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재영 수묵채색展   2007_1122 ▶ 2007_1223 / 월요일 휴관

민재영_직장(職場 / A work place)_한지에 수묵, 채색_125×170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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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1122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가인갤러리 서울 종로구 평창동 512-2번지 Tel. 02_394_3631 www.gaainart.com

민재영은 도시의 사람들을 그린다. 도시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삶의 장(場)으로서 최근 많은 작가들의 관심 소재가 되고 있다. 그러나, 다수의 작가들이 도시의 건물이나 구조와 같은 '공간' 자체에 주목하는 반면, 민재영은 그 공간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에 집중한다. 보다 정확히는 인간의 '관계'에 관심을 둔다. 그녀의 그림에는 무리를 이룬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들로부터 우리는 타인과 관계 맺으며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얽히어 때로는 힘겹게 또 때로는 무덤덤하게 지금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나 자신을 말이다. 그림 속 사람들은 옆 사람과 몸이 닿지 않으려 애쓰면서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기도 하고, 서로 어깨를 부딪히며 밀집된 군중을 헤치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때로는 길 위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잠시 우두커니 서있기도 하고, 식당, 편의점, 클럽과 같이 사람이 북적대는 일상의 장소에서 주변 사람들과 무심히 스쳐 지나기도 한다. 그들 모두는 언젠가 그 자리에 있었을 법한 나 자신이며, 움직임이 정지된 그 순간은 지금도 여전히 흐르고 있는 시간이다. 구체적 인물과 상황이 묘사되어 있지만 인물들은 특정 개인으로 인식되기 이전에 익명의 인간으로 다가오고, 그들이 처한 상황은 특별한 한 순간이기 보다는 우리가 살아가며 늘 겪고 있는 보편적 상황에 가깝다.

민재영_만찬중계(Men in Black)_한지에 수묵, 채색_145×145cm_2007

이렇듯 민재영의 그림은 도시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의 일반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 일반성은 우리에게 각자의 개별적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일상의 장면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 상황에서 자신이 느꼈던 개인적인 감정을 다시금 환기하게 된다. 군중 속에 있어도 혼자인 듯한 외로움, 옆 사람과 살이 닿을 때의 묘한 느낌, 주변 동료들에게 느끼는 경쟁심, 그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리라는 동질감 등 살면서 타인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크고 작은 감정들이 그것이다. 평소에는 묻혀 있던 일상의 한 순간에서 느낀 감정과 정서를 그와 유사한 장면과 맞닥뜨림으로써 다시금 상기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내가 느낀 것을 다른 사람도 느낄 수 있다는 인간의 보편성이 자신의 그림을 통해 확인되기를 바라는 예술의 소통 가능성에 대한 작가의 근본적인 믿음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작가의 의도가 실현되도록 뒷받침하는 것은 그림의 형식적 측면이다. 민재영의 그림 대부분은 위에서 수직으로 내려다보거나 사선으로 비껴 내려다보는 관찰자의 시점으로 그려진다. 이는 부유하는 인간 군상의 단면을 하나의 장면으로서 극명하게 부각시키는 동시에 그러한 장면이 보편적 정서를 획득하도록 돕는다. 누구나 겪었을 법한 구체적인 상황을 하나의 장면으로 인식하여 그 장면의 이미지가 부여하는 특정한 정서를 환기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초기에 그녀가 작품 소재로 삼았던 영화 『희생』이나 『해피투게더』의 한 장면처럼, 일상의 순간도 정지된 한 장면으로서 다가갈 때 어떠한 정서적 울림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녀가 자신의 그림에서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 상황 자체에 대한 몰입이라기 보다 특정한 장면이 불러일으키는 정서적 경험인 셈이다.

민재영_호밀밭(In the Rye)_한지에 수묵, 채색_148.5×210.5cm_2007

민재영의 그림이 하나의 장면으로 보여지는 또 다른 이유는 그녀가 움직이는 순간을 포착하기 때문이다. 실제 작가는 동영상을 촬영하고 그 중에 자신에게 와 닿는 순간의 장면을 정지시켜 그림으로 옮긴다. 초기에는 사진을 이용했지만 사진이 움직임을 포착하기에 부적절하여 동영상 촬영 방법으로 선회했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려진 그림 속 인물들은 고정된 채 완벽하게 재현된 하나의 대상물이 아니라 움직이는 중에 있는 실제 사람들처럼 생생하게 다가오고, 전체적인 화면은 진행중인 어떠한 구체적 상황의 한 장면인 것처럼 여겨지게 된다. 한편, 이처럼 우리가 민재영의 그림에서 움직임을 인식하고 이미지의 미세한 떨림을 감지하게 되는 데는 화면을 구성하는 가로선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림의 전체 화면을 메우는 가로선은 영상화면의 주사선(scanning line)과 같이 중첩되어 특정한 형상을 드러낸다. 그녀가 처음 가로선 그림을 시도했던 것 역시 동양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하자는 취지로 열린 한 단체전(『낯선 외출』, 1999)에서 전통적인 수묵화에 의도적으로 텔레비전의 주사선을 도입한 그림이었다. 마치 멈춤(pause) 단추를 눌렀을 때 주사선이 미세하게 떨리는 비디오 화면을 보는 것처럼, 우리는 무수히 많은 가로선들로 채워진 민재영의 그림에서 움직임이 일시 정지된 하나의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민재영_하복(夏服 / The Summer Uniform)_한지에 수묵, 채색_130×176cm_2007

그러나 민재영 그림의 가로선은 브라운관의 주사선과 외견상 직접적인 유사관계를 갖고 있으면서 더 근본적으로는 전통적인 동양화가 갖는 형식적 한계를 극복하는 중요한 방편으로 사용된다. 그녀에게 동양화의 선은 거부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대상의 깊이나 실재감을 표현하는 데는 밋밋한 윤곽선에 그칠 수밖에 없어 한계로 다가왔다. 또한 윤곽선 없이 한 붓으로 면을 만드는 것 역시 인물의 세부적인 부분을 묘사하기에는 둔탁하여 적절치 않았다. 그리하여 민재영은 동양화의 윤곽선이 만들어내는 삽화성을 벗어나면서도 선이 지닌 특유의 맛과 세밀함을 고수하고자 여러 시도를 해왔다. 1998년 첫 개인전에서는 이미지를 하나의 선으로 분명하게 표현하지 않고 여러 개의 선을 겹쳐서 형상을 그려냈으며, 이후 2001년 2회 개인전에서는 흐릿한 수묵의 세로선들을 중첩하여 인물 형상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진화과정을 거쳐 나타난 것이 오늘날 민재영의 가로선 그림이다. 또렷한 윤곽선 없이도 인물의 표정까지 생생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그녀에게 지금의 가로선은 매우 적절한 방편이 된 것이다. 민재영의 가로선 그림은 동양화 붓을 사용하여 일정한 간격으로 수묵의 직선을 그은 후 그 위에 목탄으로 대략의 스케치를 하고, 그 이후부터 수묵이면 수묵, 채색이면 채색으로 짧고 긴 선을 무수히 중첩하여 형태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방법은 선이 겹쳐지는 정도에 따라 명암이 조절되어 별다른 조작 없이 가로선만으로도 깊이와 양감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그려진 그림은 매끈하게 한번에 그은 선과는 달리 형상이 고정되지 않고 진동하듯 흔들리며 자연스럽게 전체적인 이미지를 화면 위로 떠오르게 한다. 가까이서 보면 그저 무수한 직선들로 이루어진 추상적 이미지가 거리를 두고 멀어질수록 서서히 또렷한 이미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러한 민재영의 가로선 그림은 기본적인 방식을 유지하되 계속하여 진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민재영_Wander Girls_한지에 수묵_130×170cm_2007

처음에는 거의 수묵 위주였던 그림에 약간의 엷은 채색이 가미되다가 점차 진한 색채를 위주로 한 작품들이 강세를 이루게 되었다. 사실상 그녀의 가로선 그림은 색채 위주일 때 그 효과가 배가된다. 색을 섞지 않고 약간씩 다른 같은 색 계열의 물감을 겹쳐 칠함으로써 인접한 색과의 관계에 따라 색의 발현이 이루어지도록 하여 채도를 떨어뜨리지 않으면서도 풍부한 색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는 기본 4색의 조합으로 무수히 많은 망점을 겹쳐 찍는 오프셋 인쇄와 같은 원리로, 작가는 먼저 한 계열의 색을 칠하고 다른 계열의 색을 칠해가는 식으로 색을 중첩해간다. 이번 전시에는 색채를 위주로 한 진채화와 먹의 농담으로만 이루어진 수묵화가 대조를 이루어 그 차이를 비교해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번 전시는 민재영의 가로선 그림이 형식적 측면뿐 아니라 소재 선정과 제작 과정에서도 변화,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과 그로부터 환기되는 정서를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는 동일하되 작품 소재의 범위를 일반적인 인간군상에서 특정 계층의 사람들로 좁힘으로써 주제를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시도가 이번 전시에는 돋보인다. 예컨대 교복 입은 여학생들이나 양복 입은 직장인들과 같이 계층을 알 수 있는 인간군상을 그린 그림들은 보다 구체적이고 효과적으로 어떠한 정서를 환기한다. 서로 부대끼는 가운데 자신을 보호하려는 그 시절 여학생들이 지닌 특유한 정서나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고자 애쓰는 직장인의 특수한 상황이 그대로 전달되어 그림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강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또한 제작 과정에서는 현실적으로 특정 계층의 사람들이 밀집해있는 상황을 찾아내기 어려울뿐더러 원하는 정서가 배어나는 장면을 포착하기 어렵기 때문에 특정한 상황을 연출하여 촬영하였다. 실재를 재연한 것이 실재보다 더 실제적인 까닭에 연출된 상황을 만들어 촬영하는 보다 적극적인 방법을 택한 것이다.

민재영_길 위에서(On A Brick Sidewalk)_한지에 수묵, 채색_100×132cm_2006

이렇듯 민재영의 그림은 갑자기 변화하거나 도약하지 않았다. 선의 중첩으로 형상을 만들어내는 형식적 기법에서부터 도시의 인간을 다루는 주제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그림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서서히 같은 맥락에서 진행되어 왔다. 또한 민재영은 누구보다 동양화의 기본적인 형식에 대한 연습이 충실한 작가다. 충분한 연습과 고민을 통해 동양화를 자신의 것으로 해석하고, 먹과 한지라는 재료를 한정된 요소로 제한한 채 그 안에서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계속하여 발전시키고 있을 뿐이다. 그녀는 최근 전통과 동시대성 사이에서 고민하며 자신만의 길을 가고자 하는 젊은 동양화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러나 동양화의 전통적인 준법을 고수하는 산수풍경과 서양의 팝아트 캐릭터를 같은 화면 안에 넣어 전통과 현대의 공존을 시도하는 일군의 작가들과 달리, 그녀는 그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의 작가로서 동양화의 재료를 사용하여 자신 주변의 삶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첫 개인전 작업노트에서 밝히고 있듯이 민재영은 지나간 특정 시대의 모델이 전통의 대안이 될 수 없으며, 다만 지나온 시간과 공간의 집적으로서의 '나'를 제대로 알아가고 현재의 자신에 충실함으로써 전통의 계승이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오늘날 동양화가 '우리의 것을 지켜내야 한다'는 당위가 아닌 진정한 동시대 미술로 거듭날 수 있는 바람직한 하나의 방향이 아닐까 한다. 이것이 그녀의 작업을 계속하여 기대해도 좋은 가장 큰 이유다. ■ 신혜영

Vol.20071125d | 민재영 수묵채색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