아가리 속에서 찾아내고 있다. 진주는 다른 이에게는 아름다운 보석이지만 조개에게는 아픈 상처일뿐이다. 게다가 그 영롱한 단단한 광석과 같은 물체가 다름 아닌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싸고 또 싼 막에 불과한 것이다. ● 2005년의 「현대인이 갖고 있는 노비문서를 찾아서」에 대해 작가는 "작품에서 자연석은 2등분으로 절단되어졌고 단절된 틈바구니에 과거 우리의 삶의 상처를(납재료) 흐르는 말의 모양으로 표현하였다. 긴 막대들은 현대인이 갖고 있는 일상 생활의 무거운 짐을 표현하였다. 과거에 노비들은 상처받고 왜곡되어진 말(馬)의 형상에서 역설적으로 희망을 꿈꾸며 무엇인가 억압에 의한 제도적 멍에 대한 비판의식을 침묵하는 차가움으로 나타내었다."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내용에 더하여 2007년 작에서는 둥근 원의 형태가 더하여졌으니, 작가는 외부에 대한 태도에서부터 내부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기제를 추가하였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인을 '노비'라는 전근대적인 개념을 적용하여 구속당한 신체와 이를 벗어나려는 정신으로 이분하여 나타냄으로써 더욱 강한 정신적 자유에의 의지를 강조하였다.

장형택_Karma-가지마오_청동, 대리석_40×60×55cm_2007

물질의 봉합, 상처의 치유 ● 정신, 과거와 현재를 담은 그의 작품은 상처에 대한 '봉합'으로 설명할 수 있는 작업방식을 취하고 있어 설득력을 얻는다. 우선 그의 작품은 앗상블라주라 할 수 있는 재료와 재료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돌도 자연석, 청석, 오석, 대리석 등 다양하고 브론즈, 오브제 등 표현에 필요한 재료를 위해서 어떤 재료든 구애받지 않는다. 물론 현대의 모든 조각가가 이러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지만 그의 '앗상블라주'는 단지 물질의 조합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물질과 물질의 조화로운 공존인 조합이 아니라 '봉합'인 것이다. 이전에 하나였으나 외상에 의해 벌어져 다른 것이 되어버린 것을 다시 하나로 만드는 봉합은 장인적 노고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 장형택은 조각가가 지녀왔던 노고를 자신의 작업으로 끌어들여 노동을 즐기는 작가로 보인다. 돌에 말의 형태를 새기고 꼭 맞추어 브론즈로 만든 말을 밀어 넣는다. 설탕을 녹여 판에 부어 납작 누른 다음 쇠로 여러 물상의 모양을 만들어 찍어 낸 것을 조심스레 가장자리를 자르고 떼어 내었던 어린 시절 '뽑기'처럼 말의 모양은 부드러우면서도 복잡한 실루엣을 지닌 평면화이다. 이 말 모양이 그대로 돌에 스며들게 하기 위하여 작가는 돌판에 똑같은 말모양을 그리고 그 안을 도려내었을 것이다. 미세한 틈마저 허용하지 않는 이 끼우기 개념은 작가의 숙달된 그리고 철저하려 애쓴 노력의 결과 실현된 것이다. 이러한 치밀함은 「현대인이 갖고 있는 노비문서를 찾아서」 시리즈에서 자연의 화강암 안에 들어 있는 진주알 같은 구형이 울퉁불퉁한 암석 안에서는 손으로 밀면 위아래 또는 좌우로 돌아가는 듯 움직이지만 절대 밖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게 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 작가는 장인적 노동을 즐길뿐만 아니라 머리 속에 만들어낸 미세한 구상을 조립식 장난감처럼 하나하나씩 맞추어 나가는 것이다. 그는 레고를 조립하고, 프라모델을 맞추어가는 것처럼 돌과 브론즈와 때론 깡통을 맞추어간다. 이러한 재료의 결합과 동시에 형태의 봉합이라는 개념은 일찍이 그가 지닌 조각에 대한 생각에서 정리되고 있음을 본다. "조각은 상호침투의 방법으로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어야 한다. 조각에 역동감과 운동감을 주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개의 시각적 이미지가 동시에 시간상 연속적으로 배치되어야 한다. 하나의 시각적 사건에 연속되는 또 다른 순간이 있는 것이다. 재료가 가지고 있는 속성을 유지하면서도 색채와 형태 및 표면처리의 변화에 의해 강한 이질적 성격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이는 구조적 질서를 유지하면서 표면적 변화를 주는 것이다."(「업을 주제로 한 동물적 표현에 관한 작품 제작 연구」, 2000.) 즉 변화와 질서가 이질적 재료 사용의 요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다시 자연의 돌과 기계적인 압축과정을 거친 청동의 조화를 통해 구현된 상처의 현현과정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시간과 공간의 직조를 작가는 돌과 브론즈라는 재료의 결합을 통해 접근한다. 자연물이자 과거라는 시간성을 지닌 돌, 돌에 형태로 스며들 수 있는 브론즈는 시대의 산물이자 인공물로서 공간을 의미한다. 돌과 브론즈의 조합은 결국 작가가 의도하는 내용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이들 재료가 환경과 역사, 순환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래알이 돌이 되는데는 시간이 작용하고 브론즈가 돌에서 추출되어 금속이 되는 데는 열이라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자연과 인공, 역사와 시간 그리고 이들 모두가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는 순환의 골리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작가는 재료의 선택에서부터 의미를 두고 있다. ● 말과 소, 우리 역사에서 이들처럼 인간을 위해 존재했던 동물이 있던가. 삼국시대에 불교를 다투어 받아들인 이유가 경제적 가치가 큰 말이나 소가 거대 분묘에 순장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음도 하나의 이유였다. 살아있는 것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는 자비사상이 동물에게도 적용되어 승용차이자 장갑차이고 트랙터였던 말과 소를 죽이지 않을 수 있는 사회적 장치가 바로 불교였던 것이다. 장형택의 작품에 나타나는 동물인 말과 소 또한 역사적인 맥락에서 운송수단, 사회적 구조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장형택_현대인이 갖고 있는 노비문서를 찾아서_청동, 납, 청석, 흑석, 자연석_120×240×136cm_2007

텍스트의 현현과 상징 언어의 간극에서 ● 내용적으로 자연과 인공이 결합하고 형식적으로 이물질인 자연석과 가공석 그리고 금속이 결합하는 장형택의 작품은 '노비문서'에 시각을 고정시킴으로써 '자유에의 의지'가 주제가 되었다. 노비란 구속, 특히 신체적 제약을 전제로 한 것이기에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게다가 문서라는 것은 그러한 제약을 영구화시키는 텍스트이기에 '노비문서'란 자유를 '제약하는 기제'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노비의 상황 바탕에는 인도에서 발원한 불교 사상인 '업'이 존재한다. 연기(緣起)라고도 이해할 수 있는 업은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기에 이것이 있는 상호관계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다. 즉 모든 생물은 윤회하는 삶을 사는데 현생에 경험하는 거의 모든 것이 업의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과거의 업에 더하여 현생의 업이 포함되기 마련이다. 결국 좋은 미래는 자신의 현재를 바꾸려는 노력이라는 데 귀결된다. ● 작가가 제시한 '현대인의 노비문서'란 과거를 포함한 현재진행형의 '업' 개념이다. 미래를 개척하는 현재는 숨어있는 노비문서 또는 지니고 있는 노비문서처럼 우리를 속박하고 억압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그것은 개인의 악행일 수도 있고 또 재수없게 말려든 어떤 사건일 수도 있지만 결국은 과거와의 연계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러한 시각에서는 현재 또한 미래의 과거이다. 하지만 지나간 것은 현재에 없고 미래는 아직 없고, 현재 또한 자꾸만 지나간 과거일 뿐이니 오직 지나는 모든 순간순간만 존재한다는 개념은 장형택의 조각에서 제시된 무엇을 '찾는다'라는 개념과 배치된다. 결국 직접적인 텍스트로 제시한 '현대인의 감춰진 노비문서를 찾아서' 또는 '현대인이 갖고 있는 노비문서를 찾아서'라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 우리가 개념화한 어떤 것들에 의한 '구속'을 의미한다. ● 장형택의 작품에서 소나 말은 동물의 형태이되 기실 내용은 인간이다. 동물처럼 혹사당한 노비라는 계층의 인간상을 비유법을 그대로 적용하여 소, 말로 형상화한 것이다. 사선으로절단된 말의 형태, 코뚜레가 뚫려있는 소머리는 상처받고 왜곡된 동물을 이미지화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노비라는 구속된 인간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의미한다. 여기에 덧붙여진 신발이나 와인잔 등은 현대성을 강하게 부각시키는 매체이다. 업에서 발원한 숙명을 딛는 적극적인 행위로서 노비문서를 찾는 일은 말과 소로 상징되는 노비의 역사와 이를 벗어나고자 하는 현재에 대한 충실한 이행이 중요하다는 메시지이다. ● 텍스트의 드러냄과 소와 말이라는 동물의 머리가 차용한 상징 덕에 작가가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내용은 매우 웅변적이다. 그래서 교묘하고 또 실재적인 조각적 실천이 충실한 작품의 빛을 희미하게 하는 감이 있다. 서술적이며 강조적인 문법, 텍스트의 드러냄과 일상적 상징의 이용이 정형택 작품의 특징이자 또한 한계이다. 완결된 영어 문장의 사용은 텍스트 자체로도 하나의 작품성을 갖는다. 소나 말의 머리는 하나의 완결된 구조로 서사성을 지니고 있다. 이 둘의 결합은 텍스트의 드러냄과 숨김이라는 모순을 갖는 동시에 분리를 전제로 한 봉합의 과정을 시각화한다. 자연석, 신발, 지대석, 책갈피 같은 기다란 돌, 심지어는 나뭇가지 형태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모든 형태가 나름의 이야기를 갖는다. 이들은 다른 형태를 띠지만 기실 같은 이야기를 하는, 기본음을 항상 지니고 있는 변형된 악장과도 같다. 서구적인 텍스트와 한국적인 상징적 형태가 동일한 음가를 갖는다는 점에서 정형택의 조각에서 이미지의 조합은 하나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다르게 말하는 무한증식의 방식을 띠고 있다. 장형택의 작품은 이질적인 재료의 결합과 다른 방식의 언어를 하나의 작품에서 구사한다. 또한 과거 장인이 속했던 예속을 상징하는 노예적 노동의 과정을 단순한 진리인 '업'과 윤회에 대한 설명을 위해 불사하고, 현재를 말하기 위해 과거를 설명하던 서사적 구조를 차용한다. 떠오른 악상 하나를 다듬어 여럿을 만들어 장중한 교향악을 작곡한 베토벤처럼 장형택의 조형언어가 반복이 아닌 변주와 확장을 통해 더욱 심화하기를 기대해본다. ■ 조은정

Vol.20071127i | 장형택 조각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