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구영모_권남희_정영훈_정하응_이택근_차기율_한계륜_홍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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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우발적이거나 필연적이거나 ● 소통하지 않는 주체들이 있다. 애초에 의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방법에 어두웠고, 가능성 여부를 탐색하느라 결과와 미래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언제가 어떤 형태로든 만나야 함을, 서로 마주 보고 나누어야 할 무엇인가 있을 듯한 예감은 있었다. 스치며 비껴가며 불확실한 기약만 마음 속으로 되뇌었다. 이윽고 혹은 불현듯, 그 모든 일들이 순리처럼 이뤄지는 순간이 온다. 그 순간에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여의도, 몰개성한 빌딩의 군락 ● 여의도에 있는 건축물들은 각각을 구별하기 쉽지 않다. 일제히 같은 모양새로 우뚝우뚝 서있는 건물들을 변별하는 유일한 근거는 그들 앞에 붙여진 상호뿐이다.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을 법한 상호와 상표. 회사의 이름, 상품의 이름, 건물의 이름, 거리의 이름, 이름들. 저마다 제각기 더 잘 기억되고 더 높게 올라가겠노라는 포부를 갖고 있는 이 이름들은 개체를 대표하는 도구가 되지 못하고 그저 다툼과 겨룸을 표방하기만 하다. 게다가 이곳에 모여 있는 국회의사당, 방송국, 각 기업의 본사, 그리고 그 내부를 채우고 있는 넥타이와 정장 차림의 사람들은 이곳을 더욱 엄격하게 만든다. 심지어 다른 곳에서 익숙한 상호와 상표조차도 여의도에 이르면 객관화되고 엄숙해진다. 여의도란 규격화와 제도화에 적합한 곳이기 때문이다. 늘 똑 같은 풍경, 같은 사람들. 세상은 늘 빠르기만 하고, 처지는 달라지지 않는다. 예전에는 꿈이라도 꾸었지만 어느 순간서부터는 그마저도 흥미를 잃었다. 결코 달라지지 않는 세상에 패배했다고도, 타협했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저 단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아가는 것. 그리고 그랬다는 사실조차 잊고 사는 것. 그뿐이다.
병치가 아닌 융화(融和) ● 예술작품은 갤러리나 미술관 그리고 박물관에만 있는 것이라고 흔히들 생각한다. 덕분에 예술은 생활과 동떨어지게 되고, 예술하는 행위 역시 어딘지 고귀하고 대단한 일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실제 예술은 노동과 흡사하다. 창작 활동이라는 고상한 용어 대신 작가들은 자신의 일을 의례 작업이라고 말한다. 그들에게 작업은 밥벌이며, 생활이며, 고통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일상의 아픔과 괴로움을 딛고 작업장에 들어서듯, 작가들도 그런 투지와 비장한 각오로 작업에 임한다. 그들에게 작업이 노동이듯 작품 역시 일의 성과 즉 사물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 결과물에 대단한 애정과 열의는 갖고 있다. 이는 사물들이 일련의 과정을 거쳐 하나의 작품이 될 때 필요한 특정한 개념화 때문이다. 작품에 부여된 고유한 속성. 작품이 지녔으면 하고 애초에 바랐던 특정한 의미. 이러한 개념이 없다면 작품은 여전히 사물일 것이다. 그리고 사물로서의 용도와 적합성과는 현격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쓸모 없는 사물로 전락할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미술이 더욱 어렵고 불편할 수도 있다. 우리 옆에 분명 존재하고는 있지만, 굳이 안면을 트거나 악수를 나눌 수는 없을 것만 같다. 이웃에 새로 이사온 정체를 알 수 없는 부자처럼, 예술은 그리고 미술은 너무나 멀고 낯설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자. 어린 시절 놀이터 바닥에 그려 놓고 놀던 동그라미며 별이며 나무며 네모난 조각들을. 못으로 긁어대던 벽과 바닥들을. 그들이 보여주는 불규칙성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떠올려 보자. 그러며 얼마나 즐겁고 행복했는지 돌이켜 보자. 그것이면 충분하다. 당신은 이제 이들 예술작품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이다. 작가의 의도나 작품의 의미는 잠깐 미뤄두기로 하자. 알게 된다 해도 당신이 느낀 것과는 상관 없다. 애초에 예술이, 미술이 갖고 있다고 주장되던 효용 속에 그저 몸을 푹 담그기만 하면 된다. 일상과 융화되어 있는 작품과 그들이 조형해낸 새로운 풍경을 일단 바라보기로 하자. ■ 조현정
Vol.20071125a | 도시, 풍경, 융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