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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1109_금요일_05:30pm
작가와의 대화_2007_1117_토요일_04:30pm
갤러리 쿤스트독 서울 종로구 창성동 122-9번지 Tel. 02_722_8897 www.kunstdoc.com
형식주의와 삶의 메타포 사이 ● 모더니즘은 회화를 회화이게 해주는 조건 즉 회화의 장르적 특수성이 점, 선, 면, 색채, 안료의 질료적인(물질적인) 성질과 질감, 그리고 평면과 구조 등의 형식적인 요소라고 본다. 그리고 그 형식주의, 환원주의, 절대주의, 순수주의의 지평으로부터 실제를 연상시키는 재현적인 요소는 배제되는데, 재현적인 요소가 순수회화를 훼손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 그러나 회화의 장으로부터 재현적인 성질을 배제하고자 했던 모더니즘의 기획은 다만 전통적인 형상미술과 그 경우가 다를 뿐, 재차 재현적인 회화로 되돌려진다. 그러니까 재현의 방법이 달라졌다고나 할까. 주지하다시피 세잔은 모든 형상(실제)이 최소한의 기하학적인 형태로 환원될 수 있다고 여겼으며, 수직선과 수평선의 교차에 바탕을 둔 몬드리안의 회화 역시 실제를 추상화한 것이다. 절대주의를 주장한 말레비치의 화면 또한 순수한 형식논리의 산물이기보다는 감각적 실제 너머의 절대적이고 관념적인 실재, 실재 자체(추상미술의 이론적 전범으로 평가되는 칸트의 물物 자체에 해당하는)를 겨냥한 것이다. 더불어 칸딘스키의 공감각 이후 우리는 질감이나 색채와 같은 형식적인 요소들이 서정적인 어떤 느낌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상징이나 은유와 같은 비유법 탓에 특정의 색채나 형태를 통해 재현적인 의미를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 따라서 모더니즘의 형식논리는 결국 실제(감각적 실제나 관념적 실제)를 추상화한 것으로서, 상징이나 은유 등의 암시적인 형태를 빌려서 실제를 재현하는 태도나 방법인 것으로 고쳐 읽을 수 있다. 그 이면에선 형식논리와 재현의 논리가, 회화의 자율성을 지향하는 운동성과 어떤 실제를 암시하는 경향성이 길항하고 부침한다. ● 그리고 이는 그대로 하관식의 회화적 특질과도 통한다. 즉 그의 그림은 외관상으론 모더니즘의 환원주의 논리를 견지하고 있으면서도, 그 이면에선 형식적인 요소들이 불러일으키는 정서적이고 서정적인 환기력이 중첩돼 있다. 탈재현에 바탕을 둔 모더니즘의 형식주의 논리와 어떤 실제를 암시해주는 재현의 논리가 어우러져 있는 것이다.
하관식의 그림에서의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평면화의 경향성을 들 수 있다. 평면이 단색조의 옷을 덧입고 그려진 그의 그림은 회화의 조건을 평면으로 본 클레멘테 그린버그의 모더니즘적 환원주의와, 순수회화의 가능성을 색면에서 찾은 색면화파, 그리고 단색조에서 회화의 관념적이고 정서적인 결정체를 본 모노크롬 화파와의 연관성을 떠올리게 한다. 마치 회화를 회화이게 해주는 최소한의 조건이자 최종적인 조건으로서의 평면성을 강조하고 증명하는 과정이 느껴진다. ● 그림에서의 평면성은 여러 크고 작은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으로 중첩되고 변주된다. 주지하다시피 정방형이나 장방형은 원과 함께 기하학적인 형태 중 가장 안정된 체계, 완전한 체계, 자족적인 체계를 암시하며, 이것이 구조와 틀에 대한 관심으로 변주되고 증폭된다. 그러니까 사각의 형태와 사각의 구조 그리고 사각의 틀이 형태상으로나 의미론적으로 중첩돼 있는 것이다. 캔버스 자체의 사각 틀과 그 표면에 덧그려진 사각의 형태(그 자체가 캔버스의 틀이 변주된 형태)가 일치한다거나, 캔버스의 큰 틀 속에 작은 사각의 틀이 포개진다는 점에서 작가의 그림은 회화의 조건을 캔버스 자체의 구조적인 성질에서 찾은 쉬포르쉬르파스(지지대와 지지체)와 통한다. ● 그리고 이런 중첩된 구조나 포개진 틀에 대한 인식은 프레임을 통해 재차 강조된다. 즉 캔버스의 틀과 그림이 구별되지 않는 것만큼이나, 프레임과 그림 혹은 화면 역시 별개의 범주가 아니다. 작가에게 있어서 프레임은 흔히 그렇듯 그림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부수적인 장치라기보다는 그림 자체를 변주하고 확장하는 그림의 일부처럼 보인다. 작가는 차갑고 무표정한 느낌의 알루미늄 소재의 프레임으로써 이러한 사실 즉 그림의 구조적인 성질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로써 하관식의 그림은 캔버스의 평면과 그 표면에 덧그려진 사각의 평면이 일치하며, 프레임 속에 캔버스의 틀이, 그리고 재차 사각의 형태(이미지)가 담겨지고 중첩되고 반복된다. 평면성이 강조되는 한편, 똑같은 구조를 반복하고 흉내 내는(프레임과 캔버스와 이미지가 서로 변주되는) 과정과 행위를 통해서 모더니즘의 형식논리를 재확인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작가의 근작에서는 의미 있는 변화가 시도되고 있는데, 사선구도의 도입이 그것이다. 여타의 그림에서처럼 일종의 색상 띠 형태의 이미지를 화면에다 포치한 사선구도는 안정적인 체계와 더불어 일말의 파격이나 긴장감 그리고 내적울림을 불러일으킨다. 이로써 비록 불안정 체계의 전면적인 인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균형을 통한 균형 대신에 불균형을 통한 균형, 안정을 통한 안정 대신에 불안정을 통한 안정의 추구로 점차 진화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 그런가하면 작가의 그림은 기본적으론 추상미술의 형식논리를 견지하면서도, 이와 동시에 그 이미지가 일종의 외적 실제를 떠올리게 한다. 이것이 구조적인 닮은꼴과 함께 특히 그 색상이나 질감이 불러일으키는 서정적이고 정서적인 느낌으로써 현상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캔버스의 틀과 중첩된 사각의 형태가 문이나 창문을 암시하며, 특히 밝은 색과 어두운 색의 띠 형상을 대비시킨 그림에서는 그림자와 더불어 입체적인 요철효과가 그 실재감을 더한다. 또한 사선구도를 중첩시킨 그림에서는 그 형태가 다리를 지지하고 있는 교각의 철골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밝은 화면과 어두운 화면을 대비시킨 그림에서는 문틈으로 보이는 빛의 실체에 대한 암시가 느껴지며, 특히 띠 형상을 반복적으로 중첩시킨 그림에서는 마치 블라인드를 통해 본 빛의 인상을 옮긴 듯 그 빛에 아우라를 더해준다.
이와 함께 하관식의 그림에서의 재현적인 요소와 성질(비록 암시적인 형태라고는 하나)로는 색면이 불러일으키는 서정적인 환기력이 단연 두드러져 보인다. 그러니까 작가는 원색이나 순색을 통한 강렬한 대비효과를 피하고, 파스텔 톤의 색조로써 부드럽고 내면적인 느낌을 강조한다. 적색 계열의 색면이 따뜻하고 부드럽고 우호적인 빛의 질감을 암시한다면, 청색 계열의 색면은 상대적으로 무겁고 내향적인 경향성을 띤다. 여기서 적색이나 청색이라고는 했지만, 엄밀하게는 일종의 사이색이나 간색으로 볼 수 있으며, 이로써 자연에 대한 인상이나 경험을 색상 속에 녹여낸 전통적인 미적 감수성에의 공감이 느껴진다. 특히 청회색을 주조로 한 화면에서 작가는 자잘한 붓 터치를 반복적으로 중첩시키는데, 이것이 공기나 대기의 미묘한 입자를, 그 밀도감의 섬세한 차이를 전해준다. ● 하관식의 그림은 외관상 모더니즘의 형식논리나 환원주의의 논리를 유지하는 한편, 그 형식을 재현적인 논리로까지 연결시키고 확장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재현적인 요소나 성질 자체는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겨냥한 것이기보다는, 형식적인 요소가 불러일으키는 우연적이고 관습적이며, 암시적이고 상징적인 것이다. 창문이나 교각의 철골구조물과 같은 일부 구조적인 닮은꼴이 없지 않으나, 대개는 빛의 결이나 대기의 입자를 암시하는 색감과 질감으로써 서정적이고 정서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이로써 작가의 그림은 단순한 형식논리를 넘어 형식 속에다가 삶의 경험과 자연에 대한 인상을 녹여낸 듯한 인상이 읽혀진다. 일종의 생활사로 축조된 시간의 지층을 최소한의 구조와 단순한 색면의 조합으로써 압축해내고 있는 것이다. ■ 고충환
Vol.20071113a | 하관식 회화展